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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영화]영화 이야기 - 영화와 관련된 몇가지 추억들

by 만술[ME] 2013. 11. 19.


예전에 제가 어떻게 음악을 듣게 되었는지 블로그에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에피소드 중심으로 제가 영화를 보게 된 계기, 영화와 얽힌 몇몇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제법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께서 일 때문에 늦게 귀가하셨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시며 TV에서 해주는 외화를 보셨는데, 저는 처음에는 가끔, 그리고 나중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어머니 곁에서 TV 외화를 끝까지 보곤 했죠.


당시는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께서 대통령을 하시던 시절로 “통행금지”라는 아주 좋은 제도가 있어서 “4대악” 따위는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던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조선놈들은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하셨고, 워낙 한분이 대통령을 오래하셔서 원래 대통령은 한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근무하는 곳 옆에 있는 여의도 공원은 5.16 광장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불렸죠.


12시까지는 아버지께서 들어오셨으니 대략 9시 뉴스 끝난 시간부터 자정 사이에 요일에 따라 요즘으로 말하면 미드와 외화를 적절히 섞어 방송에서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TV 제작여건이 좋지 않던 시절이므로 아마 외국에서 외화와 드라마를 수입해 오는 게 더 이익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송국은 KBS, MBC, TBC의 3개사였는데 이중 KBS는 국영 방송으로 좀 재미가 없었고, 각하 사망 후 흩어진 국민의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여 선진국가로 가기 위한 용단이었던 언론 통폐합에 의해 KBS2로 바뀐 TBC가 가장 재미있는 외화들과 미국 드라마들을 해주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삼성이 최고죠. 지금은 전설이 된 <육백만불의 사나이>, <전투>, <보난자> 같은 드라마들이 TBC에서 방송 되었죠. 


외화의 경우도 주말은 물론이고 주중에도 하루 이틀은 영화를 해줬습니다. 흑백으로 TV가 나오던 시절이니 칼라 영화 아닌 영화들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어서 신작(이라지만 몇 년이상 지난 영화들)은 물론 고전들도 많이 방송해줬습니다. 새로 외화를 한편 들여와서 자체 검열해서 자를 것 잘라내고 더빙하고 하는 것도 일이었을테니, 자주 재방송 해줬고, 어떤 영화들, 예를 들어 <쿠오바디스>, <십계> 같은 영화는 한해 걸러 크리스마스 때 해줬던 것 같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존 웨인, 그레고리 팩, 리처드 버튼, 헨리 폰다, 비비안 리, 그레타 가르보, 에바 가드너, 잉그리드 버그만, 알랭 드롱, 장 뽈 벨몽도, 까뜨린 드느브,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같은 배우들이 친숙했고, 그 시절 영화의 클리쉐들에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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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렇게 외화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은 “더빙” 덕분이었습니다. 자막으로 우리말을 보여주는 영화는 극장 아니면 없었고 TV는 맛깔나는 우리 성우들의 더빙으로 보여주었기에 글을 모르거나 서툴러도 영화를 이해하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TV에서 영화를 더빙으로 보여주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며, 제작비가 증가되기는 하겠지만 유지되어야 할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문화의 권력 차원에서도 이 점은 중요한데 아무래도 자막으로 보면 더빙으로 보는 것에 비해 이해가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며, 특히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원어의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자막만으로는 참맛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더빙은 뛰어난 성우들이 이 뉘앙스까지 표현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사회적 약자”에게는 유리한 방식이라는 겁니다. 최응찬이 아니었다면 콜롬보의 어눌하면서도 범인을 옥죄는 맛을, 양지운이 아니었다면 배테랑 선더스 중사의 매력을, (근래에 들어서라면) 이규화와 서혜정이 아니면 <X-파일>의 두 콤비가 주고 받는 애증의 뉘앙스를 느끼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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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TV영화의 스펙트럼은 찰리 채플린, 로렐과 하디의 무성영화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까지 50~60년을 커버하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50년 정도의 기간은 EBS에서 커버해주고는 있지만 무성-흑백-칼라-시네마스코프에 이르는 모든 기술의 발전을 동시 다발적으로 커버해주던 60/70년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이게 왜 문제인가 하면 요즘의 영화들만 보는 경우는 영화의 “문법”, “클리쉐” 등에 무지한 상태로 그냥 “플롯”에만 집중하거나 “비주얼”에만 집중해서 보고, 그런 영화보기는 결국 “킬링 타임”의 수준을 넘기 힘들기 때문이죠. 스마트폰의 화면을 통한 영화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2.35:1 영화를 틀어주면서 앞사람 뒤통수 안보이게 화면을 약간 끌어 올린다는 명목으로 마스킹도 안하는 (키프로스 소재 기업 계열) 초대형 멀티플렉스 체인까지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영화적 요소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스토리”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심증이 갑니다.


영화의 형식적 기법, 영화 읽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 덕분입니다. 고등학교 때 창간된 <스크린>을 창간호부터 제법 오랜기간 구독 했는데, (일본어판 <스크린>, <로드쇼>와 함께 당시 제 짝사랑이던 소피 마르소의 근황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죠) 당시 영화에 대한 글쓰기나 담론이 국내에는 정착 되어 있지 않아서인지 외국의 기사나 책을 번역해서 한꼭지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중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를 발췌하여 연재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덕분에 “미장센”, “쇼트”, “테이크”, “콜라쥬” 등의 영화 용어와 사용법, 그리고 의미 등을 처음 접할 수 있었고 “전설적인” 영화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영화의 이해>를 곁에 끼고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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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멀티플렉스에서 골라보는 재미가 있지만, 당시는 어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특정 극장에 가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죠. 예를 들어 70미리 영화를 보려면 대한극장을 가야했고, <스타워즈>(당시엔 <에피소드 IV> 같은 이상한 아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를 보기위해서는 피카디리 극장을 가야 했죠. 자랑스럽게도 저는 국내 개봉 첫날 <스타워즈>를 봤습니다. 아침부터 줄서서 가까스로 6시쯤 상영하는 표를 구했고, 당시는 좌석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맨 앞에서 스타 디스트로이어가 화면을 꽉 채우는 장면을, 그리고 데쓰스타가 파괴되는 장면을 봤습니다. 이건 그냥 영화를 “본” 것이 아니고 역사를 “목격”한 것으로 반란군이 역전의 계기를 잡는 그 역사적 순간에 함께 한 그런 체험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처음으로 극장에서 봤던 영화는 <공룡 100만년>이었던것 같습니다. 똘이가 나오는 애니메이션 말고 레이 해리하우젠이 특수효과를 맡은 바로 그 <공룡 100만년>입니다. 제 추측에 라크웰 웰치의 몸매를 보러 가신 부모님들에 딸려 갔다 보게된 것 같은데 어린시절에도 공룡의 진짜 같은 현실감에 더불어 여주인공(그녀가 라크웰 웰치인줄은 나중에 알았죠)의 미모가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것을 보면 해리하우젠과 웰치는 대단하기는 대단한 영화인입니다. 해리하우젠의 영화중 제 의지로 극장에서 본 첫 영화는 <신“드”밧드와 호랑이의 눈>이었는데 (사실은 제인 세이무어에 주목한 조숙한 아이었지만) 미노타우르스가 인상적이었죠. <이아손과 아르고호>도 극장에서 본 것 같은데 영화의 제작시기로 봐서는 그럴 수 없어서 이해가 안갑니다. 국내개봉을 몇년 늦게 한 것인지?    




한참 뒤의 일인데 (레이더스 말고) <인디아나 존스> 개봉은 서울극장에서 했는데 개봉날 인디아나 존스 로고가 세겨진 모자를 준다는 이야기에 아침부터 달려가 줄을 섰습니다. (당연히 모자를 안줘도 줄 섰겠죠) 이미 당시의 어둠의 경로인 VHS를 통해 몇 번 본 영화였지만 <레이더스>의 후속작 <인디아나 존스>를 극장에서 본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었죠. 정말 아쉬운 일은 제 바로 앞에서 모자의 선착순이 끝났다는 겁니다. 정말 제 바로 앞에서요...ㅠ.ㅠ 모자와 상관없이 그해 <인디아나 존스>를 7번 봤습니다. 문제는 그때 제가 고3이었다는 거죠. 물론 그해 개봉한 다른 영화들도 많이 봐서 아마 그해는 제가 영화관에 가장 많이 간 해로 기록될 겁니다. 만약 제가 영화, 음악, 프로야구에 빠져 고3을 보내지 않았다면 모의고사 예상대로 신촌이 아니라 신림동에서 대학생활을 했겠고 제 삶도 조금 따분해 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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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가서도 영화는 늘 제 관심권에 있었습니다. 전공자도 아니면서 없는 용돈을 탈탈 털어서 학교 커뮤니케이션 연구소에서 소수를 위해 개최된 <잉마르 베르히만 영화제>의 티켓을 구매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으니까요. 아마 20여명 정도 참여 했나봅니다. 매주 약간의 해설과 함께 베르히만의 대표작을 거의 다 감상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교내에 최루탄 터지고 전경들이 난입하는 시절에 그의 영화가 정식 수입될 일은 없었고, VHS에 복사한 영어 자막본을 프로젝터로 감상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산딸기>는 영어자막본도 없어서 일어자막본으로 봤는데, 미리 해설을 듣고 본 것이지만 아무튼 그냥 “본” 수준에 불과했죠. 상영한 영화는 <제7의 봉인>, <산딸기>, <처녀의 샘>, <페르소나>, <외침과 속삭임>, <가을 소나타>, <화니와 알렉산더>의 7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때 받은 해설집은 집 어딘가에 아직도 굴러 다니죠.


고등학교 때부터 들락거리던 프랑스 문화원은 대학 때도 다녔습니다. 지금처럼 그때도 헐리웃 영화 중심의 극장가였기에 프랑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데이트 때도 프랑스 문화원을 함께 가기도 했는데 프랑스어 대사에 영어자막 나오는 영화를 여자친구와 갈 수 있던 용기를 지금와서 생각하면 제 대학생활이 깊게 사귀는 사람이 없을만 했고 그래서 결국 곁에는 “여자”친구가 아닌 여자“친구”만 남았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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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예전 같이 영화를 많이 보거나 열심히 보거나 고민하며 보지 않습니다. 솔직히 영화관 자체를 거의 안갑니다.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영화 감상은 고독한 취미라는) 이제는 그러자니 와이프가 눈에 밟히고, 와이프와 가자니 애들이 걸리고... 결국 EBS의 영화와 DVD에 의존하죠. 그럼에도 큰 불만은 없는 게 제 여가 시간을 음악, 오페라, 책, 영화 등에 나눠 쓴다고 할 때, 영화에 배정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아무튼 그냥 생각나는 대로 영화에 대한 제 추억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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