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어떤 취미를 가지게 된 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분이 그런 취미를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클래식 음악 같이 별로 대중적이지 못한 취미 일 때는 더 그렇죠. 그래서 오늘은 제가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된 사연(?)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사실 제게 클래식 음악은 모태신앙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클래식을 좋아하셔서 나폴리 가곡 정도는 즐겨 부르셨고, 어머니도 전문적 성악 레슨을 받으시기도 했죠. 그렇다 보니 제가 태어나면서 부터 (아직도 가지고 있는) 라디오로 클래식 음악을 들어왔습니다. 우선은 그때 어느정도 음악에 대한 코드가 입력되었겠죠.훗날 본격적으로 음악을 듣다보니 제가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멜로디가 엄청나게 많다는데 저도 놀랬었습니다.
이런 모태 음악교육에도 불구하고 이미 초등학교 입학전에 성대가 제 마음대로 움직여주지않는다는 슬픈 사실을 깨닫고는 음악에 대한 취미는 접었습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는것을 가장 싫어할 정도니까요. 제 몸에 달린 악기도 제대로 못다루는데 다른 악기인들 오죽했겠습니까? 하는 악기마다 정말 못들어줄 지경이었죠.
아무튼 음악적 금치산자 생활을 해오다가 어느 순간 묘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대건 악기건 다루는 것은 잼병이고 음악에 취미도 없고 별로 노래도 듣지 않는데 이상하게 남이 음정이나 박자를 틀린 것은 잘 알아내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죠. 그래도 음악을 듣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청소년기에 저 같이 가요건 팝이건 안듣고 자란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죠. 그냥 중학교 2학년 약 6개월 동안 팝송을 들었던게 (그냥 올리비아 뉴튼-존이 예뻐서 들었던게 계기입니다) 클래식을 듣기 이전까지 제가 들었던 음악의 전부라 할 정도니까요. 그래서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하던 가수들의 노래는 좀 아는데 나머지는 전혀 모릅니다.^^
중학교때 같은 반에 클래식을 듣는 친구가 있어서 어느날 하이든의 전기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저는 그 친구를 외계인으로 생각했고, 그 친구는 저를 무식한 놈 정도로 생각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다 제가 클래식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취미지만 전공을 할까 생각할 정도로 제법 돈도 들여가며 피아노를 배우던 여동생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여동생은 피아노를 제법 쳤지만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정도?)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듣더라도 듀란듀란 같은 음악을 주로 들었죠. 저는 집에 피아노가 있고, 동생의 악보가 있어서 피아노를 독학을 할 수 있었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말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날 여동생이 어머니께 클래식 카세트테입을 이런저런 것 좀 사줘야 한다고 하더군요. 음악 시험 중에 듣기평가가 있는데, 자기는 선생님이 적어준 곡들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들어야 한다면서요. 그리고는 "명곡 감상해설" 같은 책도 필요하다고 했죠.
그때나 지금이나 군고구마 포장해온 전단지도 읽을 정도로 뭔가 읽는 것을 좋아하던 저는 여동생이 필요하다고 사달라고는 하고서는 한켠에 내던져 둔 "명곡 감상 해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산이 거기 있으니 가는 것처럼 책이 있으니 전혀 관심 없는 분야지만 읽기 시작했던거죠. 지금 생각하면 베토벤 교향곡은 몇년에 시작해서 몇년에 쓰여졌고, 1악장은 소나타형식으로 어떤 제시부 뒤에 어떻게 진행되고 등등이 책 내용의 전부인 정말 재미 없는 내용인데, 그때는 이상하게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각 곡별로 라이센스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반 목록도 있었기에 지휘자와 연주자들 이름도 좀 알게 되었죠.
그리고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시험 준비용으로 따로 하이라이트만 녹음해서 파는 카세트로 만족한 동생이 내던져둔 시험준비용으로 구입한 카세트 테입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었으니 들어나 볼까하는 생각이었죠. 지금 기억나는 것들은 예를들면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3번+8번(이때 8번을 하도 들어서 유명하지 않음에도 지금도 좋아하는 곡입니다), 앙세르메의 5번+에그몬트 서곡, 9번, 카라얀과 무터의 모짜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5번, 뵘이 프라이, 디스카우 등을 기용한 "피가로의 결혼" 같은 카세트들이었죠.
"딴딴딴...딴~!"하는 "운명"교향곡의 첫 부분이야 누구나 다아는 것이지만 처음 "진짜로"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커플링된 에그몬트 서곡까지) 다 듣고는 몇번을 반복했습니다. 몸안에서 무엇인가 끓어오르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더군요. 이게 진정한 예술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있는 카세트 테입들을 몇번이고 반복 청취를 했죠. 이게 내가 들어야 하는 음악이구나 싶었습니다. 아마 어릴적 부터 듣고, CF와 영화 음악등을 통해 들었던 그 멜로디들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들으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의외로 제가 클래식 음악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해 하면서 말이죠.
부모님께서는 그러는 제가 신기했는지 자랑스러우셨는지 몰라도 몇달 뒤 인켈의 CS9000 시리즈 오디오를 장만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대학생들이 해변에서 어께에 메고나 다닐 법한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벗어나 LP를 들을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그 기념으로 구입했던 첫 LP는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고 싶었지만 자금 여력이 없어 베토벤 서곡집을 구입했습니다.^^
이후 어머님의 전폭적 지지(고등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에 힘입어 음반들을 마구마구 구입하게 되었죠. 물론 성음의 라이센스 LP가 대부분이었고 나중에 지구레코드나 서울음반, 계몽 EMI의 음반들도 들을 수 있었죠. 요즘 음악듣는 분들은 RCA나 Colombia, EMI 레이블의 음반이 귀했다는게 믿어지실지...^^
이렇게 대학때까지 LP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물론 대학 후반때는 CD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저는 라이센스 중심일지라도 LP를 고집했는데, 우선 자켓의 큰 그림이 마음에 들고, 들려오는 음악도 제 귀에는 더 따뜻하고 정감 있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시절은 제 음악 생활의 질풍노도와 같은 시절이어서 명반 사냥에 목숨걸고 (솔직히 발매되는 음반도 별로 많지는 않았죠) 성음에 편지로 이런 음반은 왜 안내냐고 항의하기도 했죠. 오페라의 경우는 주로 발췌반이었고 정말 드믈게 전곡반이 나와서 오페라 전곡듣기의 맛을 처음 알려주기도 했었구요. 음반도 꾸준히 구입했기에 성음에서 주는 골드 디스크와 실버 디스크를 받기도 했고 연주자들의 브로마이드도 처치 곤란할 정도로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대학 때부터 그래모폰, 클래식 CD 등의 영국 월간지, 그리고 IRC, IPQ 등의 계간지를 정기구독했습니다. 구독하는 음악관련 정간물이 6~7종에 이를 정도로 많이 읽고 많이 들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군대에 가게되어 잠시 음악 생활은 접었습니다. 돌아와보니 세상이 바뀌었더군요. LP는 거의 생산이 중단되는 분위기고, LP시절에 구경하기도 힘들던 레이블의 음반들이 나와 있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옛 명연주들을 들으려면 CD를 듣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결국 낡은 옛 연주들을 듣기위해 당시 최첨단 기술인 CD를 시작했죠.
처음 시작은 소니의 휴대용 CDP로 했습니다. 주로 제 방에서 앞에 언급한 소니의 대형 카세트(다행히 AUX입력과 Phono입력까지 받더군요)에 연결해서 들었는데 한쪽 스피커의 접촉 불량으로 가끔 한대씩 때려주어야 했지만 당시 듣기에는 지금 제 시스템의 소리보다 더 뜨겁고 아름답게만 들렸죠. 그런 시스템으로 복수전공 하던 시기, 놀고 먹던 시기, 직장인의 초반기를 보냅니다. 결혼할 때까지 휴대용 CDP가 소니에서 파나소닉으로 바뀐 것을 빼고는 그냥 휴대용 CDP + 대형 카세트의 조합으로 음악을 들었죠. 회사에서 만나 취미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게된 B차장은 오디오가 메인 취미중 하나였는데 저를 외계인 취급했습니다. 음악을 듣는다면서 어찌 그런 시스템을 운영하냐는 것이었죠.
아무튼 B차장 덕에 이런 저런 오디오 정보를 접하고 구경 다니면서 소리들을 들어 보았습니다만, 만나는 사람들 상당수가 제가 보기에는 음악에는 별로 관심 없고 소리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구간 반복재생 하고 있을 시간에 음악이나 더 듣지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상대했죠.
결혼전에는 결혼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오디오는 좀 좋은 것으로 혼수를 해오라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와이프를 만나고 결혼하면서 오디오를 구입하자고 했는데, 와이프는 함께 가자면서 오디오는 백화점에서 사자고 하더군요. 오디오를 백화점에서? 그럼 어디서사? ... 뭐 이런 대화가 오가고는 백화점에서 가장 이쁘게 빛나고 면적도 덜 차지하는JVC의 올인원 플레이어를 장만하게 되었죠. 꿈은 무너졌습니다...ㅠ.ㅠ
물론 결혼 몇년동안 조그마한 통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인내한 덕분에 이사도 하게 되고, 오디오도 커졌고, 다시 이사하고 조금 더 커지고 했습니다. 결국 지금의 시스템이 되었죠. 한때 재미 삼아 선재에 신경을 쓴다거나 이런 저런 트위킹을 했지만 늘 제 관심은 소프트와 그것에서 재생되는 음악이었습니다.
한때는 Gramophone을 비롯한 음악지를 대여섯개를 구독할 정도였지만, 어느 순간 부터인가는 제 감과 제 생각을 중심으로 음반도 구입하게 되더군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듣는 장르도 바뀌고, 작곡가나 곡도 새롭게 평가를 하게되고요. DVD 덕택에 오페라를 거실에 앉아 제대로 감상할 수도 있죠. 사실 제가 DVD 플레이어를 구입한 동기가 영화가 아닌 오페라 때문이었으니까요.
아무튼 이제는 고집도 많이 없어졌고, 명반에 대한 기준도 달라졌으며, 일반인이 들으면 어려워 하는 음악용어들을 써가면서 이야기 하거나, 음악을 분석적으로 듣는 것도 취향 밖이 되었습니다.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들과 느낌들의 미묘한 변화에 더 신경을 쓰죠. 그리고 음악에 대해 이런 저런 평을 해대는 사람보다는 눈물을 흘리거나 미소를 지을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게 훨씬 즐겁습니다.
이상 제 음악 이야기였습니다.^^
MF[ME]
*사진은 제 LP시절의 우상 카라얀입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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