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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영화]오슨 웰즈 - <맥베스> (Orson Welles - Macbeth)

by 만술[ME] 2013. 8. 28.

한때 오슨 웰즈는 <시민케인>만으로도 제 우상이었습니다. 잉마르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을 일본어 자막판 VHS로 봐야 했던 열악했던 80년대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제 주위에서는 오슨 웰즈의 영화들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전설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요즘 너무 영화도 안보고 (영화관은 아예 안갑니다) DVD도 한주에 한두편씩 미드 <식스핏 언더>를 보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안보면서 오로지 EBS의 금/토/일 밤 영화만 보는지라 이러다가는 안그래도 없는 영화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서 기초부터 튼실히 하자는 차원에서 옛날 영화를 한달에 한두편이라도 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와이프도 같이 보면 좋은데 와이프가 EBS에서 영어 더빙 버전으로 해줬던 <대괴수 용가리>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수준이라 해도 오슨 웰즈의 <맥베스>는 “제가 영화를 봐봐서 좀 아는데” 부담될 것 같아 혼자 몰래 봤습니다.




<맥베스>는 오슨 웰즈가 감독한 첫 셰익스피어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 셰익스피어 영화가 아니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당시 셰익스피어극이라 할 때 연상되는 로렌스 올리비에식 무대배경과 의상, 그리고 주인공들의 캐릭터, 그리고 드라마가 이 영화에서는 거의 전위적이랄 만큼 해체되고 뒤틀렸습니다.


첫장면인 세명의 마녀(미녀 아닙니다)가 맥베스의 인형을 만들어 주술을 거는 장면부터 영화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정서와 단절하고 (무려 1948년 작이 이리도 현대적이라니!)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며, 무려 B급 영화의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원작의 스토리 변형 없이 전혀 다른 오슨 웰즈의 <맥베스>를 만들어 냈습니다.



1. 시간도 공간도 없는 어둠의 세계


영화는 시간도, 공간도 관객에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과 궁궐조차 원시인들이나 살았을 혈거 집단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죠. 옷도 갑옷도 그냥 옷이고 갑옷일 뿐 어떠한 장식도 시대를 반영하지도 않습니다. 요즘 예산 때문에 시공간을 재창조해낼 수 밖에 없는 유럽의 오페라를 연상 시키는 이런 시공간의 모호함 또는 불확정성은 맥베스의 야망과 음모를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 버립니다. 


맥베스의 야망과 그 고뇌는 왕이라는 신에 맞먹는 절대 권력에 대한 지향, 그리고 바로 그 신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려는 욕망과 정말 신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사이의 갈등이어야 하는데 그 절대권력은 영화에서 시대적 맥락이 제거되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현대의 왕은 절대권력이 아니죠) 맥베스는 단순한 운명의 꼭두각시로 전락합니다. 그는 아무 명분도 고뇌도 없이 마치 13일의 금요일의 제인슨처럼 피를 부르고 다닙니다. 그냥 그게 맥베스의 운명인 거죠.



2. 갈등도 드라마도 없다


영화내내 맥베스는 고뇌할 수 조차 없습니다. 그는 선택 할 수 없죠. 그러다 보니 그에게는 내부의 갈등도 그로 인한 드라마도 없습니다. 그냥 운명이 그를 최후까지 몰고 갈 뿐입니다. 운명의 꼭두각시는 맥베스만이 아닙니다. 사실 등장 인물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지 못하고 (맥더프 마저도) 그냥 운명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치 예언인 듯 보였던 모든 이야기들, 모든 상징들은 그 무의미함을 들어내고 운명 앞에선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결국 현대인의 고뇌를 아프게 보여줍니다. 모든 것은 그냥 무(無)일뿐이죠.



3. 뛰어난 영화적 기법


맥베스가 던컨왕을 살해하는 장면은 매우 긴 롱테이크입니다. 이 장면을 롱케이크로 처리하며 왕의 침실을 멀리 딥포커스로 보여주면서 맥베스부인을 카메라 앞쪽으로 배치하여 독백을 들려줌으로써 관객들은 피를 보지 않고도 국왕 살해에 대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마치 그 장면에 참여하고 있는 느낌을 갖습니다. 맥베스가 제대로 왕을 살해 했을까 하는 맥베스 부인의 긴장과 기다림이 관객의 긴장감과 초초함으로 전이 된다고나 할까요? 


촬영 기법상으로 복잡하고 치밀한 이 살해장면은 아예 살해 장면 자체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내용상으로는 매우 단순합니다. 덕분에 왕을 살해하는 것이 곧 하늘을 무너뜨리는 것 아니냐는 불안을 내포할 수 있는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그 사건이 가진 “역사성”을 말소해 버립니다. 그냥 관객은 운명이 이루어 질 것이냐에 집중할 수 밖에 없고 그것에 대한 긴장감과 초조함만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영화적 기법의 우수함은 맥베스 부인의 죽음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광란에 빠진 맥베스 부인이 독백하는 장면에서 의사와 시녀가 딥포커스로 함께 보여주면서 그녀의 죽음의 과정을 마치 뉴스처럼 중계하고 해설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맥베스 부인의 독백을 감정이입해서 전달 받는게 아니라 그냥 사건의 기술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고뇌와 의지를 제거한 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결국 운명앞에 인간의 고뇌와 죄의식 따위는 의미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4. 저주받은 걸작


영화를 예술로서 “고급”스럽게 포장할 수 있는 도구로 각광 받던 셰익스피어극을 오슨 웰즈는 철저히 해체해 버림으로써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혹평을 받습니다. 제작사로부터 강제적인 수정도 당하게 되죠. 그리고 다음 작품인 <오델로>를 제작하기 위한 비용이 마련되지 않아 이곳저곳 구걸을 하다시피 했고, 결국은 자비를 상당부분 들여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의 <맥베스>는 매우 현대적이며 셰익스피어극이 지닌 상징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상징성을 얻었고, 또한 기법상으로도 매우 훌륭한 영화로 평가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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