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시행되는 도서정가제 개정안 덕분에 어제 교보, 알라딘, 예스24 등의 주요 인터넷 서점들의 서버가 다운되는 등 대란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 많이 질러두셨나요?
이번 도서정가제 대란과 관련해서 저는 집에 쌓아놓은 책이 제법 되고, 일부 책은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으며, 폭탄 세일책들 중에 새로 구입하고 픈 책도 별로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몇권의 책을 추천만 하고 룰루랄라하면서 살짝 폭탄의 피격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알라딘에서 독점으로 진행하는 아카넷의 일부도서 반값세일에 직격을 맞았습니다. 아카넷의 책중에 가장 탐을 내고 있던 것들이 칸트의 비판3종 세트인데 이번 할인에 반값으로 나온 것입니다.
전부터 비판 3종 세트를 읽고는 싶었는데, 구입을 망설였던 이유가 몇가지 있었습니다. 이미 예전에 읽었고, 철학이 삶에 있어 교양에 불과한 현시점에 다시 읽기에는 그 책들이 시간과 노력을 너무 투자해야 하는 저작들이며, 사고싶은 아카넷 판본은 가격이 비쌌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대출기간인 2주로 소화하기에는 한권 한권이 무리인 내용이며 (그냥 2주 정도에 후딱 읽어 '버릴' 바에는 지금 머리에 남아있는 칸트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책은 자기책에 자기만의 주석을 달아가면서 봐야 제 맛인 책이라 도서관에서 대출 받은 책으로 소화할 내용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결국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딱히 써먹을 일도 없지만 50이 되기전에 칸트의 비판 3종 세트를 다시금 꼼꼼히 씹어 되새김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냐는 생각에 이게 다 예전에 신세진 칸트에 보은하라는 하늘의 뜻이다 하면서 주문했습니다. 문제는 현재 문학쪽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라틴 원전들을 읽고 있고, 인문학쪽은 그린비 출판사의 프리즘 총서 완주에 도전 중인지라 칸트를 파고들 시점은 한참 뒤가 되겠습니다만, 일단 질러 놓았으니 조만간 손대지 않을까 생각은 됩니다.
아무튼 저는 이번 대란에서 <비판 3종>만 장만했기에 그나마 선방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도서정가제로 소형서점, 동네서점이 부흥할까?
제가 도서시장에 대해 전문가도 아닌데 어찌 알겠습니까만, 몇가지 사실은 명확한 것 같습니다. 첫째로 당분간 서점들은 손빨고 지내야 할 것입니다. 책을 소비하는 계층 중에 이번 대란에 크건 작건 책을 구입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구입한 대다수는 한두권만 주문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출의 증가로 자연스럽게 긴축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분간 새로 책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점들과 출판사는 이번 대란에 포함되지 않은 품목들 중심으로 프로모션을 하거나 빠른 시간내에 정가를 다시 책정해서 재정가 프로모션을 진행할 수 밖에 없는데, 이미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는 소비자들이 다시 책에 대해 입맛을 다시게 하는데는 상당기간 역부족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기간 동안 동네서점들이 월간지 팔면서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둘째로 이미 죽은 동네서점을 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동네서점의 장점은 가깝다는 것 뿐인데, 서점이 단순히 책을 구입하는 곳이 아닌 <문화공간>이 된지 오래기 때문에 그 문화공간으로서의 장점이 없는 동네서점이 대형서점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으며, 동네서점을 방문하는 입장에서는 원하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늘 서점에 구비되어 있을만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재고확보에 대한 리스크를 감내해야합니다. 누구나 사는 책이 아니라면 온라인 또는 대형서점과 경쟁이 안됩니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책을 사는 이유는 가격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실시간으로 내가 사고싶은 책이 있는지, 있다면 가격은 얼마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는 것이죠. 한편 대형서점은 문화적 공간의 기능과 함께 어지간한 책이라면 재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요.
결국 소형 서점 또는 동네서점은 전문화 서점의 길을 가거나 커뮤니티 친화성으로 승부해야 하는데, 종교, 미술, 음악 따위의 전문 서점들은 이미 있을만한 곳들은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독서인구의 생태를 보았을 때 ㅡ 교재, 수험서, 자기계발서 등의 실용서 비중이 너무 높습니다 ㅡ 철학전문서점, 역사전문서점, 장르소설 전문서점 등이 정착될 것 같지 않으며, 설사 정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서울시의 독서인구가 과연 SF전문서점 몇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하나도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 것 같군요. 지방은 더하겠죠. 각 시마다 이런 전문서점 몇개 들어간다고 도서정가제로 인해 소형 서점이 활성화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커뮤니티 친화형 서점도 암울합니다. 예를들어 서점에서 제게 문자나 전화로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돈키호테가 새로 나왔는데, 기존에 갖고 계신 민용태 번역도 좋지만 이번 번역도 대충 살펴보니 맛깔나고 더구나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가 100점이나 수록되어 있어요. 한정판 삽화집도 있는데 이것까지 해서 챙겨놓겠습니다. 민용태 번역본이 초판본 갖고 계시니 이제 한번 다시 읽으실 때도 된거죠. 퇴근 하실 때 들르세요. 새로 로스팅한 탄자니아 들어왔는데 커피나 한잔 하고 가세요> 같은 추천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고객-서점의 관계가 되어야 커뮤니티 밀착형 서점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네 문화는 옆집 아저씨가 연쇄살인마인 것도 모르는 문화잖아요? 커뮤니티 밀착형 서점이 될리가 없죠.
3. 치킨집하다 망하는 것보다 뽀대나게 망해봅시다
아마 소규모 서점을 육성하려는 이유는 다들 회사 짤리고는 할 것 없어 치킨집 하다 망하고, 대학나와서는 취직이 안되 치킨집 알바 하고 있는 이 암울한 상황을 좀 타계하고자 하는 배려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서정가제도 개편되었으니 이제 포화된 치킨집, 커피전문점 말고 소형 서점을 합시다 ㅡ 뭐 이런건지도 모르죠. 망해도 치킨집 하다 망한 것 보다 어디가서 문화사업하다 망했다고, 자기는 대한민국의 문화를 위해 살신성인한 거라고 자랑할 수 있고, 같은 알바라면 치킨집 서빙 보다는 책방 알바가 뭔가 대졸자에 어울리지 않냐는 그런 배려?
4. 대기업에 대한 새로운 프랜차이즈 사업 기회 제공
설사 동네 서점이란 것이 장사가 되는 아이템이라 할 때 (설마?), 사업에 가장 유리한 게 누구일까요? 동네 서점은 면적 때문에 대형 서점처럼 대다수의 책을 진열하거나, 잘나가는 책이라고 무작정 많이 확보해 놓거나 할 수 없습니다. 찾을 만한 책을 팔릴만한 부수만큼 갖춰 놓는 것이 경영의 중요한 부분이죠. 고객이 동네서점에 갔다가 자기가 원하는 책이 없다면, 다시 그 서점을 찾을 확률은 급격히 줄어듭니다.
그런데 엄청난 데이타를 갖춘 업체들이 있습니다. 그 동네서점 반경 1Km 또는 10Km 범위내의 고객들이 어느정도 책을 사보는지, 1인당 월간 구매액은 얼마인지, 어떤 장르의 책을 주로 보는지, 신간의 비율이 높은지 아니면 세일품목에 민감한지 등 필요한 모든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업체죠. 바로 온라인 서점들입니다.
네, 바로 답이 나옵니다. 그 축적된 데이타를 무기로 (오프라인 대형 서점을 운영중인 교보는 자칫하면 제살 깍아먹기가 되기에 이런일 하기는 힘들겠지만) <책방24>나 <알라딘 스토어>같은 프랜차이즈를 만들어서 가맹점 모집하고 수수료 챙겨 먹으며 자영업자 등쳐먹는 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찾으시는 책이 동네 책방에 재고가 없다구요? <책방24>에서 지금 결재하시면 제휴 온라인 서점인 <예스24>에서 총알배송으로 오전중에 결재시는 당일배송, 오후라면 익일 배송 해드립니다~! 물론 서점 오픈을 위한 부동산 물색, 입지조사, 인테리어 등의 제반 비용과 관리를 위한 연간 회비는 별도입니다.^^ <알리딘 스토어>에서 알라딘 제휴 카드로 결재시 추가적립금 같은 깨알 같은 것도 잊지 말자구요.
5. 동네 서점 vs 대형 온라인 서점의 핵심
온라인 서점들은 출판사에서 직접 납품을 받고 동네서점은 당연하지만 중간상인 총판에서 납품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기본적인 총판의 운영비용과 영업이익만큼의 차이가 있는데다 대형서점의 판매력이 오프라인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납품가에 있어서 동네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경쟁력은 상대가 안됩니다. 온라인 서점들이 더 할인을 많이 해서 팔 수 있는 이유죠. 더구나 서점들은 현실적으로 자기들이 책을 사다가 파는 구조가 아니고 책의 판매를 대행하는 구조입니다. 즉, 안팔린 책에 대한 재고부담도 없고, 책이 안팔리면 100% 출판사의 재고부담으로 돌아갑니다. 온라인 서점은 프로모션할 책을 잘못 고른 경우, 다른 책을 띄웠다면 더 팔았을지 모를 기회비용만 날리는 거죠. 판매가에 대한 할인율을 고정한다고 해서 출판사의 납품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서점의 수익이 늘어날 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
출판사가 원가 이하로 밀어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할인폭이 크던 아니건 출판사 입장에서는 판매량이 더 중요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판매량에 있어서는 감소할 수 밖에 없는 이번 개정안이 출판사 입장에서도 좋을 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같은 <레미제라블>을 한 출판사는 제대로 된 번역가에게 맡겨 전문적인 편잡자가 출간한 반면, 한쪽에서는 아마츄어들이 모여 번역한 것을 대충 오탈자만 교정해서 출간해서 반값으로 밀어버려 전자의 시장을 잠식하는 행위를 잠시 막아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출판사가 <할인률>로 경쟁을 하지 않고, 정가를 그냥 내려서 <가격>으로 경쟁을 하면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일반적인 소비자의 경우 <레미제라블>이면 다 같은 <레미제라블>이 아니겠냐, 우리말로 옮겼으면 그게 번역 아니냐, 그냥 표지 이쁘고 싸고, 더구나 읽을 것은 아니지만 영문 대역본도 하나 끼워주면 금상첨화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출판하는 회사를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레미제라블>에 불어본도 아니고 영어본을?)
간단합니다. 출판사 살리고, 동네서점도 (아직 살릴 서점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살리려면 판매가를 가지고 할인을 못하게 할 일이 아니고 몇몇 대형서점 족치거나 법제화해서 납품가격을 단일화 하게 하면 됩니다. (또는 격차의 한도를 최소화하면 되죠) 그런데 아마 대형서점도 몇대 맞으면 쓰러질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니 잘못하면 아예 그나마 책살 곳 마져 없어지겠죠.
6. 그냥 우린 망했어요
솔직히 그냥 우리나라 독서문화는 망한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빼고는 전국민이 책을 안읽는데 어떤 대책이 출판사를, 대형서점을, 동네 서점을 살릴 수 있습니까? (이런 망한 시장은 이번 정가제 개정 같은 '직접적인 대책'으로 대응하면 더 망하는 것을 가속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장에 영향을 주는 대책을 추진 할 것이 아니라 더 망하지 않게 ㅡ 그렇지만 시장이 흔들리지는 않게 ㅡ 조절하면서, 그 시장을 둘러싸고 있는 큰 요인 ㅡ 국민들이 책을 안읽는 환경 ㅡ 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답이라 생각합니다.)
방법은 하나 있는데, 그냥 TV(종편 포함) 드라마에서 편당 한권의 책을 무조건 무료 PPL(그것도 대사에 책의 내용과 제목을 소개)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아들, 이번에 제프리 디버의 <킬룸>이 새로 나왔기에 읽어 봤더니 긴장감은 물론이고 디버 소설 답게 끝의 반전이 역시 죽이더라!") 영화는 3권이상 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드라마에서 원빈이 들고 나왔던 책(원빈이 "너 같은 여자를 사귀려면 <논리철학논고>는 읽어야지" 같은 대사를 해주면 더 좋습니다)이라고 악세서리라도 들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어 좀 팔리지 않을까요?
더 쓰자니 안그래도 글들이 길어서 인기 없는 제 블로그가 더 인기 없어질 것 같으니, 독서문화 진흥에 대한 제 의견은 다른 포스팅을 참고하시면 될 듯합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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