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의 음악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도 듣거나 보지 않았고,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망소식을 접하며 심적으로 뭔가를 써야 할 것 같은 감정이 들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오래된 제 기억에 의존한 것으로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대학가요제 - 그를 처음 본 건 대학가요제를 통해서입니다. <무한궤도>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그룹으로 나와서 <그대에게>를 불러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제 느낌은 <①만화 주제가 같은데 엄청 끌린다 ②노래하는 친구는 노래를 좀 못하는 구나 ③우리학교라는데 난 못봤는데?> 정도였습니다. 이후 이상하게 <그대에게>는 자주 듣게 되었고, 나중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아웃사이더>가 나오기 전까지 단골로 부르는 노래가 되기도 했습니다.
학교의 소문 - <철학과에 썬글래스 쓰고 등교하고 수업도 잘 안들어 오는 이상한 애가 있었는데, 어느날 TV보니 그애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타더라> 같은 소문이 돌았습니다. 수업에 안들어온 것이 맞는지, 아니면 저와 철학적 취향이 다른 것인지, 제가 고학년용 수업을 중점으로 들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전 철학을 부전공으로 해서 제법 많은 철학과목을 들었지만, 그를 수업시간에 본 적은 없었습니다.
친구와의 인연 - 교등학교 친구녀석이 한해 재수를 해서 후배로 입학했습니다. 농담반 섞어 말하면 고등학교때 제가 <의식화> 시킨 녀석인데, 청출어람이라고 들어오자 마자 과격해지더니 당시 주류였던 NL-PDR 따위는 무시하고 좀 더 과격했던 소수파인 CA(제헌의회)에 가입했습니다. 저야 남산 몇번 다녀온 아이처럼 얌전했던 시기이고 과가 달랐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는데, 어느날 도서관 옆 광장(이라고 부르지만 전혀 광장은 아닌 소공원 정도의 규모였던 곳)에서 우연히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갑자기 누군가 와서 그 친구 옆에 앉더군요. 그런데 어딘지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니 신해철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친구의 친구였죠. 이때가 학교생활 중에 그를 만난 유일한 사례였습니다. 물론 저는 당시 분석철학에 빠져있었고, 그는 철학에는 관심이 없는 철학도였으니 (나중에 그가 결성한 그룹이름을 보고 철학을 공부하기는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 나눌 이야기도 별로 없었습니다.
재즈카페 - 졸업후 입대했는데, 내무반에 비치된 LP중에 그의 솔로 음반인 <Myself>도 있었습니다. 내무반에서의 아침 기상 음악은 일직하사의 음악적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는데, 제가 일직을 서는 날 아침이면 <봄여름가을겨울>의 라이브 앨범, 손무현의 솔로 데뷔앨범과 함께 <Myslelf>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재즈카페>로 유명한 이 음반은 그야말로 신해철 혼자 북치고 장구친 음반인데, 들으면서 대중음악에 문외한인 제가 들어도 그가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워로즈 2 (Warlords 2) - 구닥다리 맥을 거의 10년가까이 사용했기 때문이겠지만 제가 가장 오랜기간 즐긴 게임이 맥용 <워로즈 2>였고, 저는 게임을 위해 새로운 유닛을 디자인하고 그걸 프로그램 수정을 통해 삽입하기도 하는 등 <워로즈 2>에 엄청나게 빠져있었습니다. 어느날 신해철의 차기 앨범이 늦어졌던 이유가 바로 <워로즈 2>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기했습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게임에 둘다 빠져있다니 말이죠.
대통령선거 방송 -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날 대통령 선거방송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어차피 누굴 찍어야 할지는 결정되어 있었기에 그가 뭐하란다고 찍거나 안찍거나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가 노래하는 모습이 아닌 연설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도 한명의 사유하고 행동하는 국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여전히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은 기쁜 일이었습니다.
마왕 - 그에게 늘 따라붙는 <마왕>이라는 호칭은 제게는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고, 그가 출연하는 방송을 지나가다 걸리는 것 이외에는 찾아보지도 않았고 (더구나 TV자체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초기를 제외하고는 그의 음악을 듣지도 않았기에 제 기억속의 신해철과 <마왕>이라는 이미지가 그리 어울린다고 생각지는 않았죠. 그냥 그가 마왕이라는 이름과 어울릴 부분은 그의 약간 독특한 얼굴 피부 ㅡ 전혀 모욕을 담지 않은 의미로 좀 두터워 보여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은 듯한 ㅡ 이외에 없었거든요. 그냥 제게는 같이 늙어가는 몇다리 걸쳐 아는, 저와 생각이 같은 구석도 제법 있는 친구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친구를 마왕이라 생각하기는 힘들죠.^^
죽음 - 누구의 죽음이든 마음아픈 일입니다. 그리고 그게 젊은 시절 부터 몇십년 동안 서로 만나지는 않아도 소식은 이렇게 저렇게 듣고 살아온 것 같이 느껴지는 사람일 경우라면 더욱 말이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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