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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TV]사조영웅전 2017 이야기

by 만술[ME] 2024. 5. 7.

위에서부터 아래로 - 구양극 / 매초풍 / 단지흥, 가진악, 구처기 / 왕중양, 황약사, 구양봉, 홍칠공, 주백통 / 곽정, 황용, 목염자, 양강

 

제가 김용의 <사조영웅전>을 처음 접한 것은 고려원에서 출판한 <영웅문>을 통해서였습니다. 어려서부터 활자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지라 글씨가 쓰인 것이라면 잡지나 신문지를 재활용한 군고구마 포장지에서부터 부모님께 배송되던 백화점의 회원 소식지까지 모두 읽어 내던 시절에 아버지께 출판사에서 책 한 권이 배송되었습니다. 아마 출판사에서는 <영웅문> 1권을 읽으면 나머지는 돈 주고 사보겠거니 하는 마음에서 보낸 미끼상품이었을 텐데, 출판사에는 안쓰럽게도 아버지는 책에 큰 관심이 없는 분이셨고,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으셨지만, 주로 전공이셨던 프랑스문학, 그중에서도 현대문학에만 관심을 기울이시던 분이신지라 요상스러운 중국 아저씨 얼굴이 그려진, 제목도 유치하게 <영웅문 : 몽고의 별> 같은 책을 보실 생각은 전혀 없으셨죠. 결국 그 책은 신문에 딸려온 전단지도 글이라면 무엇이던 읽어대던 제게 떨어졌습니다.


그때까지 무협관련 이야기는 책으로는 접한 적도 없고, 영화로도 이소룡이나 성룡의 몇몇 현대배경 영화만 보았던 저로서는 <영웅문>은 그야말로 (이소룡이나 성룡 같은 현대적 무술과는 차원이 다른) 신세계를 알려준 책이었습니다. 역자 해설에 의하면 <홍루몽>에 <홍학>이 있다면, 김용에는 <김학>이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싸구려 무협지를 읽는다는 죄책감도 덜 수 있어 금상첨화였습니다. [고려원의 <영웅문>을 해적판이라 칭하는 분들도 있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저작권 국제협약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자유롭게(?) 외서를 번역 출판하거나, 아예 원서를 통째로 복사해서 출판사 이름 박아 출판하는 것도 합법적으로 가능했습니다. 더구나 <영웅문>은 작가인 김용이 직접 추천사를 고려원에 보내주기도 했던, 나름 저자의 동의를 구한 (돈은 안 주었지만) 판본입니다.]

아무튼 당시(86년) 대학 1학년이었고, 학력고사 한번 망쳤다고 내가 여기를 다녀야하나 하는 건방진 마음에  딱히 학교와 선배에 정이 붙지 않아 책 읽는 것 말고는 하는 일 없던 시절이라 미끼상품 1권으로 시작한 <영웅문> 읽기는, 국내 최고 수준의 개가식 도서관을 자랑하던 학교 도서관 덕분에 돈 안 들이고 <사조영웅전> 전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신조협려>는 <사조영웅전>에서 원수 같던 양강의 아들이 주인공인지라 별로여서 대충 읽었고 (또는 중간에 읽다 말은 것도 같고), <의천도룡기>는 아예 시기도 한참 뒤인지라 생소한 마음이 들어 시작하고 금방 그만두었습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1학년 겨울방학부터는 국내 유수대학 중 거의 유일하던 개가식 도서관의 매력에 빠져 학교를 좋아하게 되었고,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을 부전공, 나중에는 물리학을 복수 전공할 수 있는 개방적인 학제 시스템에 만족하며 지냈고, 지금도 제 청년기 캐릭터를 형성해 준 데 대해 고마움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웅문> 또는  <사조삼부곡>은 수십년전의 추억의 이야기였을 뿐인데, 이웃인 베리알님의 블로그에서 <의천도룡기 1994>관련 글을 읽고, 혹시나하는 마음에 넷플릭스를 검색하니 <사조영웅전 2017>과 <의천도룡기 2019>가 있어 추억을 되세기는 의미에서 <사조영웅전 2017>을 보았습니다.

 

<사조영웅전>을 읽은지 오래되어 모든 내용이 상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드라마 2017 버전은 큰 틀에서 원작의 줄거리를 잘 지킨 느낌입니다. 몇몇 부분이 이상해서 검색해 보면 원작자인 김용이 새롭게 수정한 부분인듯하더군요. 예를 들어 저는 구양공자로만 알고 있던 인물이 구양극이라는 버젓한 이름이 있고, 거의 그 이름으로만 불리더군요. 그런데 이것이 원작자 김용이 수정한 판본이라네요. 드라마도 50편이 넘어 짧은 길이는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 진행이 매끄럽고, (물론 중원에서 몽골, 사마르칸트까지 왔다 갔다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드라마 진행을 위해 이해하면) 딱히 주인공 보정 등을 위해 무리한 내용도 없이 술술 풀어낸 느낌입니다.

워낙 등장인물이 많고, 또 나름의 역할들을 해내는지라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들의 싱크로와 연기도 중요한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훌륭합니다. 곽정이 너무 잘생기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주인공 보정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고, 황용도 미모와 장난기를 모두 가진 배우를 잘 섭외했더군요. 다만 장나라를 연상케 해서 처음에 집중이 안 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고요. 사실 <동사서독>을 보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게 장국영의 서독이었는데, 그 잘생긴 얼굴로 <합마공>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2017 드라마 버전의 구양봉은 구양봉 자체였습니다.^^ 최고는 동사인 황약사였는데, 딸바보, 시건방, 안하무인, 보헤미안, 츤데레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지닌 황약사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곽정-황용 커플에 비해 (외모로) 성인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안 커플인 양강-목염자 커플의 외모 또한 대단했습니다. 덕분에 두 커플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이 정도 중요한 커플에서 태어난 아이인 양과가 초고수가 되는 것도 설득력 있을 듯해졌습니다.

 

<동사서독> 장국영의 구양봉과 <사조영웅전 2017>의 구양봉 - 뉴튼 처럼 독을 직접 맛보고 실험한 끝에 얼굴이 이리되었다는 설정인가!

 

미중년 황약사 - 츤데레의 원조



매초풍은 책으로 읽으며 생각했던 이미지 대비 너무 여성스럽고, 연약해졌는데, 김용이 최종적으로 바꾸었다는 (막장) 황약사-매초풍 스토리를 생각하면 2017 버전 정도의 외모는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백통은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 보다 더 가벼워졌는데, 행적을 생각하면 드라마의 캐릭터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홍칠공은 무공을 수련한 것이 아니라 피부관리를 한 것이 아닐까 싶은 점을 제외하면 불만이 없고, 전진칠자나 강남칠괴의 경우도 주요인물은 캐릭터와 배우의 일치가 훌륭합니다. 

가장 큰 단점은 CG입니다. 2010년대 후반에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CG 수준은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무술을 와이어 액션으로 처리한 건 CG 역량의 부족 때문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의 단점은 구처기-강남칠괴-매초풍 등으로 이어지면서 고수 넘어 고수라는 느낌으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뭔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주곤 했던 것 대비, 드라마에서는 구양극을 제외하고 중간 보스 악당들 (팽련호, 삼선노괴 등)이 개그 캐릭터로 완전히 자리매김함에 따라 뭔가 넘어야 할 산이거나 무공의 바로미터로 작용하지 못한 느낌입니다.

 

아무튼 책으로 읽던 시절의 감흥에는 못미치지만 오랜만에 드라마로 본 <사조영웅전>은 여전히 재미있고, 캐릭터는 살아 있으며, 실제 역사와 적절히 버무려진 스토리는 흥미진진합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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