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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영화]<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 2005)은 또 하나의 스필버그 판 가족영화일까?

by 만술[ME] 2017. 7. 3.

이 글은 제가 몇 번 언급한 바 있는 <가족 인문학 강좌> 중 웰즈의 <우주전쟁>에 대한 강의에서 다루어진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5주 동안 진행된 강의 중간에 영화를 보았고, 아이들과 원작과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 개봉 당시부터 이 영화에 대해 잘나다가 스필버그 특유의 가족주의로 망친 영화라는 평들이 있었고, 저는 이와는 생각을 달리했었기에 강의에서 이야기 나눴던 내용 일부를 정리해봤습니다. 지금도 이 영화를 가족주의 관점, 용두사미의 관점에서 평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보셨다면 다른 의견도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표적>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아래 링크의 기사와 같은 평이 주류였습니다.
영화 「우주전쟁」…어처구니 없는 결론


당연하지만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이 글에서 언급하는 주요장면을 참고하시려면 글 끝에 첨부한 링크를 보시면 됩니다.

 

 

많은 재난 영화들이 영화에 가족주의나 가족애를 삽입할 때 사용하는 흔한 방법은 문제 있는 가족(보통 속마음과는 달리 일에 미쳐 가정을 등한시했던 아버지가 문제의 중심이죠)이 재난을 겪으면서 가족의 가치를 재발견하거나 아버지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겁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전처의 애인이 부자이고, 평소에는 자상하고, 상대적으로 능력도 좋은 것으로 묘사되죠. 우주전쟁에도 바로 이런 인물이 등장합니다. 전처의 새로운 남편이죠. 하지만, 일반적인 가족애를 다루는 재난영화가 평상시에 멋졌던 아빠의 경쟁자가 재난의 과정에서는 비겁함과 무능력의 극치를 드러내고, 반대로 평소에 지질했던 아빠가 능력자로 부각되면서 평소에는 마음에만 품었던 가족에 대한 사랑이 겉으로 드러나 다시 <옛 가족>의 결합을 예상하게 하는 결말로 끝나는 것과 다르게, <우주전쟁>은 과연 주인공 레이가 다시 <아빠>로 등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하는 결말을 보여줍니다.  

 

 

 

 

1. 영화는 레이의 옛 부부관계의 회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끊어놓고 시작합니다.

 

<가족>의 중심은 엄마-아빠인데 주인공 레이와 전처의 재결합할 여지는 영화 시작부터 없어 보입니다. 이혼 뒤 전처가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정도의 단절은 여러 영화에서 나옵니다) 아예 재혼까지 해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행여 레이가 전과 같은 가족을 구성한다면, 셋째의 정통성이 문제가 됩니다. 스필버그는 재결합의 가능성을 아예 끊어놓은 것이죠. 

 

영화는 진행 과정에서도 전처-새 남편의 결합을 끊을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재난이 시작된 이후에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 전처와 새 남편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재난 영화에서 새 남자의 의외의 비겁함과 아빠의 의외의 능력과 사랑을 부각하는 데, <우주전쟁>은 그런 묘사가 없습니다. 전처는 주인공 레이의 영웅적인 활약을 볼 기회조차 없어요. 레이는 딸과 아들을 위해 그 모진 과정을 다 겪는 데, 전처는 보스턴에 앉아 새 남편과 알콩달콩 있다는 거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재결합의 불가능성을 극도로 치밀하게 보여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처와 장인, 장모, 그리고 새 남편까지 보스턴의 말짱한 집 현관에 있고, 레이는 제법 떨어진 길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계단 위 높은 데 서서 (의도적으로인 묘사로 보입니다) 출입구를 굳건히 막고 있습니다. 레이는 초라한 모습으로 저 아래에 서 있죠. 고생한 레이를 집(<가족>이라는 틀)에 들일 생각이 전혀 안 보입니다. 아이들을 배달한 택배기사는 빨리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죠. 고생했으니 물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손짓, 표정, 말 한마디 없습니다. 험한 길에 택배 무사히 배달해줘 고맙다는 정도의 눈빛이죠. 속마음은 괜히 네놈 집에 애들 맡겼다가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2. 딸 레이첼은 아빠 레이를 인정할까?

 

레이의 딸 레이첼은 영화 내내 아빠에게 의지합니다. 아들 로비의 주체적인 모습과 달리 (주체적인 덕분에 레이와 많이 반목하죠) 레이첼은 레이와 상황에 끌려다닙니다. 늘 레이는 레이첼을 보호하려고 하고 이 건 <눈을 가리는 행위>로 묘사됩니다. (<눈가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상세하게 논의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도 아니고 엄마를 마주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첼은 180도 변합니다. 

 

감독은 레이첼이 엄마의 모습을 보고 뛰어가고, 안기고 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의도적으로 레이첼이 레이로부터 등을 돌리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내내 엄마에게 고개를 묻고 단 한 번도 아빠인 레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마치 기억하기 싫은 고난의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함께 한 아저씨일 뿐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레이가 한 일도 자기 아이들을 잠깐 맡았다가 돌아가야 하는 제자리로 돌려준, 말하자면 <의무사항>을 이행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특별한 일을 한 게 아니라 그냥 (화성인이 침공했건 말건)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한 것, 칭찬받을 일이 아니란 말이죠.

 

사실 영화를 보면 레이-레이첼 관계가 정상적인 부녀지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레이는 그렇다고 쳐도, 레이첼의 모습은 레이를 <아빠>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로 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게 합니다. 우연히 그 보호자가 아빠였을 뿐, 그날 돌봐주러 왔던 보모여도 달라질 것은 없는 느낌이랄까요. 

 

 

3. 레이는 재난을 겪으며 성장했는가?

 

가족의 재결합을 다룬 일반적인 재난영화의 공식이라면, 아빠로서 부적절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던 레이가 아빠의 위치를 찾으려면 영화의 진행과정에서 레이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객들이 레이가 아빠로 받아들여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으니까요.

 

영화에서 레이도 분명히 <성장>합니다. 하지만 이 <성장>이 딸이나 아들과의 관계의 개선을 통한 <아빠>로서의 성장이 아닌 다른 쪽으로의 성장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레이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아들의 <욕망>을 이해 못 합니다. 아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자 하지 않고 통제하려고만 하죠.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에게 다가가는 것은 오히려 아들 로비입니다. 로비만이 계단을 <내려가> 레이를 마주합니다. 레이첼은 밑에서 올라가 그들의 세상에 합류했고, 로비는 반대로 위에서 내려와 레이에 합류합니다. 

 

영화 내내 레이의 성장은 이해심, 포용력 같은 것의 성장이 아니라 살인을 하고, 외계인 기계를 파괴하고,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군인에게 외계인의 방어막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외계인을 굴복시키게 만드는 폭력적인 성장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딸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이런 폭력적인 성장의 <부수효과>로 보일 정도죠. 동네의 한량이던 레이는 처음에는 <재난>을 외면하고 피하기만 했지만, <성장>을 통해 살인과 파괴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이 살인과 파괴는 아빠의 바람직한 덕목은 아니란 게 문제죠.

 

 

4. 안락한, 너무나 안락한 보스턴의 외가

 

개봉 당시 외계인의 침공을 거의 당하지 않은 듯 멀쩡한 보스턴의 모습과 외계인의 침입 따위는 잊고 있었던 듯한 모습의 외가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스필버그가 가족주의를 강조하고자 의도적으로 보스턴과 외가를 안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가족주의에 빠져 현실성을 상실한 결말이라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의도된 것은 맞지만 저는 그 의도가 <가족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은 평온한 보스턴, 그리고 거의 완벽한 평온을 유지한 채, 그 완벽함에서 빠진 나사 하나(레이첼)만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외가의 모습을 통해 관객이 몇 가지 의문을 갖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레이가 그토록 고생한 건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 철부지 아들도 몸 성히 더 빨리 돌아왔는데? (감독은 의도적으로 아들이 레이와 헤어진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로비는 레이보다 더 건강해 보입니다) 꼭 살인과 파괴를 하는 폭력적이고 무식한 방법으로 레이첼을 데려와야 했나? 그건 하층 막노동자인 레이에게나 딱 어울리는 그런 해결책 아닌가? 그냥 상류층 보스턴의 가족들처럼 품위를 지키며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 아닐까? (침략자들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허무하게 몰락했는지!) 

 

물론 관객은 레이가 겪는 그 모든 과정을 목격했지만, 중요한 건 보스턴의 가족들은 그 과정을 모른다는 것이죠.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노골적으로 레이 따돌리기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레이는 평온한 보스턴을 보며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 거쳐 온 그 파괴의 현장들과 너무 다른 보스턴에 있었던 가족들에게 그 과정을 얘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건 어쩌면 베트남전, 걸프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병사들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들은 지옥 같은 전장에서 자신의 가족을 지키겠다는 생각만으로 사람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끔찍한 행동을 하며 동료들이 죽어가고 장애인이 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본인도 죽거나 장애인이 되어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전쟁은 지도에서 찾기도 힘든 동양의 먼 나라의 일일 뿐 고향의 안락한 생활을 누린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는 (일상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과 파괴를 한, 이제는 너무나 달라져 낯선 존재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비록 그들의 역할이 필요는 했지만, 안락한 집안으로 들이기는 싫은 존재.

 

 

5. 목격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레이는 외계인이 침공한 이후 레이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가 레이첼을 보호하는 수단은 늘 <감각의 차단>입니다.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죠. 눈앞에서 펼쳐지는 살육의 현장, 그 현실을 보지 못하게, 보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게 레이가 생각하는 <보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감각의 차단>으로 보호받은 레이첼은 기존의 따뜻하고 안락한 보스턴으로 돌아가 엄마를 <보는> 순간 자기를 지켜줬던 레이를 잊게 됩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 엄마의 품에 안긴 채 레이를 다시는 쳐다보지 않죠.

 

반면, 레이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건 영화 내내 레이를 아버지로 대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이름으로 부르죠) 말썽을 부리던 아들입니다. 보스턴에 있는 사람들 중 아들 로비만이 높은 계단 위의 현관에서 낮은 레이의 위치로 내려가 레이를 안아줍니다. 이 포옹은 레이가 겪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죠.

 

왜 로비는 레이를 안아줄 수 있었을까요? 로비는 탈출 여정에서 레이와 티격태격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언덕의 전투장면에서 나옵니다. 레이첼이 엉뚱한 부부에게 끌려가려는 장면에서 레이는 뛰쳐나가는 아들 로비와 레이첼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데, 로비는 레이에게 전투에 <참여>하겠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싸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안다는 건 레이의 생각이었죠) 로비는 “전 여기 있어야 해요. 이걸 봐야 해요”라고 말하죠. (극장과 DVD의 번역은 이 중요한 대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같은 장면에서 레이첼이 그녀를 데려가려는 부부에게 “전 여기 머물러야 해요”라고 말하는데, 로비가 “I need to <be> here"라고 말하는 반면 레이첼은 <sta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레이가 이 장면에서 로비를 설득하는 용어도 레이첼 곁에 <stay>하라는 것이죠. 결국 레이첼은 언덕 너머 <진실>을 목격할 수 없는 아랫쪽에 안주(stay)한 반면, 로비는 기어서 언덕 꼭데기에 임(be)해서 언덕 너머의 진실을 목격합니다. 

 

“이것을 <봐야>해요” - 이게 레이가 그토록 레이첼을 보호하고자 했던 <감각의 차단>과 상반되는 것이죠. 로비는 참전해서 외계인과 싸우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는 그 현실을 자기 눈으로 생생히 <목격>하고자 한 거죠. 레이첼이나 다른 보스턴의 가족들과 달리 그 현실을 보았던 아들 로비만이 레이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아버지로 부르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감독은 얘기하고 싶었을 겁니다.

 

스필버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레이는 그 끔찍한 상황에서 공포를 느끼고, 살인도 하고, 파괴도 하는 어쩔 수 없는 <희생자>가 되었는데, 이런 희생자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곳에 숨거나, 눈을 가리고 외면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함께 <목격>하는 것만이 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시간과 공간을 되돌려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외면하지 않고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둘 수는 있고, 이것만이 로비가 레이를 진심으로 안아줄 수 있었던 그 이해와 공감을 위한 유일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MF[ME]

 

 

*영화가 기억나지 않으시면 아래 링크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

 

언덕위의 전투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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