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의 황금기가 가고 대형 오케스트라곡을 스튜디오에서 리허설을 하고 녹음을 하는 것이 음반사 입장에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게 되자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 LSO 등의 많은 오케스트라가 자체 레이블을 론칭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악단 중 하나인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스스로 이렇게 독일식으로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의 경우는 타 악단보다는 좀 늦은 2010년대에 시작했고, 최초의 악단 전용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디지털 콘서트 홀>(일명 DCH)와 병행하는 의미로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다른 오케스트라 자체 레이블 대비 패키지가 럭셔리하며, CD와 함께 연주회 실황을 담은 BD(때로는 BD오디오를 따로 제공하기도 합니다)를 묶어서 판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같은 음원의 고음질 파일을 다운 받을 수 있는 코드와 DCH를 일주일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코드를 제공합니다. 취향에 따라 음원의 형식을 선택할 수 있게 SACD나 LP버전도 추가로 내기도 합니다.
제가 소개하는 <존 애덤스 에디션>은 작곡가 존 애덤스가 2016/2017년 시즌에 상주 음악가로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와 함께하면서 이루어낸 결과물의 집대성입니다. 이 상주기간을 위해 작곡된 새로운 음악이 없는 점은 아쉽지만, <Short Ride in a Fast Machine>을 제외하면 음반에 수록된 모든 곡이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의 첫 연주라는 점을 생각하면, 프로젝트의 최우선 과제는 존 애덤스의 음악을 악단이 습득하는 과정이었을 것이기에 악단만을 위해 새로운 곡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도 같습니다. 음반에 수록된 부가영상에서 호른주자인 새러 윌리스와의 대화에서 브람스, 브루크너에 익숙한 비트감각을 가진 유럽 악단에 자신의 음악의 비트와 리듬을 가르치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죠. 그리고 래틀이 2017/2018년 시즌을 끝으로 베를린 시대를 마감한 것을 생각하면 재직과정에서 악단의 레퍼토리를 확장해 놓은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에 대한, 그리고 오랜 기간 친분을 가지고 함께한 존 애덤스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 바로 이 상주 작곡가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연주자들의 면면을 보면 이 프로그램이 베를린 사람들에게 큰 선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제가 정리한 표를 보시면 각각의 곡을 작곡자 본인, 초연자 또는 프로그램의 다른 곡을 초연한 연주자가 맡고 있습니다. 즉, 존 애덤스의 음악적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연주회를 맡았다는 것이죠. 여기에 보너스로 페트렌코는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의 차기 상임 지휘자 였고, 현재는 상임 지휘자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음반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곡인 <다른 마리아의 복음서> (The Gospel According to the Other Mary)의 독창자들도 대부분 초연에 참여했던 성악가들입니다. 작사가이자 초연 프로덕션을 맡았던 피터 샐라스도 커튼 콜(+보너스 영상)에 등장합니다.
이렇게 존 애덤스의 음악을 뼛속까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세계 최정상의 악단을 만나 이룬 성과는 정말 대단합니다. 이 훌륭한 연주자들이 초기(1985년)의 곡인 <화성학>(Harmonielehre) 부터 가장 최근(2012년)의 대작인 <다른 마리아의 복음서> (The Gospel According to the Other Mary)까지의 기간 동안의 중요곡(물론 오페라는 빠졌습니다)을 최상의 연주로 전달합니다. 더구나 연주회를 영상으로 보면서 느끼는 감동과 배움은 남다릅니다. 조금 비싸지만 존 애덤스의 음악을 시작하려면 이 음반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특히 <다른 마리아의 복음서>는 현대판 <수난곡>인데 바흐의 두 <수난곡> 만큼의 감동을 선사합니다.
부가 영상으로 수록된 인터뷰에서 존 애덤스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 미국을 떠나 베를린으로 왔다면서 트럼프가 상징하는 구시대적이고, 차별적이고, 배타적이며, 권위주의적이며 폭력적인 정치, 문화와 상반된 모습을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와 베를린의 문화에서 느끼고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이 이런 정신과 이어져 있다고도 말합니다. (특히 <다른 마리아의 복음서>가 그렇습니다) 제가 새삼스레 발매된 지 제법 된 이 음반을 소개하는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의 한국의 모습이 트럼프 시절의 미국의 모습처럼 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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