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알게 된 일이이라 시간이 좀 지났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움베르토 에코는 제게 비중이 큰 인물이라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제게 있어서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자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처음 알았던 86년 초반에는 아직 <장미의 이름>이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니까요. 그렇다고 기호학자로서의 그의 글을 읽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의 이름을 알고, <기호학>이라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도죠.
소설가로서의 에코는 <장미의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같은 과 동기였던 L군이 움베로토 에코가 소설을 냈는데, 정말 재미있다며 추천해준 것이죠. L군 의견은 에코가 영화판권도 노리는지 영화화를 염두에 둔 듯한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저는 읽으면서 이런 내용을 가진 책을 영화화한다면 책의 매력이 모두 없어져 별 볼 일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게는 캐릭터나 스토리는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솔직히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듯한, 그래서 그 <사건>에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인 듯한 결말은 호박에서 추출한 DNA로 공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을 가졌음에도 고작 놀이공원 만들었다가 사고 한방에 부랴부랴 문 닫아 버리고는 아무 일 없듯 살아간다는 이야기만큼 현실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책의 매력은 에코가 풀어 놓는 현학적 이야기들에 있었으니까요.
현학적 매력은 제가 에코의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푸코의 추>(초판 번역제목으로 나중에 <푸코의 진자>로 바뀌었습니다.)가 나왔을 때 바로 구입했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야말로 음모론과 도시전설의 백과사전 같은 내용은 여러 가지의 쾌감을 주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의해 스스로 희생당하는 결말도 좋았구요. 이어지는 이야기들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등도 좋았습니다. 사실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를 좋아하게 된 건 처음에는 에코, 그리고 나중에 <개미>를 읽으면서 였습니다. (<개미> 3부작은 뒤로 갈수록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읽긴 했습니다만)
그의 이론서의 경우도 <열린책들>에서 에코의 책들을 엄청나게 발굴해서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으로 출간하고는 있습니다만, 제 입장에서야 <일반 기호학 이론> 정도만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잡학 다식을 집대성한 시리즈들이고, 궁극적으로는 내년에 번역 완간 예정인 엄청난 부피와 가격의 <중세> 시리즈가 그 종점이 될 듯합니다. (물론 <중세> 시리즈는 출판사가 다릅니다.)
TV 같은 곳에서 외국어로 된 전문용어들이나 섞어 쓰면서 속은 빈 주제에 현학적인 티를 내는 매스컴 전용 학자들의 홍수 속에서, 현학적 말발도 이 정도 하면 감히 욕할 수 없다는 경지를 보여주었던 움베르토의 에코가 매우 그리울 것 같습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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