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끈하게 잘 쓰인 논문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주석은, 흔히 본문과 비교하면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주석은 우리의 무의식을 닮았다. 무엇인가를 감춤으로써 유지되는 글의 연속성이란, 다스릴 수 없는 진심에 대한 알리바이와도 같다. 주석의 글이 본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의식이 거짓의 모습이 아니고서는 의식의 영역에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위에 인용된 <인문예술잡지 F> 제15호에 실린 남수영 교수의 하룬 파로키의 부고를 가장한 <하룬 파로키의 눈과 손: 그의 부고에 붙임, 또는 그런 글>의 첫 대목은 제게 있어서는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의 값어치를 다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윗글을 읽으면 왜 제가 그간 주석을 그토록 열심히 읽었는지, 때로는 왜 본문보다 밑줄긋기가 많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한 번도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제게는 작가의 무의식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단 책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주석을 읽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주석이 없다면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달고자 했다고나 할까요.
<인문예술잡지> 이번 겨울호는 특집으로 <부고(訃告)>를 다루고 있습니다. 2014년을 마무리하는 현시점에 <부고(訃告)>라는 특집은 너무나 시의적절하다 할 수 있으며, 게재된 글 하나하나가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게 만드는 글들입니다. 박준상의 <죽음과 마주하는 무감각: 광주를 다시 응시하며>를 읽으면서 우리는 왜 이다지도 관대한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과 9개월 전에 있었던 일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고 전해 들은 지난 세대에 있었던 역사 처럼 만들어 버리는 총체적인 사회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유독 저는 조문을 위해 방문했던 지인의 빈소 곁에 우연히 한 여학생의 빈소가 있었기에 그 일이 <개인적>인 차원으로 느껴지는 것일까요? <세월호 희생자들>이라는 추상적 집합이 아니고 지인의 빈소 옆의 <그 여학생>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너무나 구체적이고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실존으로?
* * *
어제는 또 하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서울시향의 지휘자였던 정재동 씨의 영면 소식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정재동 씨는 MBC에서 방송하던 해설 있는 음악회(아마 <청소년 음악회>라는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의 해설과 지휘를 맡은 분으로서 입니다. 요즘처럼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보고 들을 방법이 흔치 않은 시절이었기에 음악 관련 프로그램은 거의 놓치지 않고 시청했는데, 정재동 씨의 프로그램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기억에 엄청나게 열정을 담거나 쇼맨십을 발휘하는 인상적인 지휘 모습은 아니었지만, 매우 우아한 스타일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특히 모짜르트의 40번 교향곡 도입부를 지휘하면서 보여주신 우아한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우아함이 인상적이어서 혼자 지휘자 흉내를 내며 음악을 들을 때 주로 카라얀의 모습을 벤치마킹했지만 유독 모짜르트 40번은 정재동씨를 따라하곤 했습니다.
모짜르트 40번을 들을 때를 제외하고는 잊고 지낸 분인데, 이렇게 부고를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옵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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