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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

[음악]칼 뵘 인터뷰 - Karl Böhm, interviewed by Alan Blyth (Gramophone, December 1972)

by 만술[ME] 2013. 11. 4.

이런 저런 이유로 음악 관련해서는 제 의견이 담긴 포스팅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1972년 12월 Gramophone지에 실린 뵘에 대한 앨런 블라이스의 인터뷰를 번역한 겁니다. 비록 오래된 인터뷰지만 아마 제가 쓴 글들 보다는 훨썬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초벌번역이고 몇몇 부분은 제가 이해 하는 바대로 의역을 했습니다. 아울러 저작권은 해당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개인적 참고자료 임을 알려드립니다.




올 여름 짤츠부르크 페스티발에 갔을 때 영국 보다는 자신의 나라에서 더 사랑 받는 칼 뵘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78세의 나이에 짤츠부르크에서 12번의 오페라 공연과 몇몇 연주회들을 하고 오페라를 뮨헨에서도 공연하고 있음에도 친절하게도 시간의 일부를 나에게 할애해 주었다. 우리가 만나던 날 아침 그는 에반스가 웨일즈 촬영중의 사고로 포기한 보쩩의 역할을 위해 발터 베리와 더블캐스팅 된 테오 아담의 리허설이 잡혀 있었다. 베르그의 오페라는 그날 밤 공연이었고 스릴 넘치는 상황이었는데 뵘의 오케스트라 피트에서의 지휘하는 모습은 그의 노쇠한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그는 수년간 페스티벨 기간 동안 좀 덜 알려진 호텔들 뒤편에 있는 매력적인 작은 별장에 기거 했는데 항상 완벽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불행히 올해는 근처에서 건축공사가 진행중이었고 뵘은 우리가 정원에 앉아 있는 동안 공사가 끊이지 않는 다는 사실에 대해 격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 격한 불만의 목소리가 우리 대화 녹음 테입에 남아 있지만, 다행히 뵘이 - 그가 독일인 이기에 - 베니스 억양이 가미된 훌륭한 영어로 (그는 자신의 영어가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야기 했던 것들의 가치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사실 그의 고향은 비엔나가 아닌 그라츠인데 거기서 그는 처음 음악원을 다녔다. 그라츠는 그가 오페라 연습코치와 보조 지휘자로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거기서 칼 무크가 우연히 내가 로엔그린을 지휘하는 것을 듣고 그와 바그너의 모든 곡들을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내게 처음이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죠.” 


“1920년에는 피델리오의 새 프로덕션을 지휘했는데 - 그때가 내가 그 곡을 처음 지휘한 것이었죠 -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그곳에서 음악감독이 될 기회가 생겼는데, 동시에 브루노 발터로부터 뮨헨에서 마탄의 사수와 나비부인을 지휘하라는 초대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곳에 네 번째 지휘자 자리가 비었으며 그라츠보다 새로운 레파토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얻는편이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난 제안을 받아들여 6년간 뮨헨에 있었죠. 첫해에는 발터와 일했습니다. 그리고는 1922년 크나퍼츠부시가 뮨헨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었죠. 그 둘로부터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발터는 나에게 모차르트를 제대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골수 바그네리안이었고, 발터를 만나기전까지 난 모차르트를 제대로 높게 평가 하지 않았습니다. 뮨헨에서의 내 첫 모차르트 오페라는 1921년 음악제에서 연주한 후궁탈출이었는데, 마리아 이보귄, 타우버, 파울 벤더 같은 훌륭한 캐스팅이었죠. 그때의 캐스팅으로 새로운 후궁 녹음을 할 수 있다면 멋진 일일 겁니다. 2년 뒤 제 첫 트리스탄[과 이졸데]을 공연했습니다."


"1927년 담스타트로 갔습니다. 에버트가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관리자였고, 루돌프 빙이 그의 보조였죠. 오페라의 소역사가 될 사건들이 있었죠. 이 즈음에 작곡자가 참석한 상태에서 첫 보쩩을 지휘했는데 그는 내 악보에 헌정사를 적었습니다. 아마 당시 그 작품이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곡이었는지는 짐작도 못할겁니다. 첫 리허설은 목관과 타악기만으로 시작했고 현악기들은 나중에나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공연을 위해 통털어 40번의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진행 했습니다. 요즘에도 그 작품은 리듬을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죠. 누군가가 리딩을 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각의 연주자들은 자기 동료들이 무엇을 연주하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어 1931년에는 함부르크로 가서 4년간, 드레스덴에서는 9년간 음악감독으로 근무했습니다. 내가 함부르크에 있을 때 스트라우스를 처음 만났는데 그때 엘렉트라의 새 프로덕션을 함께 했죠. 이후 우리는 그의 여생동안 가까운 친구사이로 지냈습니다. 그는 작곡가로서 천재적인 음악가였지만, 아주 훌륭한 지휘자이기도 해서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엘렉트라의 첫장면을 연습하고 나서 악단에게 “아주 부드럽게 연주하세요, 곡이 너무 시끄럽게 작곡되었거든요.”라고 하던 게 기억나는군요. 그는 언제나 한손으로 지휘하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넣어두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죠. 한번은 그가 그림자없는 여인을 연주할 때 자신의 충고대로 마지막 4중주 직전까지 저녁 공연내내 거의 한손으로만 지휘했었습니다. 그 마지막 4중주, C장조 포르티시모에서 아주 흥분해서 그는 다른 쪽 손을 꺼냈죠. 그는 날 늘 “뵈멜”이라 불렀는데, 연주가 끝난 뒤 “뵈멜 연주가 어땠어?”라고 물었습니다. 난 왼손을 사용한건 빼고 연주는 다 좋았다고 했죠. 사흘 뒤 그가 같은 작품을 연주하는 걸 봤습니다. 문제의 그 부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오른손만으로 지휘하면서 다른손으론 내게 손을 흔들었죠.” 


전후와 그 이전에 수많은 훌륭한 연주단체들을 지휘한 경험에 미루어 오늘날의 연주들에 있어 뭔가 아쉬움이 있을까? “글쎄요, 여전히 같은 성과를 낼 수는 있지만 음악제에서만 가능하죠. 여기서 지금 코지[판투테]를 준비하면서 난 내 훌륭한 캐스트들과 함께 4주의 리허설 기간을 가졌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인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가수들은 연주회 당일 아침에 도착합니다. 리허설을 원하지도 않죠 - 그날 밤 공연을 위해 쉬기를 원하거든요.”


뵘은 라이브 레코딩을 좋아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 자신의 아끼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녹음의 경우 관객이 참관한 상태에서 한막씩 녹음했다고 한다. “빈트가센이 3막을 모두 연속으로 녹음해야 한다면 그는 1막에서 약간은 기운을 아껴야 할껍니다. 물론 닐슨은 그렇지 않지만요. 그녀는 작품 전체를 매일 지치지 않고 노래할 수 있어요. 스튜디오에서는 모든 것을 수정할 수 있지만, 때때로 연주의 흐름을 잃게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다시 흐름을 잡아가는데 아주 힘들죠.”


그는 아를린 아우어의 콘스탄제, 피터 슈라이어의 벨몬테, 쿠르트 몰의 오스민이 기용 된 후궁의 녹음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 이도메네오 역시 녹음 하고 싶어 한다. 그는 내년 여름 잘쯔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이도메네오의 새 프로덕션을 지휘할 예정이다. “예전에는 바움가르트너 판본을 사용했지만 내년 여름에는 오리지널 판본으로 복귀할 겁니다. 물론 어떤 게 오리지널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말입니다. 모차르트는 뮨헨에서는 이 부분을 자르고, 비엔나에서는 저 부분을 자르곤 했죠.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죠.”


올해 여름 잘쯔부르크 코지[판투테] 공연에서는 이전 EMI 녹음에는 포함되어 있던 두 개의 아리아 'Tradito, schernito'와 'E amore un ladroncello'를 뺐다. 왜 그랬을까? “그 아리아들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에는 너무 길게 만들죠. 이 문제에 대해 스트라우스와 수차례 논의한 바 있고, 그와 나의 많은 연주 경험에 의하면 이 삭제가 옳고 모차르트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합니다.”


내년 여름 뵘은 비록 장소가 영국은 아니지만 드디어 LSO가 잘쯔부르크에 첫 데뷔를 할 때 영국 오케스트라를 다시 지휘하게 된다. “난 코벤트가든에서 다시 지휘한다면 좋겠습니다. 비엔나 국립 오페라와 1947년 그곳에서 공연했던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음향이 아주 훌륭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케스트라와 그 성향에 대해 고려할 때, 그는 그와의 비인필과 베를린 필과의 (40년이 넘어가는) 오랜 인연에 엮여 있는 것을 느낀다. “녹음을 위해서는 내가 이 오케스트라들을 잘 알기 때문에 이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연주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내가 모르는 오케스트라와는 그러기 힘들죠.”


바그너와 관련해서는 뵘은 대부분을 칼 무크에게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는 라하르트 [바그너]의 생각들을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코지마로 부터의 전통을 물려받았습니다. 무크는 어느 부분에서 오케스트라가 더 도드라져야 하는지, 바이로이트의 음향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했죠. 바그너에 대한 제 관점은 가능한 감상주의와 과장됨을 피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바이로이트에서 첫 반지를 빌란트[바그너]의 마지막 프로덕션에서 공연할 때 비평가들은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가 지나치게 투명하다고 했죠. 저는 예전에 모차르트와 바흐를 알기 전에 바그너를 지휘했지만, 이제는 다른 작곡가들을 알게 됨에 따라 그로 인해 순수해진 바그너를 지휘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제 생각이에요.”


모차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는 그의 이해가 순전히 사랑에 의한 것이라 믿는다. “전 그것[사랑을 통한 이해]이 저로부터 오케스트라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트라우스는 모든 작품에는 정확한 템포를 알려주는 한두마디가 있다고 말하곤 했죠. 제가 보기에 이런 예가 마술피리 2막의 5중주입니다. 그 부분은 alla breve and Allegro로 표기되어 있어  빠른 템포로 시작하고픈 충동을 느끼게 되지만 그러면 세 부인이 'Man zisehelt viel sich in die Ohren' 부분에 와서는 템포를 맞출 수 없기에 그 부분의 속도가 모든 부분의 속도를 좌우해야 하는 거죠. 스트라우스는 모차르트는 끊김없는 멜로디의 창시자라 이야기 했는데 그 예로 케루비노의 'Voi che sapete'를 들었죠. 그 멜로디는 첫마디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마디에서 끝납니다.”


스트라우스를 지휘함에 있어 뵘은 작곡자 자신의 금언을 이야기 한다. “너무 크지 않게 연주하라.” 그는 덧붙이길 “전 말없는 여인과 다프네의 초연을 지휘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언제나 리허설에 참석해서는 계속 “너무 소리가 커, 뵈멜”이라고 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말없는 여인의 리허설에서 가사가 들리지 않자, 악보를 호텔로 가져가서는 빨간 잉크로 클라리넷과 바순을 넷에서 둘로 줄이는 수정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와 함께 뵘의 머릿속에는 그 작품이 녹음 된적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고, 그는 이런 무관심을 고쳐야겠다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뵘의 말없는 여인은 1959년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녹음으로 발매되어 있습니다. - MF]


뵘은 독일 레파토리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하는 것도 좋아했다. 2년전 비엔나에서는 맥베스의 새 프로덕션을, 지난해에는 메트에서 오셀로를 지휘했다. “난 예전에 이런 모든 레파토리들을 해봤고, 올 여름 짤츠부르크에 온 막스 로렌츠와 오셀로를 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평생 160개 정도의 오페라를 했던 것 같군요.”


이 이야기와 함께 뵘은 그의 160개의 오페라 레파토리 중에서도 아마 들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 보쩩의 공연의 리허설을 위해 일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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