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 예술 - 공연

[음악]클라우디오 아라우 (Claudio Arrau) 인터뷰 (Gramophone, 1972년 2월)

by 만술[ME] 2013. 12. 20.

한때 집에 넘쳐나던 연주자들 브로마이드들 중에서 아라우의 것을 제법 오랫동안 방에 걸어 놓았습니다. 오랫만에 아라우에 대한 글을 쓰니 그시절이 생각나네요. 그의 말년에 베를린 필과의 <황제> 실황을 들으며, 위대했던 피아니스트의 넘쳐나는 미스터치들이 얼마나 눈물겹던지요. 그리고 이런 애틋함이 그의 음반들중 필립스의 마지막 세션들을 담은 박스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는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가 1972년 앨런 블라이쓰와 했던 그래모폰지 인터뷰 입니다. 원제는 <Claudio Arrau Talks to Alan Blyth>이며, 2월호에 게제 되었습니다. 저작권은 당연히 해당 저작권자에 있으며, 참고용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라우는 자신의 경력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4살 때 연주의 충동을 느낀 이래로 연주가 제가 하고픈 유일한 것이 었습니다.' 그는 그 어린 시절에 벌써 베토벤 소나타들을 연주할 수 있었고 한 해 뒤에는 그의 조국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던' 어머니와 함께 7살때 베를린으로 가서 마르틴 크라우제(Martin Krause)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는 연주란 세계에 대한 관점(Weltanschauung)의 일부'라 가르쳤다. ‘크라우제는 제가 읽을 책들을 골라주었고, 전인 교육을 했습니다 ― 진정한 안내자이자 멘토였죠.' 

 


 

‘저는 신동으로서 상당한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15세 때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위기에 봉착했죠. 저는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고 다른 선생에게 간다면 크라우제로 부터 배운 것들을 다 잃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연주에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때까지 저는 직감에 의존해서 연주했습니다. 이제 깊은 생각하기 시작 했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의문들이 자리 잡았고 모든 문제들은 새로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간섭하지는 않고 도움을 주려 했고, 몇몇 친구들도 지적이거나 정신적인 도움을 통해 그러려 했지만 일정기간 다소나마 제 경력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제가 다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느꼈을 때 저는 신동들은 음악적으로 성숙해질 수 없다는 관념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 선입관과 싸우는 게 제게는 절실했고 결국은 극복해 냈습니다. 매니저들과 지휘자들은 저를 예술가로서 제대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베를린에서 다양한 전곡 연주회들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바흐 연주회를 가졌는데 오늘날에야 그럴 일 없겠지만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했습니다. 그리고는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시리즈가 이어졌죠. 당시 저는 베를린에서 신적 존재로 추앙 받던 슈나벨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 아라우는‘그가 너무나 말도 안되는 작자였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제 판단은 잘못된 것이어서 1935년 저는 독일을 떠나 남미로 돌아갔는데 처음에는 아르헨티나로, 그리고는 칠레로 갔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아라우는 미국으로 갔는데 1941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있은 독주회의 성공으로 그의 국제적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프로그램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슈만의 사육제, 베토벤의 작품31-3, 모짜르트의 A단조 론도, 약간의 드뷔시나 쇼팽이었다. 그 시점으로부터 그의 미래가 보장되었다. 

 


요즘 그는 연간 100회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로 연주회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모든 연주회는 하나의 이벤트가 되어야 합니다. 틀에 박힌 것이 되어서는 안되요.' 하지만 그는 같은 작품을 투어중에 여러번 연주하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만날 당시 그는 12회에 걸친 쇼팽 1번 협주곡 연주를 위해 이스라엘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그 작품은 엄청나게 시적이기 때문에 전혀 질리지가 않아요.' 그는 한 번의 장기 투어에 보통 3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하는데 ‘각각은 고전주의 레파토리에 기반'을 둔다. ‘저는 더 많은 낭만주의 음악을 연주하곤 했는데 아직도 리스트 협주곡들, 베버의 소협주곡과 E플랫 협주곡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작품들이 있는데 특히 부조니와 달베르트가 좋아했던 헨젤트의 협주곡이 그렇습니다. 좀 더 근래의 작품들로는 바르톡의 1,2번 협주곡들, 챠베즈의 협주곡, 헤르만 괴츠의 협주곡을 좋아합니다. 차베즈의 곡은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아주 연주하기 어렵습니다 ― 아주 장대한 카덴짜가 있어요.'

 


아라우는 1920년대에 텔레풍켄과 파를로폰에서 그의 첫 음반들을 녹음했다. ‘제 기억에 이슬라메이, 약간의 리스트, 부조니의 엘레지들, 피아노곡 버전의 페트루시카를 했죠. 전 가끔 이것들을 듣는데 아직도 좋아할만한 점을 찾아내곤 합니다.' 

 


그가 미국으로 갔을 때 RCA와 계약을 했고, 그는 그때 녹음된 베버의 C장조 소나타와 베토벤의 에로이카 변주곡을 기억하고 있다. 그뒤 그는 아메리칸 컬럼비아, 아메리칸 데카, EMI와 계약했고, 마침내 필립스와 계약했다. ‘저는 슈만 유머레스크 음반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음반을 하나의 기록으로 여긴다. ‘실황 연주회는 물론 더 자연스럽고 매일매일 변화 합니다. 스튜디오에서는 이 모든 연주회의 경험들로부터 정수를 뽑아내는데 이건 엄청난 책임감을 안겨줍니다. 물론 청중이 없다는 것은 저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여전히 녹음하는 건 좋습니다. 긴 시간동안 인정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라우는 바쁜 연주회 일정에 더해 베토벤 소나타의 새로운 판본을 준비하고 있다. ‘저는 언제나 해석에 대한 제 아이디어들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에 피터스 출판사가 판본 작업에 대해 제게 제안 했을 때 선뜻 응했습니다. 저는 다시 베토벤의 자필원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정본들 조차도 오류들이 있습니다. 저는 제 체르니본에 대한 생각과 저만의 메트로놈 마킹에 의거해서 템포에 대한 제안을 했습니다. 원본에 프레이즈-마킹이 없는 경우는 그 경우에 한해서 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고, 다이내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에 대한 소개부분에서 저는 각 작품의 일반적인 성격과 특히 한 소나타 내에서 각각의 악장들의 관계에 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부분이 무시되어 왔거든요. 두개의 볼륨으로 이루어졌는데 첫번째 볼륨은 작품 28까지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언제나 베토벤의 표기를 유지했다는 건데, 작품2-2의 첫 악장처럼 지키기 불가능해 보이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본의 운지법은 요즘은 양손으로 연주하는 많은 부분에 대해 오른손으로만 연주하도록 하는 게 명확합니다. 이런 의도된 난점은 그 악장의 표현상 중요한 부분이기에 쉽게 연주할 수 있게 변형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건 난점들을 연주하기 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유용한 사례죠.' 

 


아라우는 다음에는 베토벤의 협주곡들을, 그리고는 쇼팽의 작품들을 검토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쇼팽에는 헨레와 소위 말하는 파데레프스키 판본이 있습니다만 다른 판본의 여지는 있습니다. 이들은 해석이 첨부 되지 않은 정본입니다. 저는 해석본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슈베르트와 드뷔시도 새 판본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고 봐야죠.'

 


그는 음악 외에 미술, 역사,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롱아일랜드의 집에 중국 도자기, 콜럼부스 시대 이전의 조각들과 아프리카 조각들의 안목 있는 콜렉션을 지니고 있다. 그가 미국에 머무를 때면 이 집이나 버몬트의 다른 집에 머무른다. 

 


우리의 ‘공식적' 인터뷰가 사실상 끝났을 때 아라우는 그의 변치 않는 관심사인 오페라에 대해 깊은 지식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정통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특히 저는 칼라스로 대표 되는 몸짓과 음악의 연관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그의 오페라에 대한 경험은 베를린에 거주했던 1920년대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위대한 소프라노들이 기억나는데 바바라 켐프, 제가 본 최고의 백작부인인 클래어 둑스, 마팔다 살바티니, 훌륭한 브룬힐데인 헬렌 빌트브룬이 그들이죠.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지휘자들이 있었습니까 ― 블레히(그가 지휘한 카르멘은 얼마나 대단 했는지!), 에리히 클라이버, 클렘페러가 있었는데, 클렐페러의 당시로서는 아주 현대적이었던 돈 조반니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라우가 과거에 묻혀 살거나 과거만을 숭상하는 것은 아니다. ‘리골레토에 출연한 바티스티니를 봤던게 생각나네요. 물론 노래는 경탄 할 만했지만 연극적인 측면은 거의 없었죠. 요즘 가수들은 오페라의 의미와 극적 중요성에 대해 훨씬 많이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티펫의 <프리아만드 왕>과 짐머만의 <병사들>에 특별한 칭찬을 할 정도로 모든 현대의 트렌드들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다. ‘제 생각에 피아노 해석에 있어서도 비슷한 유행의 변화가 있어 왔습니다. 저는 파데레프스키, 고도우스키, 호프만과 같이 훌륭하지만 다른 전통에 속하는 피아니스트들을 들어봤습니다. 생상스를 들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프리카 환상곡과 끔찍한 작품인 웨딩케잌을 연주했습니다. 그의 기교는 대단했지만 얼음처럼 차가웠죠. 그 시절에 제가 가장 좋아했던 피아니스트는 테레사 카레리오와 부조니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리스트의 제자이자 제 스승인 크라우제의 친구인 조피 멘터가 있습니다. 이 무진장 낭만적인 여성 피아니스트가 리스트의 2번 협주곡을 다루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녀는 뮨헨에서 무진장 호화롭게 살았는데, 제정 러시아에서 귀족들 앞에서 연주할 때 대공들이 그녀에게 무대 위로 보석들을 던져주던 것에 대해 이야기 해줬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잊혀진 시절이죠. 오늘날 우리에게도 위안꺼리는 있습니다. 청중들은 보다 더 음악적이고 집중력이 있습니다. 독일의 몇몇 도시들은 별로지만 튀빙겐의 대학촌에서 공연하면 그들이 가장 난해한 후기 베토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드럽게 말하고 세련된 아라우는 전형적인 코스모폴리탄인데, 5개국어를 말할 수 있다 ― 루빈스타인 보다는 좀 적지만. 그의 아내는 1937년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소규모 오페라 하우스들 소속의 가수였다. ‘우리가 만나기전에 그녀는 케루비노 같은 역할까지 다다랐고 카르멘을 시도할 참이었는데 한집안에 한명의 연주자면 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녀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좋은 가수 하나가 버려진 것이기는 하다고 생각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