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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

[음악]페르난도 데 루치아(Fernando De Lucia)

by 만술[ME] 2013. 10. 22.

페르난도 데 루치아(Fernando De Lucia)는 19세기말~20세기에 활약한 유명한 테너입니다. 레코딩 역사 초기에 300여개의 레코드를 만들기도 했고, 유럽은 물론 남미까지 폭넓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19세기의 성악적 전통을 이어받았음에도 그에 안주하지 않고 베리스모 오페라의 초연들에도 참여했고, 덕분에 그의 음반들은 옛 성악가들의 스타일과 베리스모 이후의 스타일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그의 레파토리는 세빌리아의 이발사, 돈조반니에서 시작해서 토스카, 팔리아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거쳐 로엔그린까지 이릅니다. 그는 매너리즘적인 발성으로 비평을 받기도 합니다만 다양한 톤, 독특한 비브라토, 옛 스타일의 벨칸토 창법으로 이름 높습니다. 아래는 국내에 그에 대한 자료가 사실상 전무하기에 번역해본 그의 삶에 대한 간략한 글입니다. (Marston Records에서 발매한 Fernando De Lucia: The Complete Gramophone Company Recordings 1902-1909의 라이너 노트중(Michael Aspinall)에서 생애에 대한 부분만 발췌 번역 했습니다. 

 

 

Fernando De Lucia (페르난도 데 루치아)

 

 

이 위대한 테너는 1902년 그가 진정한 벤칸토라 부르는 스타일을 보여주기 위해 레코드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우리가 지불하는 돈 때문이 아니고, 그와 카루소의 레코드를 세상이 비교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위해 나폴리 인근의 시골집에서 부터 노래하기 위해 왔다." 1902년 12월 7일 그래모폰 & 타이프라이터 컴퍼니의 밀라노의 책임자인 Alfred Michaëlis가 런던 본사로 보낸 이 편지는 마이클 헨스톡(Michael Henstock)의 기념비적인 전기 <Fernando De Lucia, Son of Naples, 1860–1925 (London, Duckworth, 1990)>의 제18장에 인용되어 있다. 놀라운 일은 이 레코드들과 이후에 Gramophone Company, Fonotipia, and Phonotype에서 만든 레코드들이 마이클 헨스톡이 4반세기 동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게 만든 것처럼, 여전히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비평가들에게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래 나오는 데 루치아의 경력에 대한 설명은 다른 해설 작성자들이 늘 그렇듯 헨스톡의 끊임 없는 연구에 빚지고 있다.          

 

페르디난도 살바토레 데 루치아(Ferdinando Salvatore De Lucia )는 1860년 10월 11일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오늘날 우리에게 Conservatorio di San Pietro a Maiella라고 알려진 음악원에 더블베이스를 배우려고 입학했지만, 1880년에 성악을 공부하기 위한 장학금을 받았다. 명목상은 유명한 선생이자 작곡가인 알폰소 구에르시아(Alfonso Guercia) 아래서 공부했지만 에마누엘레 데 록사스(Emanuele De Roxas)와도 함께 공부했다. 병역 복무기간의 휴학 후 학교와 구에르시아(Guercia)에게 돌아갔는데 헨스톡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1884년 당시 스승이었던 빈센조 롬바르디(Vincenzo Lombardi)의 집에서의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 공연이전에 이미 1883년 사설 연주회중 하나를 통해 데뷔했다고 한다. 롬바르디(Lombardi), 만치넬리(Mancinelli), 무뇨네(Mugnone) 같은 지휘자들이 성악선생이기도 했으니 당시의 이탈리아 성악가들은 얼마나 운이 좋았던가! 롬바르디는 훗날 카루소가 안정적인 고음을 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출판사인 손죠뇨(Sonzogno)와 나폴리의 에이전트인 니콜다 다스푸로(Nicola Daspuro)는 데 루치아에 대해 일찍 관심을 가지고 이 젊은 테너를 여러 공연에 출연시켰는데, 그가 1885년 3월 9일 마르케리타 역의 유명한 성악가 버지니아 페르니-제르마노(Virginia Ferni-Germano)와 함께 나폴리의 산카를로 극장에서 파우스트로 데뷔했을 때 다른 많은 데뷔가 그렇듯 무료로 출연했다. 비평가들이 안정적인 고음역을 위해 계속 수학 할 것을 권하기는 했지만 그의 공연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데 루치아는 더 이상의 공부를 하거나 음악원에서 학위를 취득하려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한평생 매일 피아노 앞에서 새로운 효과를 시험했던 마티아 바티스티니(Mattia Battistini) 같은 스타일의 음악가들 중 하나였다. 

 

1885년 10월과 11월 그는 볼로냐 코뮤날레 극장에서 루이지 만치넬리의 지휘로 젬마 벨린치오니(Gemma Bellincioni)와 라 트라비아타를,  에르네스티나 벤다찌-세치(Ernestina Bendazzi-Secchi)와 디노라를 공연했다. 그리고는 피렌체 페르골라 극장(일부 공연은 파글리아노 극장)에서 미뇽, 핀수티의 마르게리타, 카르멘을 공연했는데 레오폴도 무뇨네(Leopoldo Mugnone)와의 첫 작품이었다.  

 

1886년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콜론 극장, 폴리티아마 아르젠티노 극장, 몬테비데오 시빌 극장에서 노래함으로써 첫 남미 공연을 나섰다. 해리스(Augustus Harris)는 그가 레알 극장에서 1886-1887시즌 공연을 할 때 바티스티니와의 많은 공연중 첫 공연에서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그와 런던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의 1887년 6-7월 공연을 계약했다. (이 공연에서 바티스티니와 데 루치아는 장 드 레즈케(Jean de Reszke) 때문에 빛을 보지는 못했다) 1887년 10월에서 1889년 3월 사이의 무려 22편의 오페라에서의 수많은 공연중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마드리드에서의 공연인데 파티(Patti)와 처음 한 무대에 섰으며, 1889년 5월에서 8월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를 재방문했다. 그는 1890년 1월 다시 산카를로에서 엠마 칼베(Emma Calvé)와 진주조개잡이, 카르멘을 공연한 뒤 5월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갔다. 그는 1890년 12월 나폴리에 다시 출연했고, 1891년 1월 14일 칼베와 함께 이후 26회의 공연이 이어지게 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공연했는데 이것이 향후 그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될 새롭고 박진감 넘치는 베리스모 오페라와의 첫 만남이다. 데 루치아와 칼베는 1891년 5월 로마의 콘스탄지 극장에서 <진주조개잡이>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공연하고 10월에는 <친구 프릿츠>의 초연을 했다. 1892년 5월 해리스의 주선으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친구 프릿츠>를 칼베와 공연함으로써 코벤트 가든에 데뷔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윈저성에서의 사설 공연을 지시할 정도로 마스카니의 오페라들은 인기를 끌었고, 7월 2일의 이 공연에서 데 루치아와  칼베는 토스티의 피아노 반주로 몇몇 장면을 선보였다. 런던의 비평가들이나 청중들은 라틴국가들에서 그에게 했던 것 같은 과장된 열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1893년 팔리아치의 런런 초연(만치넬리의 지휘로 멜바, 안코나와 공연)은 너무나 완벽한 성공이었기에 그는 1894, 1895, 1899, 1900년 재방문 요청을 받았다. 1905년 그의 후견인 헨리 러셀이 런던 월도프 극장에서의 실험적 시즌에 고용했는데 그는 4편의 오페라에서 27번의 공연을 했다. 코벤트 가든에서의 성공은 당연히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의 공연으로 연결되었는데, 데 루치아는 1893년 12월 11일 <팔리아치>의 미국 초연을 통해 데뷔했다.  그는 칼베, 노르디카, 스칼치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돈조반니>, <리골레토>, <파우스트>, <친구 프릿츠>, <세빌리아의 이발사>, <미뇽>을, 플라송과 순회연주를 했다. 그는 미국을 재방문 하지 않았다. 그는 비엔나는 1892년에 , 밀라노(라 스칼라)와 상페테르부르크는 1895-1896년에 , 리스본은 1899년에, 파리는 1905년에, 몬테카를로와 베를린은 1907년에 첫 공연을 가졌다.  

 

초기에 그의 레파토리는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세빌리아의 이발사, 미뇽, 돈조반니, 디노라, 루크레지아 보르지아, 사랑의 묘약, 라 파보리타,  샤모니의 린다, 북쪽의 별, 세미라미데 같은 리릭 오페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는 세미라미데에서 두아리아 모두를 부를 수 있는 드믄 테너였다. (“La speranza più soave”는 주로 생략하곤 했다) 그는 이중 앞쪽 네 오페라는 1900년대까지 자신의 레파토리로 유지한다. 1886년부터 그는 라 지오콘다를 레파토리에 추가했고, 1891년부터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친구 프릿즈, 란차우, 팔리아치, 로엔그린, 카르멘, 실바노, 나바레스, 라보엠, 마농, 베르테르, 이리스, 페도라, 토스카, 그리고 1907년 밀라노의 리리코 오페라에서 그의 레파토리에 마지막으로 추가한 지오다노의 마르셀라에 이르는 현대적인 드라마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보여준다. 

 

1897년부터는 공연 사이의 긴 휴지기간이 일상적인 일이 되기 시작한다. Henstock이 찾아낸 여러근거들에 의하면 로마와 밀라노에서의 20회의 이리스 공연이 목소리의 감퇴를 증가시졌다고 생각되는데 1893년 부터는 공연에서 낮춰 전조했다는 언급이 보인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공연들 1914년 1월-2월 산카를로에서의 페도라(티토 스키파와 교차출연 했는데 스키파가 드 루치아의 키에 맞춰 노래해야 했을까?), 1916년 2월 라 스칼라에서의 라보엠, 1916년 5월 로마 아드리아노 극장에서의 페도라, 가슴아프게도 1917년 2-3월의 산카를로 극장에서의 9번의 친구 프릿츠 공연이다. 

 

그의 노래의 그 모든 "바로크"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비평가들은 "바로크"라는 말을 경멸의 뜻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최고의 베리스모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위해 줄기차게 그를 찾았는데, 어찌되었건 그는 작곡가들이 악보에 적은 p,pp,ppp 또는 f, ff, fff의 미묘한 차이를 표현할 수 있었고 동시에 빼어난 연기자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우상을 파괴하기를 즐기는 나폴리 사람들은 그가 무대위에서 발작적으로 발을 구르고 머리를 쥐어 뜯는 것을 보고는 다음날 친구들에게는 극장의 가발에서 가져온 머리카락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송죠노는 그를 자주 기용했지만 Ricordi는 그의 높은 출연료를 부담스러워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친구 프릿츠, 란차우, 일 프로페타 벨라토(Daniele Napoletano), 실바노, 비타 브레톤(Mugnone), 마르셀라의 초연에 출연한 것과 같은 기록들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Henstock이 인용한 서신왕래 중 놀라운 것이 하나 있는데 편지에서 작곡가 마스카니는 이리스의 리허설 중 주인공 테너의 놀라운 노래 때문에 작곡가와 지휘자를 단순히 반주자의 역할로 축소하려한다는 불만을 보이는데, 같은 일이 이후 라 스칼라의 공연시 토스카니니에게도 벌어졌다.   

 

그의 말년인 1915년 부터 데 루치아는 그가 공부했던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그의 제자에는 Maria Nemeth, Gianna Pederzini, Peter Raitscheff, Gennaro Barra Caracciolo, Angelo Notariello, Georges Thill이 포함된다. 헨스톡에 보내는 편지에서 마리아 네메스는 1924-1925년의 레슨에 대해 "데 루치아 선생은 다양한 뉘앙스로 피아니시모를 직접 들려주었죠. 그분은 항상 어떻게 피아니스모를 마스터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셨는데, 한음에 대해 그분이 만족할 때까지 100번을 연습했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에요"라고 적고 있다.  (Henstock, p. 391–392.) 

 

1921년 8월4일 데 루치아는 나폴리의 산프란체스코 파놀라 성당에서 거행된 엔리코 카루소의 장례에서 “Pietà, Signore”(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한때는 로시니나 니더마이어가 작곡했다고 생각되던 스트라델라의 19세기 위작이지만 요즘은 페티스의 작품으로 생각되고 있다)를 불러 모인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막 출발하는 젊은 테너 카루소의 음반에 대응해 진짜 벨칸토의 모범을 보여주는 녹음으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1902년 밀라노로 왔던 그가 자신 보다 13년 연하의 친숙한 라이벌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특출한 노래를 마지막으로 들려주게 되리라는 것을 그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그는 1925년 2월 21일 나폴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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