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 예술 - 공연

[음악]Frederic Lamond: Rare Broadcasts and Selected Recordings

by 만술[ME] 2013. 10. 1.

요즘 지인들하고 번역관련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잉여력이 폭발하여 Frederic Lamond: Rare Broadcasts and Selected Recordings의 내지 책자를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리스트의 제자인 프레데릭 라몬드의 삶에 대해 정리되어 있는 국문 자료들이 별로 없는데 이 글은 내용이 제법 재미 있습니다.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에 재미로 시작해서 그냥 초벌 번역한 수준이니 책임은 못집니다^^.  



FREDERIC LAMOND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레데릭 라몬드(1868-1948)는 그의 형 데이비드로부터 첫 음악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4살에 라몬드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호쉬(Hoch) 콘세르바토리에 등록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막스 슈바르츠(Max Schwarz)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클라라 슈만은 리스트 개인이나 그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건 다행스런 상황이었는데, 슈바르츠를 통해 한스 폰 뵐로우(Hans von Bülow)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라몬드는 이후 그의 소개로 1885년 리스트와 공부를 시작했다. 덕분에 라몬드는 19세기는 물론 역사상 가장 중요한 피아니스트이자 선생인 리스트의 생에 마지막 2년동안 그의 제자가 되었다. 1855년 11월 17일의 베를린 데뷔후 시리즈 연주회를 통해 라몬드는 비엔나와 글래스고우를 거처 런던에 데뷔를 했다. 1886년 4월 15일 세인트 제임스 홀에서 열린 런던의 4번째 연주회에는 3개월후 사망한 리스트가 관람했다. 1888년 라몬드는 상페쩨르부르크에서 연주했고 이곳에서의 두번째 연주회에 참석한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에게 소개되었다. 



라몬드는 주로 독일에서 활동했지만 그의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1890년 영국의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자작 교향곡 A장조 작품3번과 함께 연주되었다. 라몬드는 1891년에는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를 위해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을 연주했고, 1896년에는 러시아 투어를 한 뒤 1897년에는 런던에 재방문했다. 1904년 배우 이렌느 트리쉬(Irene Triesch)와 결혼한 그는 이후 1차 대전기간을 제외하고는 베를린에 기거했다. 1902년 카네기홀에서 보스턴 심포니와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을 연주함으로써 처음 미국을 방문한 라몬드는 이후 1920년대 자주 투어를 했으며 1923년에는 이스트만 음악학교의 교수로 임명 되었다. 1917년 그는 헤이그(Hague) 콘세르바토리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0년대에는 베를린을 포함하여 유럽 각국의 대도시들에서 베토벤 소나타 사이클을 연주했다. 1935년 라몬드는 남미 연주여행을 했으며 다음해에는 자신의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안톤 루빈스타인이 했던 것 처럼 바이어드(Byrd)에서 리스트에 이르는 모든 건반음악을 아우르는 일곱개의 연주회로 구성된 시리즈 연주회를 유럽의 여러 대도시들에서 가졌다. 전쟁이 다가오자 라몬드와 그의 아내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나찌 정권를 피해 독일을 떠났다.



라몬드는 그의 생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지만 영국국적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돈없는 70대 노인이었으며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1940년 그는 글래스고우로 가서 글래스고우 음악원과 악기점에 있는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피아노 교습을 했다. 그는 2차 대전기간 동안 피아노 교습과 함께 "생존하는 최고의 베토벤 연주자 - 라몬드"라고 홍보된 1945년의 위그모어 홀 연주회들을 포함하여 스코틀랜드, 배쓰, 런던에서 연주회도 병행했다. 그럼에도 리스트, 안톤 루빈스타인,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브람스를 직접 알았던 훌륭한 피아니스트의 삶과 경력으로서는 슬픈 마지막이었다. 차이콥스키가 사망하기 직전 모스크바 연주를 위한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 B플랫 단조 작품23을 라몬드를 위해 편곡했지만 라몬드가 연주할 시점에는 차이콥스키는 사망했고 라몬드는 떠나가는 작곡가를 추모하는 인파들속에 스크랴빈, 타네예프(Taneyev)와 함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의 라몬드


라몬드는 1899년 2월 콘세르트허바우 소음악당의 연주회로 네덜란드에 첫선을 보였다.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그는 베토벤을 전문으로 연주했고, 이 베토벤 연주회는 무려 다섯개의 피아노 소나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해머클라비어 소나타로 시작하여 작품 110, 작품 111로 이어졌다. 휴식시간 이후에 라몬드는 발트슈타인을 연주하고 열정 소나타로 끝을 맺었는데 청중은 열광했고 그는 계속되는 커튼콜을 받았다. 언론도 호평을 했으며, 한 비평가는 그가 관객들을 쉽게 만족시킬 프로그램을 피하고 첫 데뷔무대로서는 모험적인 프로그램을 구성했음에도 완전한 성공이었다고 평했다.   


이후 라몬드는 네덜란드에서 자주 연주했고 1937년 2월에는 암스테르담에서 베토벤 황제 협주곡을 연주했다. 며칠후 리스트 피아노협주곡 2번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던 피아니스트 조셉 펨바우어(Josef Pembaur)가 아내의 갑잡스런 사망으로 연주회를 취소해야 했다. (그는 1935년 9월 이곡을 반 베이눔이 지휘하는 콘세르트허바우와 협연을 했고 연주회 실황 방송녹음이 남아있다) 라몬드는 연주회를 얼마 앞두지 않고 대타로 연주해 줄 것을 요청 받았다. 거의 70살이 다된 라몬드는 승낙했을 뿐만 아니라 연주회 프로그램도 바꾸지 않고 그의 스승의 작품을 권위와 설득력 있게 연주했다. 우리에게는 당시의 연주가 방송된 것은 행운이다. 라디오 힐베르쉼(Radio Hilversum)에 의해 보존된 녹음은 이 음반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1937년 2월 7일 연주장에서 De Tijd 신문의 비평가는 "노쇠한 베토벤 연주자"가 리스트 협주곡의 복잡함과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지 다소 걱정스러웠다. 그는 긴장속에서 라몬드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기다렸는데, 라몬드가 악보를 사용하고 악보를 보기 위해 조용히 안경을 끼는 것을 보고 우선 놀랐다. 두번째 놀라움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왔다 - "그는 리스트를 장황스럼 없이 아름답게 연주했다!" 비평가는 라몬드가 음악을 평화로움으로 채우고, 경쾌한 패시지를 조용하지만 강력한 손가락으로 연주하면서 음악의 의미를 도출하고, 매력적인 음악임을 증명하는 연주를 보여줌으로써 위대한 연주자들만이 지닌 힘을 어떻게 방출하는지를 목격했다. 박수가 잦아지지 않자 그는 명료함, 뛰어난 음악적 구도와 테크닉으로 리스트의 난쟁이의 춤(Gnomenreigen)을 연주했다.   


1939년 라몬드는 71세였지만 여전히 어려운 곡들을 연주했다. 7월에는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Freiburg im Breisgau)의 베토벤 페스티벌과 위트레흐트(Utrecht), 암스테르담, 스케브닝겐(Scheveningen)에서 연주회를 했다. 10월 27일에는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로 시작해서 베토벤의 월광과 발트슈타인 소나타로 이어지는 독주회를 가졌다. 후반부의 메인은 리스트의 또다른 난곡인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이틀후 라몬드는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방송 연주회에 등장했는데 케루비니의 아나크레온 서곡에 이어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3번 C장조 작품 37을 협연했다. 연주회의 마지막은 첼리스트 제라르 헤킹(Gérard Hekking)이 협연하는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돈 퀴호테였다. 여기에 최초로 발매되는 베토벤 협주곡 연주의 녹음은 19세기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특징인 드라마, 단단한 구조, 긴 프레이즈에 보이는 노래하는 듯 흐르는 음색, 음악이 살아 숨쉬는 듯한 느낌이 담겨져 있다. 첫악장 제2주제만으로도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라몬드는 잘 연주되지 않는 클라라 슈만의 카덴짜를 1악장 끝에 연주한다.


 

라몬드와 베토벤


라몬드의 베토벤 음악에 대한 밀접함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다. 라몬드는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순수함, 진리, 단순함을 원했다. 베토벤은 나의 단 하나뿐인 신, 나의 신앙이었다. 그의 위대한 작품들에 빠져들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현세적 삶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1944년 라몬드가 쓴 팜플렛에는 "하이든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요, 모짜르트는 천국 그 자체이며, 베토벤은 그곳에 계시는 신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1922년 그는 (아쉽게도 음질이 나쁜 어쿠스틱 녹음이지만)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과 베토벤 황제 협주곡을 최초로 녹음한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는 월광, 발트슈타인, 열정 소나타들과 베토벤의 작품 10-2, 작품31-3 소나타에서 두악장씩 어쿠스틱 녹음을 했는데 이들은 이 음반에서 처음 재발매 되는 것이다. 


그는 1921년 11월 F샵 소나타 작품 78과 함께 월광 소나타를 처음 녹음 했지만 둘다 발매되지는 않았다. 4월에 이어진 월광 소나타에 대한 두번째 녹음 시도는 부분적으로만 성공적이어서 종악장의 두번째면만 발매되었으며 소나타의 남은 부분은 발트슈타인의 첫번째 면, 작품 31-3의 "미뉴에토" 악장과 함께 6월에 녹음되었다. 발트슈타인 1악장의 남은 부분은 1922년 9월에, 나머지 부분은 1923년 9월에 녹음되었다. 같은 녹음 세션에서 1년전 첫번째면만 녹음되었던 열정 소나타의 녹음이 완료되었다. 녹음 시점의 차이, 좋지 못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이 연주들은 설득력과 몰입감이 있다. 라몬드는  "마치 베토벤의 경이로움을 세상에 처음 들려주는 것 처럼 자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연주하려 노력하라. 단순히 피아니스트가 되려 하지 말고 음악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 노력하라 "고 학생들에게 가르쳐 왔는데 자신의 그 가르침을 본인 스스로 이 연주들에서 지키고 있다.  


1931년 그래모폰의 편집자인 컴프턴 매킨지(Compton Mackenzie)는 기고를 통해 베토벤의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촉구 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는 전기녹음 이전부터 HMV의 경영진 사이에서 논의되어 왔는데 이 중요한 일을 위해 선택되었던 연주자인 프레데릭 라몬드에 대해서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의 까다로운 애호가라도 선택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기 않을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1925년에서 1930년 사이에 전기녹음이 도입되면서 라몬드는 어쿠스틱 녹음을 했던 곡들을 재녹음 했고 작품 26-1, 2번과 작품 110을 추가했다. 하지만 이즈음 아르투르 슈나벨이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로 베를린을 평정했고, 1932년에는 런던을 평정했다. 때맞춰 HMV에서는 그에게 전곡 녹음을 의뢰했고 그는 3년에 걸쳐 전곡 녹음을 완료한다.  


슈나벨의 등장으로 하룻밤에 라몬드의 녹음과 베토벤 연주자로서의 권위는 슈나벨에게 넘어갔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됨에 따라 그에게는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을 것이다.


라몬드와 BBC


본 윌리암스와 스탠포드의 제자인 이안 와이트(Ian Whyte1901-1961)은 1931년에서 1945년까지 BBC 스코틀랜드의 음악 책임자였는데, 그가 1935년에 설립하고 1945년에서 1960년까지 지휘한 BBC 스코티쉬 오케스트라와 함께 방송 음악회를 하곤 했다. 1930년대 중반 라몬드가 베를린에 거주할 당시 그는 1936년 1월의 런던 콘서트 후 BBC의 계약을 위해 노력 한적이 있다.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2차 대전기간 중 라몬드가 글래스고우에 살며 경제적 어려움을 격던 시절인 1940년 6월 와이트는 허버트 태틀록(Herbert Tatlock)으로 부터 그와 BBC가 라몬드에게 관심을 갖게하는 편지를 받았다. 5일후 윗태이커(Whittaker) 교수가 보낸 비슷한 편지가 BBC 운영위원회에 전달됬다. BBC는 관심을 가졌고 라몬드의 에이전트인 ibbs와 틸렛(Tilet)은 와이트에게 3개의 독주회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향후 5년간 라몬드는 25분에서 30분정도에 걸친 두개의 짧은 프로그램들과 덤퍼라인(Dumferline)에서의 베토벤의 3번 협주곡, 황제, 4회의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 E플랫 장조 등 몇몇 협주곡을 연주 연주했다. 이들 방송 녹음은 남아있지 않으며 라몬드는 1945년 3월 6일 글래스고우의 BBC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위한 리스트에 대한 자신의 회상담을 녹음했다.  이틀후에는 같은 방송을 위해 [리스트의] 도깨비불(Feux Follets)과 사랑의 꿈(Liebesträum) 2번을 녹음했다. 이 녹음은 1945년 3월 25일 처음 방송되었고 1951년 11월 재방송되었다. 77세의 라몬드는 대본을 읽고는 있음이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녹음에서 그가 18세의 소년으로서 위대한 리스트를 만났던 순간의 경외심과 숭배,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도깨비불"은 피아니스트들의 기교상의 단점을 들어내는 곡으로 아몬드의 나이를 고려할 때 방송을 하기에 적합한 선택은 아니었다.



라몬드와 데카 


1919년 이후 라몬드는 HMV(와 자매회사인 독일의 엑렉트롤라)에서 녹음 했는데, 프로듀서인 월터 레그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 또다른 위대한 HMV 피아니스트인 마크 햄부르그(Mark Hambourg)와 함께 방출되었다. 2차대전 동안의 런던 방문덕으로 생각되는데 라몬드는 1941년 비교적 근래에 설립된 데카에게서 레코딩 제안을 받았다. 5월 15일과 16일 그는 베토벤의 월광과 발트슈타인 소나타, 네개의 리스트의 소품을 녹음했다. 이중 두개의 리스트 소품만이 발매되었고 12월 17일 월광 소나타에 대한 재녹음이 있었지만 더 이상의 음반은 발매되지 않았다. 라몬드의 마지막 녹음인 두개의 쇼팽 마주르카와 시험 녹음이 남아 있는데 이 녹음 테입이 대영 도서관에 보관되에 있다. 이 녹음은 라몬드의 해당 레파토리에 대한 유일한 녹음이면서 데카의 유명한 고음질 음향으로 녹음된 귀중한 기록이다. 1948년 2월 21일 라몬드의 사망시 그는 그보다 3개월 뒤 사망한 호세 비안나 다 모타(José Vianna da Motta)와 함께 단둘의 생존하는 리스트의 제자였다. 


© Jonathan Summers, 20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