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차이콥스키의 <비창>교향곡은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된 1964년 녹음이었습니다. 라이센스 LP로 듣던 시절이니 다른 선택도 거의 없었지만 당시 카라얀은 제 음악생활에 있어 일종의 교과서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선택이 가능했어도 이 음반을 선택했을 겁니다.
음악을 듣고 배워가던 시절이라 음반들을 평하기는 무리였겠지만 당시에는 그냥 유명한 <비창>교향곡을 제게 알려주는 효과 이외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건 하이앵글로 찍은 카라얀의 모습이 참 멋지게 나왔다는 것이죠.
이후 같은 성음 LP인 므라빈스키, 푸르트뱅글러의 음반들을 접하고 그 “명성”에 현혹되면서 카라얀의 음반은 다소 멀리했었습니다. 80년대에 레닌의 이름이 들어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뿌듯했고, 푸르트뱅글러의 비정상적으로 긴 1악장의 감정의 기복은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아무튼 이 특별한 두 음반덕에 카라얀은 잊혀졌죠,
그렇게 한두해가 흐른 어느날 정말 오랜만에 카라얀의 <비창>을 꺼내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경탄을 하면서 음반을 들었습니다. 연주의 치밀함은 악기소리 하나하나까지 통제되어 정확한 위치에 놓여있고, 절제되었지만 충분히 분출하는 1악장, 2악장의 우아함, 3악장에서의 완벽한 통제와 리듬감, 그리고 폭발하는 코다, 4악장의 통제된 비극적 아름다움. 므라빈스키의 음반에서 느끼는 통제의 아름다움이나 푸르트뱅글러의 감정의 고양과는 전혀다른 통제와 감정, 어찌보면 감정의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계산되고 짜여져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완벽함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설득력이 있었죠.
이 음반은 CD시대에 와서 70년대 음반에 비해 쉽게 구할 수는 없었지만 Collector's Edition 시리즈의 차이콥스키 박스(교향곡 전곡과 발레곡 등이 들어 있습니다)로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염가박스인 관계로 카라얀의 멋진 모습을 담은 표지가 없다는게 아쉬움이고 다른곡들이 그의 같은곡 연주에서 우선순위로 꼽을 수만은 없는 녹음인 점이 또 다른 아쉬움입니다만 저렴하고 좋은 박스입니다.
다행히 국내에서 라이센스로 나오고 본사에서 그걸 배껴 발매한 카라얀의 60년대 DG 관현악 녹음집(오페라는 빠졌으니 이런 표현이 맞습니다)이 LP 오리지널 자켓 시리즈로 나온 관계로 다시 옛 모습 그대로 이 음반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CD로도 가지고 있었던 음반이지만 표지와 함께 듣는 음악은 또 다른 느낌을 자아내더군요.
아무튼 카라얀이 남긴 그 많은 <비창> 녹음중에 아마도 가장 모범적인 음반으로 추천할 음반을 고르라면 이 64년 녹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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