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의 나폴레옹 시대를 다룬 해양 소설인 오브리-머투린 시리즈 가이드에 드레이크님께서 코딩리의 "낭만적인 무법자 해적"에 대한 내용을 질문하셨습니다. 답글을 달려다 보니 의외로 내용이 길어지고 그냥 포스팅으로 처리하는게 좋을 정도가 되더군요.
코딩리의 "낭만적인 무법자 해적"은 국내에 번역본이 2007년에 나왔고, 저는 2008년에 읽었습니다. 때문에 기억이 안나는 부분이 많아 다시 대충 둘러보았습니다만 다시 정독하고 쓴 포스팅은 아니란 점을 먼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책의 내용은 매우 훌륭합니다. 국내판 제목은 “낭만적인 무법자”라고 되어 있지만 원제는 Under the Black Flag: The Romance and the Reality of Life Among the Pirates로 각종 영화 등을 통해 낭만적으로 치장된 해적의 실상을 전달하겠자는 저자 코딩리의 의도가 보다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코딩리는 해적에 대한 낭만이 당대와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기억임을 실제의 자료들로 하나하나 정리해 냅니다.
평균적인 해적의 모습은 술에 찌든 20대 선원 출신으로 교양 없고, 배우지 못했으며, 그들이 나포한 배에서 고문이나 살인 등의 잔혹행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들이 노리는 것은 금화가 가득실린 보물선 일지는 몰라도 주로 훔친 것은 식량, 그들의 배를 수리하기 위한 목재, 생필품 같은 것이었다는 거죠. 설사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돈은 항구에서 창녀와 술을 사느라 금방 탕진해 버렸구요. 아울러 그들의 마지막은 멋진 여자와 오붓한 노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교수대에서 처형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구요. (잭 스패로가 만든 이미지에 속지마세요, 그냥 나쁜놈들이에요)
주로 슬루프였뎐 해적선이 전함을 상대로 대결을 펼친다는 것은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에나 나올 수 있는 일이고, 해적은 전함을 보면 주로 도망가기 바빴죠. 해적이 프리깃급의 선박을 지휘한 일도 매우 드믑니다. (시드 마이어의 “해적!”이란 게임에도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그 게임을 해보면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영국 함대의 등급상 5등급인 대형 프리깃(Large Frigate)을 얻으면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스패로 선장이 타고 다니는 “블랙 펄”은 무려 32문짜리니 영국 해군 5등급 프리깃급입니다. (물론 모양을 볼 때 선종은 갤리온입니다.)
저자는 해적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해서 해적들의 주요 활약상, 유명한 해적들의 생애, 선상에서의 생활, 그들의 폭력, 운용했던 선박들, 그리고 해적시대의 몰락까지를 매우 상세한 사례들을 보여주면서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서술하는 방식이 산발적인 사례를 많이 제시하다 보니 약간 덜 체계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일반독자”를 타겟으로 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조금만 더 사례 보다는 체계적인 정보의 전달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느낌입니다.
아울러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했다면 유명한 해적들 몇 명의 생애 정도는 한두 챕터로 다루어 체계적으로 정리했어도 좋았을 텐데 저자 코딩리는 해적들의 기록을 이곳저곳에 산만하게 뿌려놓기만 했고 때문에 다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유명해적 중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한눈에 조망할 수 없습니다. 다루는 시대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다루지는 않고 우리가 하는 해적들의 전성기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인 독자들이 관심 있는 해적들이 그 시대의 모습이니 이건 이정도 규모의 책에서는 좋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번역입니다. 원래 우리 번역자들이 소위 말하는 전문용어, 특히 군사용어 등에 있어서는 너무 허술한 경우가 많은데, 국역본만 본 입장에서도 많은 번역의 오류, 적절치 못한 용어의 선택, 그리고 오탈자까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원서로 읽기보다야 낫겠죠.) 저는 초판을 읽은 거니 개정판이 있거나 쇄를 거듭(이런 특수분야를 다룬 책이 그랬을리는 없지만)하면서 교정을 봤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 해적의 경우 “선장”이라는 제대로 된 번역을 사용했지만 (영국)해군의 경우 captain을 “함장”이 아닌 “대위”로 번역했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lieutenant는 “소위”로 번역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국 함선은 모두 “대위”가 지휘합니다. 선박은 “대포 14문 리벤지호” 같은 식으로 번역하지 않고 “14포 리벤지호” 같은 어색한 번역을 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규모를 이야기 하면서 “함대 67대, 5,6등급 군함 50대” 같은 이상한 번역도 보이는데, 일단 배를 세는 단위는 일반적으로 “대”가 아닌 “척”을 쓰는 것은 둘째로 하고 “함대 67대”라는 말은 아마도 1~4등급함선인 “Ship-of-the-line”(전열함)을 줄지어 있는 함선들이니 함대인가보다 하고 번역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유추할 수 있는 바른 번역은 “전열함 67척, 5,6등급 전함 50척”이죠. 여기에 오탈자와 영어의 어떤 단어의 용법을 엉뚱한 뜻으로 적용해서 이런 이상한 문장이 나왔는지 짐작케 하는 문맥상의 어색함도 제법 많습니다. (예를들어 - 이 책에서 정확히 이렇게 했다는건 아닙니다만 이런식 입니다 - 좌현을 뜻하는 port를 항구로 번역해서 망망대해에서 항해하던 배가 “항구의 모든 포문을 열었다” 식으로 번역하는거죠.
몇가지 문제 - ①짧은 책이지만 다소 산만하다 ②유명 해적의 삶에 대한 부분이 좀 부족하다 ③번역이 많이 아쉽다 - 를 감안해도 사실 해적에 대해서 이만한 책도 없지 싶긴 합니다.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의 패트릭 오브라이언이 “지금까지 읽은 책중에서 악당들에 관해 가장 권위 있고 박식한 책이다”라고 했는데 감히 제가 뭐라 하겠습니까?^^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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