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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

[음악]베토벤 교향곡 7번 음반들에 대한 소감

by 만술[ME] 2024. 3. 22.

나름의 사정이 있어 한동안 베토벤 교향곡 7번을 비교감상 했습니다. 타이달을 이용하면 훨씬 많은 음원을 비교할 수 있었겠지만, 집에 있는 음반에 한정했습니다. 지휘자가 겹치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로 흥미가 가는 음반을 절반정도 추려내니 20장이 골라지더군요. CD를 기준으로 지휘자 중에는 (리마스터링을 구분하지 않고 녹음을 기준으로 하면) 카라얀이 4종 (DG 3종, EMI 1종)으로 1위,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푸르트뱅글러가 3종으로 2위 더군요. 물론 영상물이나 LP까지 고려하면 좀 복잡해지지만 CD기준으로는 이렇습니다.
 

 
음반 20종 선정의 기준은 한 지휘자는 한장만 고르자는 원칙 외에 아무것도 없이 그냥 그때그때의 기분이었습니다. 어떤 음반은 오랜만에 듣는다는 이유로 선택했고, 어떤 음반은 내가 이 음반이 있는지 잊었구나 하는 이유로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음반은 늘 듣던 음반이지만 그래도 이 녹음을 빼면 서운하지라는 개인적 감정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20종의 베토벤 7번을 듣고 그중 몇몇 음반에 대한 인상을 적어봅니다. 
 


 
브루노 발터 / CSO - 제가 딱히 좋아하는 지휘자도 아닌데, LP 시절부터 이상하게 발터의 베토벤을 좋아했습니다. 당시 발터하면 늘 명반으로 손꼽히던 6번의 연주보다 오히려 5번, 7번을 더 좋아했죠. 이유는 모르지만 발터의 알레그레토 악장을 들을 때마다 감정이 복받쳐 옵니다. 그냥 따뜻한 사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6번과 달리 전혀 따뜻한 곡이 아닌 7번에서 들을 수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그리 추천할만한 연주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제게는 가끔은 돌아가고픈 연주입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 / 빈 필 - 벌크 하지 않은 적절한 근육과 생동감, 역동성이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정점에 오른 연주입니다. 이런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늘 경이롭습니다. 그렇다고 역동성을 위해 우아함이 희생되지도 않아요. 역동적이지만 무용같은 우아함을 지닌 <와호장룡>의 무술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콘세르트허바우와의 실황 DVD를 포함해서 다른 3종의 실황에서는 <정확한 지점>에서 뭔가 2% 부족하더군요. 물론, 취향에 따라 더 역동적인 몇몇 부틀렉 음반을 선호하실 수도 있겠고 저도 그런 적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늘 이 DG 음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미하일 길렌 / SWF - 인터코드로 나오던 시절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길렌의 에디션 중 한장입니다. 국내 발매 당시 애호가 사이의 신-구 세대(이제는 당시 신세대이던 저도 나이 먹은 구닥다리가 되었네요^^)를 양분하게 했던 길렌의 베토벤인데, 클라이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지금 들어도 음향과 음악적 쾌감의 정점을 들려주는 연주입니다. 그래서 발터와는 또 다른 의미로 알레그레토 악장을 들으면 감정이 복받치곤 합니다. 감정을 담을 필요 없는 절대 음향의 아름다움!
 
데이비드 진먼 / 톤할레 - 제가 이전 글에서 델 마의 해설 번역본을 올렸던 베렌라이터 판본으로 녹음된 최초의 전집입니다. 지금 들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순간순간이 많습니다. 저음역의 강조, 칼같은 정확함이 호불호를 갈리게 할 수는 있습니다만, 혼자서 크게 틀어놓고 듣거나 헤드폰으로 집중감상하면 더 진가가 발휘되는 음반입니다.
 
로저 노링턴 / 스투트가르트 - 시대연주를 이끌었던 노링턴이 전통악단과 한 재녹음입니다. 시대연주에서 배울 점을 기존 악단에 적용해서 녹음하는 사례는 제법 많은데, 이 음반 역시 시대연주의 배움을 시대악기로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녹음입니다. 역동감은 근육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음반이며, 그 겉옷은 속이 비치는 하늘하늘한 투명함입니다. 그래서 듣다 보면 디테일에서 "아, 7번에 이런 부분이 있었지" 하는 소소한 발견을 하게 해주는 부분이 많아요. 또한 2악장이 행진곡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주입니다.

카라얀 / 베를린 필 (80년대) - 저는 카라얀의 베토벤은 늘 60년대 전집을 최고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80년대 전집은 CD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당시에는 LP파 였던 저로서는 카라얀의 (표지까지도) 금빛 찬란한 80년대 녹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현재는 LP는 그냥 멋으로 듣는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카라얀의 80년대 베토벤을 들으면서, 레임덕을 향해가던 당시에도 베를린 필은 여전히 통제되어 있고, 카라얀의 질서 정연한 미학은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브루노 바일 / 타펠뮤직 - 시대연주 음반입니다. 솔직히 그냥 들으면 시대연주라고 생각하더라도 다른 음반들에 비해 재미 없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를 기울여 디테일을 들으면 그 재미가 살아나는 묘한 음반입니다. 전체를 듣는 것보다 이런 순간순간을 듣는 재미가 더 있는 묘한 음반이죠. 예를 들어 2악장에서 비올라와 첼로에서 시작해서 제2 바이올린, 제1 바이올린으로 음이 겹겹이 쌓여가는 과정을 이 음반만큼 또렷하고 생생하게 들려주는 음반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이먼 래틀 / 베를린 필 - 누구처럼 올드함의 정점을 유지하지 않고 베토벤에 대한 최신의 연구, 시대악기의 연주 성과를 현대악단에 반영하여도 충분히 역동적이고 근육질의, 그러면서도 시대연주의 장점은 모두 수용하는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음반입니다. 더구나 실황녹음이에요. 이건 그냥 베를리너 필하모니커니까 가능한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키릴 페트렌코 / 베를린 필 -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7번이 춤과 축제의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이라고 한다면, 페트렌코의 7번은 흥청망청한 대도시의 축제가 아니라 소박한 시골 전원마을의 축제를 연상케 합니다. 근육질의 전문 무용수가 아니라 아리따운 시골 처자들이 나와서 추는 춤이죠. 그래도 축제는 축제인지라 밤이 무르익은 4악장에와서는 본능이 알맞게 폭발합니다. 아껴온 모든 힘을 마지막 악장에 방점을 찍은 연주. 
 
조르디 사발 / 르 콩세르 데 나시옹 - 제가 가진 가장 최신 연주입니다. 모든 부분이 새롭고, 신선하며, 생동감 넘칩니다. 다만, 어딘지 지난 1집이 모든 연주가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번 2집은 1집에 비해서는 좀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부분부분은 좋은데, 하나로 모았을 때 뭔가 좀 아쉬워요. 팬데믹으로 인한 휴지기의 영향일까요? 베토벤 교향곡에서 모든 악기의 소리를 남김없이 듣겠다는 생각이라면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있는 음반. 
 




뭔가 추천음반을 고르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모든 음반을 들은 것은 아니고, 영상물은 평가하지 않은 상태지만, 추천 음반을 고른다면 시대악기 연주로는 그래도 조르디 사발의 음반이 그간 시대연주의 모든 것을 모아서 시대연주에 친숙하건 아니건 즐거움과 신선함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통적 오케스트라의 능력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베렌라이터 판본의 연주는 래틀의 음반을 추천하며, 전통적인 기존 스타일의 연주로는 (발매당시는 결코 기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클라이버의 음반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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