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테일러의 <유령의 해부(The Anatomy of Ghosts)>를 소개함에 있어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 할 것 같습니다. RHK의 이벤트 덕에 받아본 책이기 때문에 읽기 전에는 기왕이면 무진장 긍정적인 이야기를 풀어 놨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고 난 결과는 이런 저런 생각들이 섞여 있습니다.
1. 어렵지 않고, 흥미로우며, 재미 있다
<유령의 해부>의 특징, 그리고 장점은 위 세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읽는 내내 막힘 없이 술술 읽힙니다. 작가가 글을 유려하게 잘 쓴 점도 있지만 모든 수수께끼들이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되고, 1786년 캠프리지의 가상의 칼리지인 “예루살렘 칼리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임에도 그 시대의 배경지식을 전혀 요구하지 않으며, <유령의 해부>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유령”이나 “해부”에 대해 몰라도 됩니다. 아울러 복잡한 심리 묘사도 없어서 이 친구의 저 사람에 대한 감정이 뭔지 헛갈리지도 않습니다.
특정 역사적 시기의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곳(대학)을 배경으로 유령과 관련된 특이한 사건을, 더구나 주인공이 서적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서적상 출신에 <유령의 해부>라는 동명의 책을 지은 전문가임에도 책이 이렇게 술술 읽히고 의문점 하나 없이 말끔하고 깨끗하게 끝나는 건 어떤 독자들에게는 분명히 장점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 무려 520쪽에 달하는 소설을 써야했는지는 의문이지만요. 뭐 사건이 급박하게 진행되지 않아 낙오하지 않고 모든 독자가 결론에 안착할 수 있으니 이것도 장점일 수는 있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장점이고, 이쪽의 장르에 친숙한 분들이라면, 그리고 좀 더 복잡한 책읽기를 선호하는 분들이라면 이 장점들은 고스란히 단점으로 돌아옵니다.
2. 독자들은 어떤 책을 기대하고 <유령의 해부>를 접할까?
최소한 저는 <유령의 해부>라는 책의 제목, 1786년 캠브리지의 예루살렘 칼리지라는 독특한 시대적 장소적 배경, 암시되는 비밀 조직의 음모 등으로 미루어 다음의 것들을 기대했습니다.
①공포 또는 짜릿함 - 제목부터 유령, 귀신이 나오 쟎아?
②초자연적으로 보이는 현상들, 최소한 겉보기에는 이성적으로 이해안되고 귀신의 짓이라고 밖에는 생각 할 수 없는 매우 신비한 사건들
③시대적 특성에 의한 시대 연관적인 음모, 또는 낯선 그 시대를 접함에 따른 캐릭터에 대한 거부감 또는 몰입감, 사건에 대한 애정 등 시대와 연관 되는 구속과 틀
④이 신비로운 사건은 시대를 앞서가는 탐정에 의해 이성적으로 해결되거나, 시대 종속적인 탐정에 의해 당시의 지식의 한계내에서 나름의 해결을 하게 되지만 현대의 지식으로 무장한 독자들은 탐정이 모르는 사실들의 연계를 발견함으로써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깨닫게 되고 경악을 하게 되거나
아니면 이런 전형적인 기대 자체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상상을 뛰어 넘는 특이함을 기대했죠.
3. 공포도, 초자연도, 음모도, 시대도 있지만 또 없기도 한 이야기
<유령의 해부>에는 공포도, 초자연적 현상도, 음모도, 그리고 독특한 시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없기도 합니다. 그냥 결혼식장의 흔한 뷔페처럼 차려져 있지만 고급스럽지가 않다는거죠.
도입부를 제외하면 읽으면서 단한번도 가슴을 조리지 않았습니다. 어떤면으로는 작가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유령은 이미 “사건”을 통해 등장했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홀즈워스의 아들과 아내가 죽은 것, 그리고 아내가 아들의 유령을 보았던 것은 홀즈워스가 <유령의 해부>를 집필하게 된 동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악몽을 꾸고 덕분에 프랭크랑 말이 통하게 된 계기가 될 뿐이죠. 그런 계기를 위해 쓰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과거죠.
<유령의 해부>를 쓴 유령 전문가이자 서적상으로 책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춘 주인공이 나옴에도 그 지식과 경험이 사건해결에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유령의 해부>라는 책은 내용도 상세히 언급되지 않고 그냥 그가 “취직”되는데 동기가 될 뿐이죠. 하다못해 <유령의 해부>를 설명하면서 유령으로 사기친 대표적 사례들을 가공이던 역사든 몇 개 보여만 줬어도 주인공의 능력을 보여주고 으스스한 분위기 잡는데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를 통해 약간 현학적인 티를 내면서 독자의 허영을 자극할 수도 있구요.
18세기 후반의 캠브리지라는 배경, 또 폐쇄적인 칼리지라는 배경도 그게 꼭 그시대, 그 장소여야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냥 21세기 파주의 영어마을을 배경으로 영어교사가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내용을 바꿔도 지장이 없다는거죠. 물론 영어마을 선생님들이 “홀리고스트 클럽” 같은 비밀집단을 만드는건 좀 웃기지만 “영시낭독 모임”의 회장의 아내와 신입 회원의 로맨스에서 사건이 발생해도 뭐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습니다.
다시말하면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같은 느낌의 일부라도 차용했다면 훨씬 좋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18세기말 대학이라면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습니까? 당시 대학 시스템, 건물양식을 장황하게 묘사해도 좋고 하다못해 학자간에 “유령과 정신현상”에 대한 논쟁을 그럴듯하게 다루어도 좋고, 리처드슨과 토의하면서 홀즈워스가 과학의 힘으로 어떻게 신비현상을 해결하는지 논증하는 과정을 보여줘도 좋고요. “홀리고스트 클럽”도 좀 더 리얼하게 묘사했다면, 그리고 그 음모가 좀 더 컸다면, 최소한 홀즈워스는 처음에는 그렇게 더 큰 음모로 오해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앤드루 테일러는 이런 배경을 그냥 단순화 해서 독자가 쉽게 시대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최소한 독자가 뭔가 더 큰게 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있도록 장치들을 심어놨어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4. 캐릭터의 발전
어떤 소설은 캐릭터의 발전만으로도 상당한 재미를 줍니다. 특히 <유령의 해부>처럼 느린 전개가 이루어지는 경우 캐릭터가 발전하면서 독자는 캐릭터를 더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되고 그로인해 재미와 몰입이 생깁니다. 캐릭터의 발전은 커다란 줄거리 속에서 캐릭터가 배워나가고 변화하는 것도 한축이지만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캐릭터의 특징이나 매력이 자연스럽게 들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쉽게도 <유령의 해부>는 캐릭터의 발전이란 측면에서는 많이 아쉽습니다.
에피소드들은 큰 사건의 줄기에는 얽혀 있지만 그 에피소드로 캐릭터간의 관계가 엄청 발전하거나 캐릭터가 독자에게 매력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들의 사랑이 이루어질지 아닐지에도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어떤 인물이 죽어도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시대와 장소는 특정한 곳에 설정했지만 매우 보편적인 내용과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보편성이 캐릭터를 독자에서 쉽게 주입시키는 장점도 있지만 독자가 그 캐릭터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만들지 못하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5. 결론
읽는 동안 재미 있습니다. 문장도 아름답습니다. 사건도 제법 흥미롭습니다. 배경도, 인물의 설정도 특이합니다. 18세기말, 폐쇄된 칼리지, 유령, 아픈 과거, 학자들간의 세력다툼, 현재 유명인사들의 과거가 녹아 있는 비밀 회합, 죽음, 비싼 고서 도난의 비밀, 얽힌 인간 관계, 정신이상을 보이는 젊은 귀족... 어렵지 않게 이런 뭔가 고급스러운 소재들로 포장된 느낌의 이야기를 즐기려는 분들에게는 좋은 책입니다.
다만, 현란함, 복잡함, 짜릿함, 먹먹함을 느끼려는 분들에게는 많이 아쉬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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