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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onderful Life

인문예술잡지 F 최신호(F10)를 보면서 떠오른 우정과 작업에 대한 사고의 편린들

by 만술[ME] 2013. 8. 20.

잡지(雜紙) - 저는 잡지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이라 생각하면 되겠지만 제 스스로 잡스러운 것을 읽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고 (물론 매우 雜스러운 정기간행물들이 있긴 합니다) 때문에 “정기간행물”이라거나 “월간지”, “계간지” 같은 용어를 선호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얼마 안되는 이런 정간물중에 노골적으로 제목이 “잡지”인 정간물이 있으니 “인문예술잡지 F"입니다.



앞에 거창하게 “인문”과 “예술”을 내세웠지만 내용이 잡다한 것은 사실입니다.^^ A5 150쪽 정도에 10여가지의 기사가 있으니 기사에 따라 10쪽 미만인 경우도 제법 되죠. 기사의 수준도 등장하는 용어들이나 서술기법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렇지 크게 학술적이거나 전문적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제호대로 “잡지”이기는 하죠. (이런 기준이라면 대부분 학술지를 제외한 정간물이 잡지이기는 하겠습니다)


아무튼 지난월말에 나온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2013 여름호)를 보는데 몇가지 단상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이번호 특집이 “우정이란 무엇인가?”였기에 더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1. 용어들, 사고의 프레임을 나눌 사람들의 부재


이런 정간물, 책, 토론들에서 나오는 용어, 사고의 프레임으로 교류를 할 사람이 이제는 주변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용어들, 사고의 프레임은 늘 제 일부라 생각했는데 지난 긴 세월동안 그 용어를 제 사고의 영역을 떠나 발화한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거의 독백 수준인 블로그 조차도 설정된 타겟은 제가 예전에 자유롭게 대화하던 친구들과 다르게 설정되어 있기에 블로그에도 그런 글을 쓴적이 없습니다. 


문득 사무치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제게 발이 있어 늘 그냥 발이 있구나 하고 살아왔는데, 어느순간 제가 10여년간 걸어본적이 없다는, 발근육을 사용해 본적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늘 제 일부라고 생각했던 용어들, 이름들, 대화의 방식이 과연 지금도 제 일부이기는 할까 하는 의구심, 그리고 어느 누구와도 교류되지 않고 기동되지 않는 이런 독서와 사고가 지나간 시절, 더 이상 제것이 아닌 것에 대한 추념의 의미 이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



2. 밥먹고, 술마시고를 넘어서는 “작업”이 가능할까, 아니면 그런 “작업”을 해보기나 했을까?


만나고, 밥먹고, 술마시고, 무엇인가에 대해 (그게 1항에 대한 내용은 아니어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는 관계라는 것이 지금,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가능할까란 생각이 듭니다. 또는 과거에라도 유의미할 정도로 길게 지속되었던 그런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듭니다.


밥먹고 술마시는 것을 넘어서는 관계라는 것은 둘, 또는 여럿이 함께 “작업”을 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죠. 와이프와 공동작업중인 프로젝트가 있기는 합니다. 둘이 고민하고, 격하게 토의하기도 하며,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고, 과정과 결과에 함께 기뻐하죠. 아이들의 삶의 기반을 형성해가는 "육아"라는 프로젝트죠. 


하지만 와이프와의 또는 와이프와 애들과의 공동 프로젝트 말고, 또다른 우정어린 작업 -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나누는 그런 우정을 가진 친구, 그리고 작업이 있을까, 그리고 있기는 했던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우정의 나눔이 없는 삶은 얼마나 외로운가 하는 깨달음도.


또한 지난 세월 수없이 많은 과정을 통해 제가 추구했던 우정은 함께 술마시고, 밥먹고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작업”의 가능태에 대한 추구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치가 충족되지 못한 경우를 저는 감내하기 힘들었고, 결국은 수많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거죠. 하다못해 게임을 할 때 조차 “작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교류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작업”의 가능성이 무너진 순간 그 게임은 그냥 게임일 뿐 더 이상 제게 어떤 열정과 영감을 주지 못하게 된거죠. 더 이상 “우정”을 발현할 수 있는 장이 아니게 되면 저는 흥미를 잃게 되죠.



3.  우정, 동료를 찾아서


매우 비관적으로 쓰긴 했어도 제가 꿈꾸는 우정이 늘 부재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떤 일이건 한 순간 또는 일정기간 동안은 그 경중을 떠나 함께 “작업”이 가능했던 경험이 제법 많습니다. 다만 그게 나이를 들어가면서 점점 어려워지고 “작업”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 사람들 또는 그 갈망을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어진다는게 문제죠. 그리고 그 “작업”의 유지기간도 점점 짧아지고 만족도도 떨어지고요.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동호회 같은 인터넷 기반의 서비스로는 작업의 동료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서비스들은 “친구”를 찾아준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 친구의 가능태조차도 찾기 힘든 사회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먹고 싼 사진을 공유한다고 친구일까요? 그냥 면접적으로 밥먹고 술마시던 불편함 조차 서로 서비스를 통해 공유함으로써 시간과 비용과 수고와 감정을 절약할 뿐이죠.  


“작업”을 위해서는 열정을 담아 치열하게 교감해야하는데 인터넷 동호회 조차도 그런 치열한 교감의 시도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분위기입니다. 더구나 오감을 통해야 우정과 작업이 형성될텐데 인터넷은 기반자체가 오감을 교류하기에 부적당한 도구죠.


계급적 아비투스를 공유하지 않는 우정이 쉽지 않은 것처럼 아비투스를 공유하지 않은 공동 “작업”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비투스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는게 쉽지 않습니다. 상하관계를 전제로한 직장은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동료간에 우정을 이야기하기 힘들고, 소위 말하는 친구들은 어느순간 사회적 계급과 위계가 분화되기 시작하여 제 나이 정도 되면 고착화됩니다. 취향의 커다란 간극을 지난 세월의 추억으로 메워보려 하지만 쉽지 않고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주고 받는게 부담이 되는 순간 우정은 더 이상 우정이 아니니까요.



4. 대안이 있을까?


마음속의 갈증의 원인을 깨닫고 해결책에 대한 고민을 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이 포스팅이 심오한 사고의 편린을 제공코자 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직 정리된 생각을 제안할 수 없습니다. 제안 할 수 있을지, 제안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 제안을 하게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이 “우정”과 “작업”의 문제는 당분간 제 개인적 연구과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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