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과 달리 해외여행 관련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예전에도 그랬지만) 딱히 여행후기를 올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사견과 취향 위주로 인터넷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다만, 제가 타이완은 첫 방문이고 그것도 타이베이와 인근만 다녀온 관계로 의견의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먹거리 천국으로서의 타이완]
흔히들 타이완은 저렴하고 훌륭한 먹거리를 즐기러 가는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타이완, 특히 타이베이라는 도시가 특별히 이국적이지 않기 때문인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 1912년이라고는 하나 타이완으로 옮겨간 것이 1949년이니 역사적으로 대단한 문화유산이나 건축물이 있지도 않고, 원주민들의 문화나 유산도 남아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울러 중국풍과 일본풍, 그리고 서구 현대문물이 섞여 있는 도시의 풍경은 딱히 개성적이라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풍광을 제공할 뿐입니다.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은 모험이 아닌 도시관광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나라 대중의 여행문화와 접점이 별로 없습니다.
결국 이런 도시가 우리나라 여행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먹거리와 쇼핑일 수밖에 없기에 타이완은 이 두 가지 아이템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니겠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패키지여행의 영향으로 해외여행에서 먹거리와 쇼핑이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 있어 타이완은 가까운 거리라는 장점도 작용하여 중요한 여행지가 된 것이겠죠.
타이완의 먹거리가 엄청나게 맛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소위 인터넷이나 책자에서 추천하는 맛집을 줄 서서 먹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이, 지나가다 좋아 보여서 들어가 먹은 음식들의 수준은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너무 맛있어 먹거리 기행을 위해 또 방문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습니다. 의도치 않게 추천맛집들도 들러 먹어보았지만 (먹방 같은 프로그램의 유행을 이해 못 하는 제 관점에서는) 맛은 있지만 그것만을 위해 또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도 일부러 맛집을 찾아다니지도 않고, 유명한 맛집이나 그 옆에 생긴 가짜 원조집이나 맛의 차이가 극명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그냥 줄 안 서는 집을 선택하는 스타일에, 어떤 음식점을 맛있다고 재방문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고, 재방문을 하는 극소수의 음식점은 맛뿐만 아니라 위치, 서비스, 매장의 인테리어, 가격까지 만족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하기 때문에 제 의견이 일반적이지 않을 수는 있다는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가는 국내에 비해 저렴하기는 하지만, 이건 국내의 외식물가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고, 유사한 동남아의 국가들의 물가에 비해면 저렴한 것은 아닌 좀 애매한 물가라 하겠습니다.
[타이베이 시내 관광]
어떤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이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 타이베이는 매우 좋은 도시입니다. 이지카드(교통카드) 하나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데 불편함이 없고, 구글맵도 잘 작동하니 원하는 곳을 못 찾을 일도 없습니다. 다만 한자에 친숙하지 않은 경우에는 불편할 수 있고, 영어가 잘 통하지도 않습니다. 이지카드는 구입비용이 100 NTD인데 환불되는 돈이 아니며, 카드 자체를 구입하는 비용입니다. 타이완을 다시 방문할 일이 없다면 좀 아까울 수도 있는데, 이용 시 60 NTD까지는 외상이 가능한 점을 이용하면 40 NTD에 구입하는 효과를 누릴 수는 있습니다. 공항으로 가는 교통편의 가격을 미리 계산한 뒤에 정확히 60 NTD가 모자라게 충전하고 사용하는 방법인데, 편의점에서는 1 NTD단위로도 충전이 가능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인 식당이나 점포는 현금만 받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카드를 받는 곳은 편의점이나 백화점, 쇼핑몰, 박물관 같은 곳들뿐입니다. 다행인 점은 ATM이 정말 많고 찾기 쉬워서 (편의점에는 어디나 있습니다) 트래블월렛이나 토스카드 같은 해외용 환전카드를 가지고 가면 쉽게 현금을 인출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토스카드와 트래블월렛을 비교하면 트래블월렛은 미리 충전해 놓아야 해서 조금 불편함이 있지만 환율에 유리하고, 토스카드는 외화계좌가 아닌 원화계좌에 있는 돈을 즉시 환전방법으로 끌어 쓸 수 있어 딱 필요한 금액만 수시로 환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환전수수료도 없지만, 환율이 자체책정환율이라 사실상 수수료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타이베이 주요 시내 명소는 일반적인 겉핥기 수준이라면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속성코스라면 하루도 충분하다는 사람들도 있고요. 저야 타이완이 중국이고 지금의 중국이 중공이던 시절을 경험했던지라 쑨원, 장제스 등의 역사와 사연에 친숙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국부기념관, 중정기념당 같은 곳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은, 외국인이 바라본 독립기념관 정도의 느낌일 것입니다. 국내/유럽에 비해 확실하게 저렴한 것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인데 유명한 고궁박물관 말고도 취향에 맞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돌아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있다면 (어른의 경우도) 특히 추천할만한 곳은 국립 타이완 박물관인데, 낡은 유물 위주의 전시가 아닌 일종의 자연사 박물관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위치도 다른 곳을 방문했다 잠깐 들러가기에도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비슷한 공장 재활용 시설인 송산문창원구와 화산 1914 중 한 곳을 택한다면 좀 더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화산 1914를 추천합니다. 송산이 전시공간 중심, 화산 1914의 경우 상점 중심입니다만 흥미로운 물품은 오히려 화산 1914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야시장]
타이베이 곳곳에 소규모의 야시장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스린 야시장일 것입니다. 다만 스린 야시장은 관광객을 위한 야시장으로 현지인의 야시장을 원하면 라오허제 야시장을 가셔야 합니다. 특히 관광객에게 야시장은 물건 구입이 아닌 먹거리를 먹으러 가는 것이기에 먹거리 중심의 라오허제 야시장이 더 좋습니다. 물론 라오허제 야시장도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으로 넘쳐납니다. 라오허제 입구에는 쑹산 츠유궁이라는 도교사원이 있는데 한번 들어가 볼만합니다.
[예스지 또는 예스진지 등 타이베이 근교 투어]
타이베이 시내에 먹거리 이외에 관광객을 유혹할 상품이 별로 없어서인지, 타이베이는 근교 여행 패키지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관광지의 앞글자를 따서 예스지/예스진지 등으로 불리는 투어인데, 한국인 관광객이 1위를 찍는 나라답게 우리나라 사람들만을 위한 상품이 넘쳐납니다.
이 관광지들 중에 저희는 진과스를 뺀 예스지(예류 지질공원 / 스펀 / 지우펀)를 선택했습니다. 진과스는 220Kg 금덩어리 외에 볼 것도 없고 재물에 대한 욕심도 없기에 구태여 돈을 내고 그 금덩어리를 만져보고픈 유혹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잘한 선택인듯합니다.
이 관광지들은 대중교통을 통해 자유여행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만, 타이베이에서 출발해 각각을 방문하는 것은 괜찮지만, 서로 간의 연결이 불편하기에 어쩔 수 없이 편하게 여행하자는 생각으로 패키지 상품을 선택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 가족은 역시 패키지 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량으로 편하게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는 장점은 무시할 수 없지만, 각각의 방문지에서의 체류시간은 저희 가족 기준으로는 너무 짧고 (저나 저희 가족은 다른 사람들이 대충 빠른 시간에 훑어보는 관광지도 의외로 길게 체류하곤 합니다) 시간적 부담감을 갖고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편안한 관람을 방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예류지질공원은 바닷가 사암지대로 다양하게 침식된 바위와 타포니 지형이 길게 늘어선 형태입니다. 가장 유명한 여왕머리 바위는 사진을 찍으려면 길게 줄을 서야 하는데, 줄 서기 싫어하는 저희는 당연히 구경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패키지를 통해 방문해서 체류시간이 길지 않고 인증사진을 꼭 찍어야 한다면 1 구역은 과감히 생략하고 2 구역의 여왕바위로 달려가 줄을 먼저 선 뒤에 남는 시간을 이용해 1 구역을 보면 되겠습니다.
스펀은 천등축제로 유명한데, 사실 관광객이 1년 내내 엄청난 양의 천등을 날리는 곳입니다. 개별적으로 날릴 수도 있고, 여행 상품에 포함해서 날릴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붉은색 천등 대비 4색 천등은 가격이 더 비싼데, 붉은색에는 보통 좋은 뜻은 이미 다 포함되어 있고, 막상 날리면 그게 그거라서 그냥 기본 붉은색 천등을 추천합니다. 저희는 네 식구라 각자 한 면씩 소원을 적었는데, 제가 쓴 (지난 박근혜 때도 묘하게 탄핵일정과 가족 여행이 겹쳤는데 이번에도 겹친) 윤석열 탄핵 가결과 아들이 쓴 수시합격은 이루어졌고, 와이프의 소원은 탄핵 의결에 힘을 받아 조금씩 진행 중이며, 딸의 소원만 대기 중이라 천등의 효험이 대단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이동, 소원적기, 천등 날리기에 소요되는 시간이 제법 되기에 우리 가족에게는 이곳도 체류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참고로 스펀의 대표 먹거리라는 땅콩 아이스크림은 줄 서서 먹느라 고생하지 말고 지우펀에서도 파는 곳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맛은 아이스크림이 맛이 없으면 이상하죠.^^
지우펀은 (비공식적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된 곳으로 유명한데, 모든 근교투어 패키지가 지우펀에서 끝나는지라 엄청난 인파로 문자 그대로 카미카쿠시 당할 판입니다. 가장 유명한 사진 스폿인 아매차주관이나 계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자 한다면 일반적인 관광 코스와 달리 우선은 앞쪽에서 먹거리 등을 즐긴 뒤,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고 패키지 관광객이 먹거리를 위해 슬슬 입구 쪽으로 이동하는 8:30 즈음을 노려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라이 온천지대]
근교 여행지중에 비교적 교통편도 편하고 여유롭게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는 우라이 온천지대를 추천합니다.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멋진 자연풍광을 구경하며 슬슬 걸어서 폭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인데, 편하게 꼬마열차를 탈 수도 있지만 저는 걷는 것을 추천합니다. (오르막이 힘들면 올라갈 때만 열차를 이용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우라이에는 중소규모의 온천들이 많이 있는데, 무료 노천 온천도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관리하는 곳으로 헝겊을 둘러놓은 정도의 탈의 시설도 있어 미리 수영복만 준비해 가면 야외 온천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온천 앞에 하천이 흘러 자연스럽게 냉온탕을 왕복할 수도 있고, 날씨가 더우면 물놀이도 즐길 수 있습니다. 유료시설에 비해 탈의/샤워 시설이 열악하지만, 답답하고 개성 없는 실내 유료 온천보다 야외 무료온천을 추천합니다.
[반드시 봐야 할 곳,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
수원 사람들이 왕갈비를 늘 먹는 것도 아니고, 의정부 사람이 늘 부대찌개를 먹는 것도 아니며, 전국에 평양냉면을 잘한다는 집도 상당수에 그 맛도 각각 달라 어디가 정통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세계 각국의 볼거리, 먹거리, 살 거리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이 모든 <필수>는 11/11일의 빼빼로와 같은 느낌입니다. 꼭 누구에겐가 주어야 할 것 같고 재미로 줄 수도 있지만 안 줘도 그만이고 그냥 상술일 뿐인 것처럼 인터넷, 가이드, 여행서가 말하는 <필수 아이템>도 다 상술일 뿐이며 더 중요한 것은 각자의 취향입니다.
평소 우리 문화재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고궁박물관은 돌로 만든 신기한 먹거리 구경에 지나지 않고, 매주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101 타워 전망대보다는 차라리 양명산이라도 등산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타이베이에 가면서 101 타워는 전망대에 올라가지는 않아도 보지 않고 지나치기는 힘들고 저녁에 야시장을 들르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너무 어떤 것을 못 먹고, 못 보고, 못했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떡은 동네 떡집이나 마트의 떡을 잘 먹으면서 펑리수는 특정 맛집의 펑리수를 줄 서서 먹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다들 세상을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살아가는 마당에 여행조차 성공에 목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여유를 가진다면 실패도 여행의 한 부분으로 즐거운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스타에 보이는 삶과 진짜 삶의 차이만큼 여행 책자, 인터넷, 유튜브의 여행과 현실 속의 여행은 차이가 납니다. 인스타에서처럼 누구나 샤넬 백을 들고 BMW를 타고 다니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처럼 타이완에 갔다고 꼭 딘타이펑에서 먹고, 펑리수를 사 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조금만 사고를 바꾸면 판에 박힌 인스타 밖에 있는 진짜 삶만큼, 진짜 여행도 판에 박힌 가이드북보다 더 역동적이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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