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 게임 - 취미생활

[독서]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번역

by 만술[ME] 2013. 5. 2.

무려 디카프리오, 캐리 멀리건, 토비 맥과이어 주연에 루어만이 감독한 “위대한 개츠비”가 개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참에 오랜만에 원작이나 읽자는 생각에 김영하 번역의 “위대한 개츠비”를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역자인 김영하는 후기에서 고등학생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것에서 비롯한 “개츠비”가 최고의 소설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재미없는 소설은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책을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김영하의 번역은 매우 성공적입니다. 


우선 낯선 (낯설다고 말하지만 금주법 시대의 미국은 영화 등을 통해 많이 접해왔죠) 배경과 시대임에도 바로 우리시대의 이야기인 것처럼 술술 읽힙니다. 시간만 충분하면 앉은 자리에서 뚝딱 해치울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화나 묘사가 고색창연하지 않고 극히 현재적이기 때문에 캐릭터가 살아있고 그 캐릭터의 행동에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스토리가 몰입감을 더해감에 따라 후반부에서는 박진감 넘치는 장르소설의 느낌까지 들 정도입니다. 


아마 독자에 따라서는 제가 기술한 장점들이 철저히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겁니다. 이건 1920년대 미국 동부를 배경으로한 피츠제럴드의 소설이 아닌 그냥 김영하의 신작 소설아니냐, 고전으로서의 맛과 품위를 상실했다 등의 비판을 할 수 있죠.


음악에서의 역사주의 연주 또는 시대악기 연주과 관련된 논의처럼 번역에 있어서 이 문제도 쉽게 결론내리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1920년대의 느낌이 뭉실 나게 번역해서 낯설고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작가의 언어를 그대로 옮기는게 더 올바른 일인지, 아니면 과감히 그 작품이 그 작품의 당대의 독자들에게 주었을 거라 생각되는 느낌을 지금의 독자들이 받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게 옳은지의 문제죠. 사실 이건 번역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미국의 독자라 해도 1920년대에 쓰여진 글을 읽을 때 당시의 독자들이 느꼈던 그 감흥을 그대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광수의 문학을 읽으면서 그 시대의 독자가 받았을 감동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 것 처럼요.


모국어로 쓰여진 글인 경우 그 쓰여진 시대의 독자들에게 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중을 현대적 언어로 풀어서 현재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결국 멋진 해설을 덧붙이고 각주를 달아 독자의 수준(?)을 끌어 올려 원문을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독자의 조건을 변경해주는게 전부죠.


번역의 경우도 모국어와 같은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해당 시대, 해당 작가에 친숙한 독자라면 그 방법이면 그 해당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책을 읽을 때 느끼는 맛과 유사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독자라면 이게 좀 힘들죠. 소위 명작이라는 것을 읽기 위해 공부를 하고 한 페이지에 여러개의 각주를 읽어가며 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좀 고역일 수 있습니다.


대안은 최대한 작가가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느낌이 살아나도록 번역하는 것이죠. “위대한 개츠비”와 관련해서 김영하가 취한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번역에서는 우리가 그렇듯 친구들끼리 반말합니다. 그들의 행동과 언어는 갓 30이 된 젊은이들 답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캐릭터가 살아 있고, 스토리는 개연성을 가집니다.


헐리웃의 로마시대 영화들의 주인공들의 행동과 대사는 그냥 헐리웃 식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의 사고방식이나 도덕관도 극히 현대적이었구요. 그러다 HBO의 ROME이 나오면서 진짜 로마사람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을 주인공들이 보여주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반면 국내 사극 영화와 드라마는 고풍스런 (사실 시대적으로는 정체불명인) 사고방식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던 시절에는 아줌마, 할머니들의 드라마였지만 갑자기 주인공들이 옷만 한복을 입었지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행동하자 젊은 층에 어필하게 됩니다. 


그간 국내 번역문학은 남의 것 베낀 것이나 그냥 해당 외국어 좀 잘한다고 번역한 것을 제외하면 주로 시대적 언어와 관념에 충실하게 (마치 해당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원서로 볼 때 느끼는 느낌이 재현되게) 번역된 것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위대한 개츠비” 정도의 소설이 김영하 스타일로 나온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니 극히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특히 덕분에 재미 있게 보고 관심이 있다면 김욱동 번역의 민음사본을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김영하의 번역을 추천하는 이유는 “위대한 개츠비”는 결국 미국의 돈 많은 젊은 친구들의 치기어린 (물론 자기들은 심각하고 결국 심각하게 마무리되지만) 치정극이고 그 점에서 김영하의 번역이 매우 전달력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김영하가 “위대한 개츠비”를 멋지게 요약한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이란 표현은 정말 적절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냥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떨어진 자리도 아니고 “명중한” 자리라는게 의미심장하죠. 쏜 사람에 입장에서는 그 의도와 달리 목표에 맞지 않았지만 화살의 입장에서는 무엇엔가 제대로 박혔으니 명중한거고, 그렇게 의도와는 달리 날아가 “명중”하는 것 그게 결국 인생이니까요.


MF[ME]


*참고로 문학동네의 “위대한 개츠비” 반양장본은 영문판을 끼워주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더 클래식” 스타일의 수법인데 이런식의 마케팅은 많이 아쉽습니다. 더구나 국내에 영문으로 볼 사람 그리 많지 않고 그렇다면 그냥 종이 낭비요, 환경파괴니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