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B와 음악에 대한 통화를 하다 생각난 얼마전 어떤 대화에서 발췌 (기억에 의한 재구성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아래와 같은 대화가 오갔음)
A : 넌 전에 요즘은 음악지도 안보고, 음반에 대한 리뷰도 읽지 않으며 음악에 대해 이런 저런 이론적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을 만나기 보다 눈물을 흘리거나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훨씬 즐겁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소위 ‘동시대성’을 이야기 하면서 당대와 배경에 대한 지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인 것 같은데?
만술 : 내가 말한 ‘눈물을 흘리거나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사람으로 읽혔다면 내 표현이 문제겠지만, 내 의미는 소모적인 이론가적 논쟁보다는 이론과 실천이 겸비된 사람이 더 낫다는 뜻이었을 뿐이야. 지금 동시대의 음악이라면 우리에게는 이미 친숙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사전지식’이 지니는 중요성이 떨어지지만 과거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면 그 시대정신을 비롯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재해석된 미적 가치만을 탐할 수 밖에 없어.
A : 그러니까 니가 이야기하는 ‘동시대적’ 음악이란게 있냐구?
만술 : 소위 말하는 대중음악이 있잖아. 영화음악 같은 실용적인 음악들도 있고. 이들을 듣기 위해 ‘아 연인들 사이에 헤어지면 이리 마음이 아프구나’ 같은 것, ‘우리 시대에는 공부 때문에 아이들이 이렇게 힘들구나’ 같은 것을 사전에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옛 음악은 전혀 다르거든.
A : 니가 말하는 동시대성의 문제는 음악만의 문제는 아니야, 현대미술이란 것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지.
만술 : 그래서 그 언어가 친숙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지. 문제는 우리가 무식하기 때문이지 예술가들이 잘못하기 때문은 아니야. 우리가 무식해진 것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고. 예술가가 이해받으려고만 예술을 할 수는 없지. 그러면 예술의 존재 가치가 없어져. 과거에는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이 당연한 것이었고, 때문에 동시대적 예술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교육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예술과 일상인은 동시대를 마치 평행우주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아.
A : 난 오히려 우리시대가 예술이 교육의 덕을 많이 보는 것 같은데? 불과 10년전이라면 이름조차 언급 안되던 음악가들의 음반이 나오고, 수없이 많은 바흐의 연주들이 있고, 미술도 과거의 거장의 그림들이 지금처럼 대접 받은 적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야.
만술 : 맞아. 그리고 그게 웃기는 이야기라고. 난 <최후의 만찬>에 덫칠했던 사람들이, 바흐가 죽자마자 내평겨쳤던 사람들이 오히려 이해가 간다고. 그들은 그들 시대의 예술이 있었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란 것을 알았던거야. 당대의 예술을 향유하기에도 벅찼지. 우리는 요즘 열풍이 불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지정하듯 그냥 그 예술들을 우리 삶과 전혀 상관없는 문화재로 취급할 뿐이라구.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지 않게 된 순간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고 그냥 ‘과거’일 뿐인 것처럼 예술도 마찬가지야. 그 ‘동시대성’을 살리려면 현재적으로 재해석 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과거로 갈 수밖에 없어.
A : 들락날락 하니까 그 꼴 나잖아. 아무튼 그래서 바흐 칸타타를 가디너 스타일로 듣는거야?
만술 : 숭례문은 ‘문 시뮬레이션’을 했을 뿐이니까 진짜 문이 아니었지. 그리고 어쩌먼 진짜가 아닌 흉내내기를 하다보니 발생한 문제었을 수도 있고. 바흐 칸타타 이야기는 잘 했는데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각각의 종교일의 의미와 기원, 역사를 공부하고 현대의 변형까지도 공부하고 듣고 있는데 비록 무신론자지만 듣는 순간 만큼은 바흐 시대의 루터교 신자로서 그 교회에 앉아 있다고 느끼려고 노력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냥 아름다운 음악일 뿐이야. 바흐 아니라도 아름다운 음악은 널려 있고. 나도 ‘아름다움’에 경도된 접근을 반대하지는 않아. 그게 예술을 처음 접하기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하지만...
A : 니 이야기를 들으면 현대 예술은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것 같아. 어쩌면 대중은 동시대성을 원하지도 않을 지도 모르고. 그나마 동시대적인 예술이었던 영화도 이제 완벽하게 대중적 영화와 예술로서의 영화가 분리되어 버린 것 같고 말이야.
만술 : 어쩌면 이게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일지도 모르지. 나증에 우리 국악사 교과서에는 2000년대 국악의 역사로 소녀시대를 다루어야 할지도 몰라. 사실상 그 노래들이 우리시대의 국악이잖아.
A : 우리시대의 미술사에는 웹튠이 나와야 겠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데 바흐의 음악이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요즘에 와서 비로서 ‘동시대적’이 되는 건 아닐까? 마찬가지로 현대음악도 몇십년, 몇백년 후에 ‘동시대적’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만술 : 바르트! 아감벤! 바흐는 당대에도 동시대적이었어. 미치거나 엉망인 예술가가 아니고는 동시대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생각해. 음악으로 따지자면 연주가 불가능하고 동료들 조차 뭔소리인지 모르는 곡을 작곡했다면 그 작곡가가 정상인 사랑이겠냐고? 지금 바흐가 마치 동시대적으로 들린다면 그건 바흐에 대한 연구로 우리가 그 시대에 동조가 되었거나 그 시대를 이해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바흐 음악의 일부에서 우리시대와의 동시대성을 발굴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발굴의 대부분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고.
A: 동시대성은 니말대로 현재에 깨어있거나 과거로의 고고학적 회귀를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데 작금의 상황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치중되어 있지. 후자에 치중되어 있는게 문제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재적으로 바흐를 듣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만술 :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을 이야기한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아? ‘고고학’이 제대로 기능만 한다면 과거에서 우리에게 전파할 수 있는 ‘동시대성’을 발굴해 낼 수 있는 것이고 옛 음악에 대한 탐구의 의미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다만 그 탐구를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고 공부 없이는 ‘아름다움’ 그것도 매우 현재적인 의미의 기준에 맞춰진 ‘이지리스닝’으로서의 아름다움만 발굴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거고.
[더 길어지면 재미 없으니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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