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평생의 과업이 될지 모를 셰익스피어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인 조르디 사발의 멜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음반, 그리고 원작자인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관련글 1 / 관련글 2 / 관련글 3)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다시 읽고, 조르디 사발의 음반을 들은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글을 올리지 못했던 것은 막상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멘델스존의 음악을 역사라는 범주와 묶어 소개하기에는 접점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과 낭만주의 시대 독일을 역사라는 주제로 엮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는 생각에 역사와 음악이라는 시리즈를 벗어나 문학과 음악의 관련만 이어나간다면 훨씬 쉬운 일이겠지만 말이죠. 그렇다 보니 조금은 매끄럽지 않은 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표지 그림
- 조르디 사발의 한여름 밤의 꿈 : 존 시먼스 / 잠든 티타니아, 한여름 밤의 꿈 2막 2장의 한 장면 (1873년 / 개인소장) / 종이에 연필과 수채(아라비아고무 혼합), 불투명 수채 물감으로 하이라이트 / 발췌
음반의 표지 이미지는 비슷한 작품을 몇 작품 남긴 영국의 화가 존 시먼스의 그림 잠든 티타니아에서 외쪽 절반 정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수채 이미지가 요정 숲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이 작품은 크리스티 등의 경매에 나와 개인 소장 중입니다.
- 옥스퍼드 에디션 : 제프 스피엘만 / 사진가의 선택 / 사진 / 게티 이미지
셰익스피어와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
역사책은 물론 다양한 창작물로 다루어진 튜더 왕조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역사 이야기를 블로그에서 다루는 정도로는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역사적 사실과의 부합은 뒤로 차치하더라도) 차라리 튜더스 같은 드라마나 영화 엘리자베스, 골든 에이지 또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같은 것을 보는 것이 더 흥미롭고 유익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사건에 휘말렸다거나 한여름 밤의 꿈이란 작품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니므로 사건의 적시는 이글과 접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한여름 밤의 꿈이 비록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공간을 빌려왔지만, 실상은 16세기말 엘리자베스 1세 치하 영국의 궁정 문화, 처녀 여왕의 신화, 그리고 남성 중심 사회와 강력한 여성 군주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교묘하게 녹여낸 시대적 거울과 같은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당대 시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또 다른 장기집권 여왕의 이름을 딴 빅토리아 시대와 함께 한 여왕의 이름이 한 시대를 정의할 정도로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시대라면 말이죠.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요긴하고 흥미로운 책은 전에도 언급한 이언 모티머의 The Time Traveler's Guide to Elizabethan England 입니다. 이 책은 풍광(landscape)에서 시작해서 유흥(entertainment)까지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서 엘리자베스 시대를 충실하게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풍광 - 그 시대에는 종합적인 의미의 풍광이나 풍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숲, 들판, 강, 길 같은 각각의 요소만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이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엘리자베스 시대 후기에 가서야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 시대에는 풍광이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는데, 인구의 증가, 굴뚝의 도입 등으로 도시의 풍광과 규모가 많이 변했습니다. 농촌지역은 방목을 위한 울타리들이 형성되면서 풍광이 변화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 우리말로 여왕과 왕비로 모두 번역될 수 있는 Queen의 지위를 누린 엘리자베스는 여성이었기에 완벽한 왕(King)도 그렇다고 왕의 배우자로서의 왕비(Queen)도 아닌 묘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아버지인 헨리 8세와는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최고 수장(Supreme Head of the Church)이 아닌 교회의 최고 통치자(Supreme Governor of the Church)로 군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리고 여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따른 트라우마는 그녀의 권위에 대한 집착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것보다 용서받을 수 없었던 일은 그녀의 여왕으로서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종교적 경직성과 카톨릭 등에 대한 박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그녀는 수많은 왕실행차와 화려한 치장으로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지원, 총애하는 귀족들을 갈아치우고, 서로 간에 총애를 얻기 위해 경쟁하도록 부추긴 행동들도 이 권위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왕은 이런저런 행차를 통해서도 그 권위를 드러냈는데, 한번 행차에는 2,400마리 정도의 말이 끄는 3~400대의 마차가 동원되었습니다. 여왕을 위해서는 탑승용 마차 외에 예비 마차, 여왕과 시녀들을 위한 화장실을 탑재한 특수 마차까지 활용되었습니다.
사람들 - 엘리자베스 시대는 급격한 인구 증가의 시대로 집권 초기와 비교하면 마지막에는 30%의 인구증가가 있었습니다. 이런 인구증가의 원인은 풍족해진 식량 공급과 그로 인해 건강의 증진과 출산의 증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인구구성도 지금에 비한다면 엄청나게 젊어서 16세 이하 인구의 비중이 무려 36%나 차지했고, 60세 이상 인구는 7.3%에 불과했습니다. 나이의 중윗값도 22세로 그야말로 젊은 영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른 은퇴는 생각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 60세까지 남자는 밀리샤에 봉사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계급과 사회적 위상의 괴리가 발생하여 혼재된 사회환경이어서 귀족이라고 부자는 아니고, 부자라고 높은 신분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결국 젠트리의 부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성 - 여왕이 널리 사랑받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집권기에도 여성의 지위는 열악했습니다. 남편에게 버려지거나, 남편이 실종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만 지속되어도 여성이 가난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아 재혼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여성이 생계를 꾸리는 일은 쉽지 않았으니까요. 여성은 혼전에는 아버지의 소유였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소유였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홀로 사업을 시작할 수는 없지만 남편과 함께 시작했다면 남편의 사후에도 그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했으니까요. 그리고 혼전에 아버지 밑에서는 꿈꿀 수 없는 생활을 결혼 후에는 그 가정에서 2인자로서 누릴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가정은 핵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결혼은 완전한 독립을 의미했고, 남편이 누리는 모든 혜택과 지위를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2인자의 지위는 1인자인 남편과 극명한 위계상 차이가 있기는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합법적으로 구타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편 누군가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그의 부인까지 초대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달리 당시 혼인은 남자는 28세, 여자는 26세 정도가 평균 연령이었습니다. 지위가 낮은 여성의 경우에 그 처지는 매우 열악해서 주인 남성이 여성 하녀와 성관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사회상 - 중세가 개인의 의지보다는 신의 심오한 뜻이 중요했다면, 엘리자베스 시대는 종교적인 경직성과는 별개로 행동의 책임과 성과가 개인으로 넘어온 시대였습니다. 그렇다고 개인의 도덕이 더 타락하거나 증대한 것은 아니라서 살인, 강간, 강도 같은 중대범죄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고문은 오히려 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필요악으로 자리 잡았고, 연줄이나 현금을 받고 누군가를 석방하거나 봐주거나 하는 일은 부패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자베스 시대는 이런 인맥이 중요한 사회였습니다. 좁은 사회의 특징은 foreigner를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고장 사람에게 사용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인은 alien이라 불렸으니 이 시대 사람들에게 자신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좁은 세상이었기에 (우리나라가 70년대 까지 그랬던 것처럼) 물건을 사고 장부에 달아놓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관점도 중세와는 현격히 달라져서 중세시대의 사람들은 본인들이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와 같은 시대를 산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람들은 이제 그 시대는 지나가버렸다고 인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시대적 역동성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그 역동성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을 살해하는 것은 작은 반역의 행위로 생각되어 여성의 경우는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교육과 출판 - 기존의 출판이 라틴어로 쓴 학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면,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영어로 된 다양한 생활 밀착형 책들이 출간되어 예전과 달리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실생활의 도움은 물론 돈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양가집 여성은 춤, 바느질, 류트나 버지널 같은 악기 연주,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같은 것을 배워야 했고, 남성은 춤, 펜싱, 승마, 수영 등 모든 분야에 능통해야 했습니다. 학생은 아침 6시나 7시부터 무려 10시간 동안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고, 14세에 기초교육을 마치면 옥스퍼드나 캠프리지 같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이 시기의 여유 있는 계층의 젊은이들은 이탈리아나 독일로 소위말하는 그랜드 투어를 다녀와서 견문을 넓혔습니다.
위치크래프트 - 엘리자베스 시대에 점성술, 연금술은 과학이었고, 위치크래프트는 지역에 따라 성폭력, 예배 불출석, 폭행에 이은 범죄로 법령에 명기될 정도로 실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처벌은 흔히 아는 것처럼 화형이 아니라 교수형이었습니다. 마녀/남을 화형에 처하는 것은 대륙의 전통이었고,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만 행해졌던 일입니다. 화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다스렸다는 것은 마녀/남임이 종교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범죄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어서 이론상으로는 마녀/남이자 기독교도일 수 있었습니다. 위치크래프트 행위로 지목된 사람들의 90%가 여성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Witch(craft)를 단순히 마녀로 부르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만 행위/신념과 행위자를 구분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위치크래프트로 번역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선택인 듯합니다. (사술(邪術)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영국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문제와 별개인 범죄행위로 보았기에 이런 번역은 종교적 편견이 덧씌워진 듯해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언어 - 셰익스피어 원전 읽기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데이비드와 벤 크리스털의 Shakespeare's Words: A Glossary and Language Companion이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경우에도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어는 현대 영어와 많이 다르기 때문인데, 앞선 글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단어의 용례뿐 아니고 철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u와 v는 대부분 혼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의 사용이 점점 늘고는 있었지만, 식자층에서는 로마 숫자가 아직 강세여서 회계장부는 로마 숫자로 기록했고, 일부 식자층은 아예 아라비아 숫자는 못 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종이의 질이 형편없었던 관계로 오래 보관해야 하는 계약서 같은 법률 문서는 양피지에 기록했고, 종이는 편지 같은 가벼운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호칭 - 평민은 Goodman/Goodwife로 불렀습니다. 작위가 없는 Gentlman은 Mister로 호칭했고, 기사작위를 받았다면 Sir로 호칭했습니다. Mister의 여성형은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Mistress였습니다. 물론 직접 대면하고 부르는 경우에는 madam이라는 호칭을 써야 했습니다. 자신보다 높은 계층의 여성에게는 My lady나 your ladyship을 썼습니다.
시간 - 중세에는 해가 떠있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의 구분이 가장 중요했던 바, 계절에 상관없이 낮과 밤을 각각 12시간씩 나누어 사용했기에 여름에는 낮의 한 시간이 밤의 한 시간보다 훨씬 길고, 겨울에는 반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교회의 시계탑과 교회의 종소리를 통해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정확한 시간을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대의 시계탑은 시간을 표시하는 바늘 하나만 있었지만 말이죠. 이렇게 교회가 지역사회의 시간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은 시간이란 것이 공공재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개인적으로 시계를 갖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고, 누구나 교회의 시계에 맞춰 모든 생활을 해야 했죠. 날짜는 두 가지를 사용했는데,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달력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위를 기준으로 한 달력이 모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날을 우리처럼 6월 20일 같이 지칭하기보다는 처서(處暑) 다음날 같은 식으로 지칭(물론 처서가 아닌, 그보다 더 오락가락하는 종교 행사를 기준으로) 했기에 현대에 와서 정확한 날짜를 산정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교통과 여행 - 영국 시대극에서 보는 마차로 이동하는 행위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집권 후 유럽으로 도피를 했던 프로테스탄트들이 복귀를 하면서 유럽에서 유행하던 마차를 영국에 들여오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고려나 조선의 역참제(驛站制)와 유사한 포스트(Post)가 있어 말을 빌리고 다음 포스트에 반납하거나 우편물을 배송해서 비용을 절감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여행이 가능했습니다. 물론 많은 경우 도보로 이동했는데, 이 경우에는 특히 안전을 위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노상강도(highwayman)를 만나게 되면 속옷을 제외한 말과 물건, 옷가지까지 모두 뺏기고 길에서 벗어난 곳에 버려지며 한 시간 뒤에 움직일 수 있다는 지시를 받습니다. 이후 걸어서 여관까지 걸어서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연극과 극장 - 부랑자(vagabond)는 범죄자로 여겨졌기에 유랑극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부랑자로 여겨질 수 있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영주의 허가를 득한 극단임이 중요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궁내부장관 극단(Lord Chamberlain's Men) 같이 말이죠.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Shakespeare in Love)에서 나오듯 여성은 연극무대에 설 수 없었기에 남성/소년이 여성의 역할을 맡아 연기했습니다. 16세기 영국의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유흥의 장소는 에일하우스(Alehouse)와 여관(Inn)이었습니다. 에일하우스/선술집(Alehouse)은 노동자나 서민들이 모여 에일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곳으로 소규모 유랑 극단이나 악사들의 공연이 열렸지만, 공간이 협소하여 본격적인 연극을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반면 여관(Inn)의 안마당 (Courtyard)을 이용한과 인야드 극장(Innyard Theatre)은 연극에 최적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관은 보통 사각형의 커다란 안뜰을 중앙에 두고 객실이 이를 ㄷ자나 ㅁ자로 둘러싼 형태로 극단이 안마당에 임시 무대를 설치하면, 평민들은 안마당에 서서, 귀족이나 부유층은 여관 2층과 3층의 발코니에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여관이라는 특수한 장소성, 그리고 유흥이라는 특징 덕에 인야드 극장은 숙박, 음주, 도박, 연극이 한데 어우러진 엘리자베스 시대 유흥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이점은 런던 시 당국과 청교도 세력에게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1574년 여관에서의 연극공연에 대한 규제법안이 제정됩니다. 그리고 이 규제는 배우이자 레스터 백작 극단(Leicester's Men)의 기획자였던 제임스 버배지(James Burbage)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데, 런던 시장의 행정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런던 시 성곽 밖의 구역의 땅을 임대하여 오직 연극 공연만을 위한 목적의 상설 극장을 건설합니다. 그는 이 건물에 고대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영감을 받아 더 시어터(The Theatre)라는 직관적인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제임스 버배지의 아들인 리처드 버배지가 더 시어터의 목재를 해체해 템스강 남쪽 뱅크사이드로 옮겨 건설한 것이 바로 글로브 극장입니다. 글로브, 그리고 이어지는 블랙 프라이어가 셰익스피어의 주무대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한여름 밤의 꿈의 시대적 함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은 고대 아테네의 네 명의 연인의 이야기와 요정의 숲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낭만적인 환상 희극이지만, 막상 이런 연극을 기대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공연을 보다가 아이들이 충격을 받는다는 몇몇 이야기들처럼, 단순한 요정 동화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 이면에는 현대에도 다양한 연출적 함의를 적용할 수 있는 성적, 폭력적 코드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정치적 상황, 군주의 정체성, 그리고 당대의 실제 사건들이 정교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2막 1장에서 오베론이 퍽에게 바다 위의 고래 등에 탄 인어와 서쪽의 정결한 처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1575년 여왕의 총신이자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로버트 더들리)이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청혼하기 위해 영지인 켄트워스 성에서 19일 동안 개최한 거대한 호수 축제의 한 장면을 오마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베론의 대사에 나오는 서쪽의 처녀는 평생 독신을 고수하며 자신을 국가와 결혼한 처녀 여왕(Virgin Queen)으로 우상화했던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명백한 헌사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요정 여왕 티타니아를 엘리자베스 여왕과 동일시한다면,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갈등은 여성군주에 복종하면서도 느꼈을 남성 신하들이 느꼈던 가부장적 불안감을 상징할 수 있으며, 티타니아가 마법에 걸려 당나귀 머리를 한 하급 계급인 '보텀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은, 당시 60대에 접어든 노년의 여왕이 프랑스의 앙주 공작 등 어울리지 않는 젊은 외국 구혼자들과 염문을 뿌리거나, 총신들과 보여준 기묘한 애정 행각을 풍자적으로 비틀어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대 귀족들은 혼인을 위해서는 여왕의 승인이 필요했는데, 라이샌더와 헤르미아의 야반도주는 당대 귀족 청년들이 직면했던 이러한 삼엄한 현실적 압박을 배경하며 셰익스피어는 이를 요정의 장난이라는 환상적인 장치를 통해 희극적으로 해소하고, 극의 초반에 법의 엄격한 적용을 이야기하던 테세우스가 결말에 가서 법의 엄격한 적용을 철회 한 뒤, 연인들을 축복함으로써 율법의 칼날보다 군주의 자비와 관용이 더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통해 여왕의 통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왕은 법과 여왕의 권위를 위해 교수형을 선고/집행하고 마지막 순간에 풀어주는 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셰익스피어 - 영원한 동시대성
한여름 밤의 꿈 곳곳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대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정한 위대함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낮은 시대 의존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의 비평가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를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한 사람이라 평했고 살제로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은 스토리텔링이나 개성 있는 캐릭터를 창조한 데 있다기보다는 특정 시대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인간성을 창조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특유의 극히 제한된 지문은 작품에 동시대성을 부여하는 결정적 장치가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빈약한 지문은 후대의 연출가와 독자들에게 해석의 주도권을 넘겨주기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에 고정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매 세대가 자신들의 자아와 시대상을 투영해 새롭게 완성해 낼 수 있는 열린 무대가 됩니다.
한여름 밤의 꿈의 경우에도 1막 1장에서 테세우스가 아마존 여왕 히폴리타에게 "칼로 상처를 입혀 사랑을 얻어냈다"고 말할 때, 히폴리타가 어떤 표정과 태도를 취하는지 지문이 전무하기에 현대의 연출가들은 히폴리타를 순종적인 신부가 아닌, 가부장적 권력에 분노하는 여성으로 설정해 작품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등장인물들과 달리 디미트리어스는 끝내 마법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헬레나와 맺어지는데, 이 역시 해피엔딩인지 아니면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둔 채 환각에 빠져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는 비극인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이처럼 명확한 정답이나 당대의 윤리관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 셰익스피어 특유의 모호함과 열린 구조는, 훗날 이 텍스트가 국경과 시대를 넘어 전혀 다른 사조의 상징으로 부활하는 계기가 됩니다. 18세기말, 프랑스 고전주의의 엄격한 이성주의에 답답함을 느끼던 독일의 지식인들에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야말로 해방의 공간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
멘델스존이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읽고 서곡을 작곡한 것은 17세이던 1826년의 일입니다. 처음 작곡할 당시 서곡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이 제목은 오페라나 극 부수음악의 막전 음악이라는 의미보다는 일종의 교향시로도 사용되던 시절이라 추가적인 곡을 작곡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소년 멘델스존이 읽고 느낀 한여름 밤의 꿈을 곡 하나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곡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발전한 것은 15년 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독일어 번역본을 위한 극 부수음악(요즘으로 말하면 OST)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8곡의 극 부수음악과 5개의 멜로드라마로 구성된 한여름 밤의 꿈이 탄생하게 됩니다.
멘델스존이 작곡한 한여름밤의 꿈이 사실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기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를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으로부터 낭만주의 시대 독일로 초대합니다. 산업화와 민중의 계몽을 말하던 이 시기 독일의 시인과 예술가들은 오히려 자연의 비밀이라는 낭만에 천착하기도 했고, 숲 속의 요정 이야기는 이런 낭만적인 서사에 적합한 재료였습니다. 멘델스존이 드라마로 만든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아닌 프로이센의 학자이자 시인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Schlegel)이 1797년에 발표하여 그 이후로 독일의 셰익스피어 이미지를 형성한 번역본이었습니다.
슐레겔은 독일 내에 셰익스피어 열풍을 일으켜 셰익스피어를 사실상 국민작가 수준으로 올려놓는 데 기여를 했습니다.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 전집이 독일어로 완역되는 서막이었으며,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에 독일 낭만주의의 정신을 불어넣었습니다. 슐레겔은 독일어를 세계 최고의 문학을 하나로 모으고 보존하는 이상적인 언어라 생각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 문학의 중요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도록 작가와 학자들을 설득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와 이상주의로 스스로 시작한 첫 작품이 한여름 밤의 꿈입니다. 슐레겔의 영어 실력이 완벽하다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문학적으로 완벽한 번역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에 걸맞은 새로운 창조를 원했고 이런 재창조를 통해 원작이 지닌 본질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영어실력은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슐레겔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본질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가 중요시 생각한 것은 원작의 운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라면 의미의 변화는 문제 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원작의 농담은 상당수 제거됩니다. 즉, 앞서 말한 한여름 밤의 꿈의 시대적 함의는 완전히 제거된 독일 낭만주의 작품이 된 것이죠. 그는 1797년, 셰익스피어의 전기를 편찬하려던 루트비히 티크(Ludwig Tieck)에게 "나는 당신이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기를 바란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 슐레겔의 독일어 판본에 근거하여 작곡한 것이 멘델스존의 작품인데,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유명한 지휘자가 된 멘델스존을 궁정에 고용하고 포츠담의 궁정 극장(Schloss-Theater)을 위한 부수 음악을 작곡하도록 의뢰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슐레겔과 독일의 셰익스피어에 대해 견해를 나누었던 시인이자 극작가 루트비히 티크의 셰익스피어 극을 보고자 했고, 티크는 멘델스존의 서곡에 추가하여 합창, 간주곡, 유명한 결혼 행진곡, 독창, 그리고 배우들이 음악에 맞춰 대사를 읊는 멜로드라마로 구성된 슐레겔 번역본에 의거한 한여름 밤의 꿈 부수 음악 전체를 작곡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티크가 멘델스존에게는 알리지 않고 마지막 막들을 단축한 데다 왕이 연극 중간에 성대한 만찬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전체가 작곡된(through-composed) 연극을 만들려던 멘델스존의 아이디어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현재와 같은 상태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멜로드라마라는 형식이 이제는 낯선 과거의 유산이 된 현실과 맞물려 한여름 밤의 꿈 부수 음악은 전곡 연주보다는 주로 발췌 연주로만 만나게 되었습니다.
조르디 사발의 음반
조르디 사발의 음반은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발췌가 아닌 온전한 형태로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4장의 하이브리드 SACD에 셰익스피어의 원문에 따른 영어버전 전곡 녹음 / 슐레겔의 독일어 번역본 전곡 녹음 / 영어 연주회 버전 / 독일어 연주회 버전을 각각 담고 있어 감상의 폭을 넓혀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멜로드라마 버전의 경우, 참여한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좋아 꼭 한 번은 멜로드라마 전체를 영어 및 독일어 버전 모두 들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이 음반은 단순히 여러 판본의 음악을 모아놓은 물리적 모음집이라기 보다는 언어의 차이를 넘어 앞서 설명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셰익스피어와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셰익스피어를 멘델스존의 음악이라는 환상적 매개체를 통해 동시에 경험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부록 -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음악
엘리자베스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를 단 한 명만 뽑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곡가이자, 류트 연주자이자 가수였던 존 다울런드/다울랜드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울런드는 엘리자베스 여왕 재임 기간에는 왕궁에 발을 들이지 못했고, 제임스 1세 즉위 후에야 궁정 음악가가 될 수 있었기에 보통 어떤 시대를 보통 궁정 음악가가 대표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표 음악가지만, 대표적인 궁정 음악가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것이 1563년이니 다울런드는 1564년에 태어난 셰익스피어와 거의 완벽하게 동시대를 살아간 예술가입니다. 어린 시절 프랑스 주재 영국대사의 하인으로 파리에서 머물면서 음악을 공부했지만, 이때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것은 향후 영국에 귀국한 뒤 그의 앞날에 장애가 됩니다. 작곡가와 류트연주자로 영국 내에 명망이 증대되어 갔음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궁정에 기용될 전망이 희박해지자 다울런드는 이탈리아로 긴 유랑을 떠나 로마, 베네치아 등에서 다양한 음악가들과 접촉합니다. 이 와중에 피렌체에서는 여왕에 대한 반역 음모에 말려들 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596년 궁정에서의 자리에 대한 희망적인 전망에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실망적이었습니다. 결국 다시 유랑을 떠난 다울런드는 1598년 덴마크 궁정 류트연주자로 기용됩니다. 하지만 근무태만과 부채의 증가로 얼마못가 해임된 뒤 1608년 다시 영국으로 귀국해 이번에는 (제임스 1세의 즉위로) 영국 왕실이 자신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기를 기대했으나 여전히 그는 왕실에 기용될 수 없었습니다. 다울런드는 거의 말년에 달하는 1612년에 가서야 제임스 1세의 궁정에서 류트 연주자로 기용되어 1626년 사망할 때까지 재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런 인생 역정과 대표작인 Lachrimae of Seven Teares 및 그로 인해 파생된 음악들과 같은 눈물과 연관된 음악을 연결 지어 다울런드는 잉글랜드의 오르페우스라는 별명도 얻게 됩니다. 헌데 회자되는 전설은 전설일 뿐 - Lachrimae of Seven Teares의 서문에서 다울런드는 오히려 눈물은 슬픔의 눈물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쁠 때도 흐르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604년 덴마크 궁정에서 일하던 시절에 완성한 작품으로 원제는 Lachrimæ, or seaven Teares figured in seaven passionate pauans, with diuers other Pauans, galliards and Almands, set forth for the Lute, Viols, or Violons, in fiue partes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대에는 u와 v를 교차해서 사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pauns는 pavans(파반느)로 읽으면 되고, 다른 부분도 그렇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라크리메(눈물), 또는 일곱 개의 열정적인 파반느로 형상화한 일곱 눈물 — 그 밖에 여러 파반느, 갈리아르드, 알망드를 포함한 류트와 비올, 또는 바이올 계열 악기를 위한 5 성부 작품집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다울런드의 기악 앙상블을 위한 유일한 작품집인 라크리메, 일곱 눈물은 그가 예전에 작곡한 성악과 류트를 위한 곡이나 류트를 위한 곡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류트를 위한 파반느 곡인 라크리메인데, 당대에 이미 인기를 끌었던 이곡은 이미 다울런드 자신이 흘러라 나의 눈물(Flow my Tears)로 성악과 류트를 위한 곡으로 편곡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앙상블을 위한 5 성부 음악으로 완전히 재편되어 곡들 듣는 감상은 전혀 다릅니다. 이 작품집을 감상함에 있어 가장 추천하는 음반은 역시 조르디 사발과 헤스페리옹 20의 음반입니다. 조르디 사발은 비올 전문 연주자답게 아름다운 비올 연주로 다울런드와 엘리자베스 시대로 감상자를 서서히 침잠시킵니다.

표지그림 - 에두아르 시보, 체포 직후 런던탑의 앤 불린 (1835년 / 롤랭 미술관 / 프랑스, 오탱 / 캔버스에 유채) 일부
다울런드가 비록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실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튜더 시대를 눈물과 연관 짓는다면 그러면서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직접적인 접점을 찾고자 한다면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앤 불린 보다 더 좋은 대상은 없을 듯합니다. 앤 불린이 런던탑에 수감된 직후의 모습을 묘사한 에두아르 시보의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링크의 글을 보시면 됩니다. (링크글 보러가기)
다울런드 외의 엘리자베스 시대의 작곡가들의 콘소트 음악을 다룬 조르디 사발의 음반은 아래 음반 표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알베르티 파르손스, 스트로저스 등의 곡을 담고 있습니다. 이 콘소트 음악들의 역사는 비올(viol)이라는 악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비올은 스페인의 탄현악기인 비후엘라(vihuela)가 찰현악기로 변화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유럽의 궁정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영국에는 1540년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 악사들이 헨리 8세의 궁전에 도착하면서 전파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파 초기에는 엘리자베스 시대 궁정을 중심으로 전문 작곡가와 악사들의 곡과 연주로 소개된 뒤, 1600년대에는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사발의 음반은 이 중 엘리자베스 시대 궁정에서 연주되었던 음악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표지그림 - 루이 드 카울리(Louis de Caullery), 앙리 4세 궁정의 무도회 (렌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Rennes), 프랑스 렌 / 패널에 유채) 일부
루이 드 카울리는 궁정의 연회, 카니발, 불꽃놀이 등 다양한 장면을 흥미롭게 담아낸 화가입니다. 음반 표지는 앙리 4세 궁정 무도회 장면에서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악사들을 발췌하여 사용했는데, 이 표지와 관련해서도 위 다울런드 음반 표지처럼 조금 할 말이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흥미보다는 미술사적 흥미인데, 관심이 있으시면 링크를 이용해 관련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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