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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역사와 음악 시리즈

[음악]역사와 음악 (13) 나폴리 왕국의 역사와 발렌시아의 음악 - 칼라브리아 공작의 노래집 (Cancionero del Duque de Calabria)

by 만술[ME] 2026. 2. 4.

조르디 사발의 음반을 역사와 엮어 소개하는 시리즈를 진행하게 되면서 가지고 있는 사발의 음반을 책장 한쪽에 모아두고 있는데, 그렇다 보니 역사적 맥락과 딱히 엮기 애매한 음반들도 함께 놓여 있습니다. 사발이 알리아-복스에서 전곡 녹음을 내기 전에 발매한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같은 음반을 나폴레옹과 엮어 소개하는 식으로 한다면야 확장성이 무궁무진하겠지만 그런 종류의 글이야 차고 넘치고, 구태여 조르디 사발의 음반을 골라 그런 글을 쓰는 것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제가 생각하기에 이 음반을 위해 따로 공부하거나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생각되지만, 다른 음반들과 함께 한 곳에 모아 놓았으니 막간을 이용해 쉬어가는 의미로 들어보자고 생각한 음반 중에 하나가 예전에 아스트레 레이블로 나왔던 음반 네 종을 묶어 (사발이 창단한)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 창단 25주년 기념 음반으로 2013년 알리아-복스 레이블로 재발매한 음반이었습니다. 음반 두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600쪽이 넘는 6개 국어로 된 책자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딱히 글감이 될 일은 없이 음악만 듣는 시간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자를 읽고 첫 음반인 칼라브리아 공작의 노래집을 들으면서 노래집의 공작인 칼라브리아의 공작이자 나폴리왕국의 비운의 왕세자인 페르디난도의 이야기를 나폴리 왕국 이야기 전반과 함께 엮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폴리 왕국에서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열리게 된 이야기는 이미 알폰소 5세 시대의 몬테카시노 노래 모음집에 대한 소개글에서 다룬 바 있어 역시 노래집인 칼라브리아 공작의 노래집과 엮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그럴듯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세트의 두 번째 음반인 마테우 플레차의 엔살라다 모음집 또한 플레차가 한때 칼라브리아 공작의 발렌시아 궁전과 연관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좀 더 이야기의 확장도 가능합니다. 여기에 세 번째 음반인 바르토메우 카르세레스(Bartomeu Cárceres)의 빌란시코와 엔살라다 모음집도 이 시대 발렌시아의 노래를 모아 놓은 음반이니 내용에 추가할 수 있어 결국은 나폴리 왕국의 역사에서 시작해서 칼라브리아 공작 집권기 발렌시아의 음악적 전성기를 다루는 내용으로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까지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유명한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인데, 이 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남부(로마와 그 주변을 아우르던 교황령에 이르는 범위)를 아우르던 하나의 시칠리아 왕국이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이 배경에는 시칠리아 왕국을 지배하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갈등하던 교황들이 있는데, 시칠리아 왕국을 조카인 콘라트 4세를 대리해서 통치하던 만프레디가 콘라트 4세의 사망과 그 후계자인 콘라딘의 사망에 대한 소문에 의거해 스스로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 된 뒤 콘라딘의 생존이 확인된 뒤에도 왕위에서 내려오지 않으며 이슬람 세력과 결탁해서 저항하자 교황 우르바노 4세는 프랑스의 왕 루이 8세의 아들이자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 1세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인정하겠다는 조건을 걸어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하게 합니다. 샤를 1세는 만프레디를 전쟁에서 죽이고 결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루 1세로 즉위합니다. 아울러 자신의 왕위를 주장하며 저항하던 콘라딘도 반역죄로 처형한 뒤, 프랑스 출신들의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압제를 시작합니다.

 

프랑스인들의 고압적인 통치는 곧 민중의 분노를 샀고, 이는 시칠리아 왕국 내부에 거대한 저항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잘 이용한 것이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페로 3세인데, 그는 만프레디의 딸 쿠스탄차와 결혼했던지라 잘만 한다면 시칠리아의 왕위를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물밑에서 이런 저항을 부추김 합니다. 그렇게 무르익은 분위기는 시칠리아 섬의 프랑스인들을 저녁기도 시간에 맞춰 살해했다고 전해지는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과 봉기를 일으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페로 3세는 팔레르모로 입성한 뒤 시칠리아의 왕이 됩니다. 그리하여 시칠리아를 지배하는 스페인 아라곤 왕조의 페로 3세와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지배하는 프랑스 앙주 왕조의 카를루 1세 모두 자신들의 적법성과 함께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 주장하는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의 시대가 열립니다. 다만 공식적으로야 앙주 왕조의 이탈리아 남부의 왕국의 이름도 시칠리아 왕국이지만, 흔히 나폴리 왕국으로 불리게 됩니다.

 

나폴리 왕국(보라)과 시칠리아 왕국(주황) / 이탈리아 반도 아래쪽에 칼라브리아가 보입니다.

 

 

트라스타마라 왕조

 

페로 3세의 즉위로 열린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의 바르셀로나 왕조는 쇄락을 거듭하고 결국은 단절된 뒤, 1412년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페르난도/페란도 1세가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출되어 등극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카스티야와 아라곤 모두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지배하게 되어 훗날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합, 그리고 카를 5세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난도 1세의 아들이 몬테카시노 노래집 음반 소개와 함께 이야기한 알폰소/알리폰소 5세로 그는 아버지에 이어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 됩니다. 당시 또 하나의 시칠리아 왕국인 나폴리 왕국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라디슬라오의 누나인 조반나 2세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남편인 자크 2세와의 갈등에 이어 반목하던 교황 마르티노 5세에 의해 나폴리 왕으로 추대된 앙주 공작 루이 3세가 나폴리를 침공하자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의 알폰소 5세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알폰소 5세는 루이 3세를 몰아냈고, 이에 마침 자식이 없던 조반나 2세는 이 공적에 대한 감사로 알폰소 5세를 양자로 책봉하게 되어 알폰소 5세가 나폴리의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나중에 여왕은 알폰소 5세의 야망을 막고자 이 행위를 취소하고 오히려 루이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 선언합니다. 결국 그녀의 사후 나폴리 왕국의 계승권은 또 하나의 전쟁을 불러옵니다.

 

조금만 오래 살았어도 큰 무리 없이 나폴리의 왕이 되었을 앙주 공작 루이 3세가 왕위를 물려받기 전에 사망하자 조반나 2세는 그의 동생인 르네/레나토에게 나폴리의 왕위를 물려줍니다. 하지만 알폰소 5세는 과거의 일을 들어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나폴리를 침공, 결국은 레나토를 몰아내고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여 두 개로 나뉜 시칠리아 왕국은 다시 하나의 왕국(아라곤-시칠리아-나폴리)으로 통일되고, 알폰소 5세는 자신의 왕국의 수도를 나폴리로 정합니다.

 

알폰소 5세는 동생인 추안 2세에게 아라곤과 시칠리아를, 총애하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 1세에게 나폴리 왕국을 물려줍니다. 커져가는 프랑스의 나폴리 왕국에 대한 야욕을 막으려 고군 분투하던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의 사후 왕이 된 알폰소 2세는 샤를 8세가 나폴리로 진군해 오자 1495년 아들 페르디난도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시칠리아로 도망하기에 이릅니다. 졸지에 왕이 된 페르디난도 2세는 샤를 8세에 저항하지만 나폴리를 점령한 샤를 8세는 결국 같은 해 나폴리 국왕 카를로 4세로 나폴리의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페르디난도 2세의 저항은 지속되었고, 결국은 프랑스로부터 나폴리를 수복했지만, 1496년 병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권은 알폰소 2세의 동생인 삼촌 페데리코가 물려받습니다.

 

샤를 8세의 사후 즉위한 프랑스 왕 루이 12세는 1500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의 남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비밀협약을 통해 프랑스와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이 나폴리 왕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갖기로 합니다. 이를 몰랐던 나폴리의 페데리코는 페르난도 2세의 군대를 루이 12세의 야욕을 막기 위한 지원병으로 생각해 받아들였지만, 프랑스와 아라곤은 오히려 나폴리를 협공하기에 이르고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 친족의 배신에 실망한 페데리코는 나폴리를 버리고 프랑스에 항복합니다. 

 

칼라브리아 공작 페르디난도 

 

나폴리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조 마지막 왕인 페데리코의 아들이 칼라브리아 공작 페르디난도입니다. 아라곤-프랑스의 협정에 의해 나폴리가 함락되던 시점에 이탈리아 타렌토에 있던 13세의 페르디난도는 아라곤-시칠리아의 왕 페르난도 2세에 의해 포로로 잡혀 11년간 감금 생활을 합니다. 공작이 자유를 얻게 된 것은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집권한 뒤 4년이 흐른 1523년이었습니다. 자신이 갇혀 있던 자티바에서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는 등 스페인 왕궁에 대한 신뢰를 구축한 페르디난도는 카를 5세에 대한 충성 서약과 나폴리 왕국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풀려 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쌓은 신망 덕에 그는 훗날(1526년) 카를 5세에 의해 발렌시아의 부왕으로 임명된 제르멘 드 푸아의 세 번째 남편이 되어 발렌시아의 공동 부왕이 됩니다. 제르멘 드 푸아는 삼촌인 루이 12세의 프랑스 궁정에서 자랐기에 궁정 문화에 대한 수준 높은 취향을 지녔고, 이런 점은 남편인 페르디난도 공작의 성향과 잘 맞았습니다. 

 

페르디난도 공작은 제르멘 드 푸아 사후인 1540년 16세기 스페인 르네상스 시대에서 가장 지적이고 영향력 있었던 여성 중 한 명인 세네타의 여후작(그녀의 작위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바 후작부인보다는 여후작이라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인 멘시아 데 멘도사(Mencía de Mendoza)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합니다. 첫 번째나 두 번째 부인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공작 자신도 전형적인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던 바, 그의 치세기간 동안 발렌시아의 궁전은 문화를 선도하는 곳이었습니다. 특히나 그는 자신이 자랐던 과거 나폴리 왕궁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고 예를 들어 나폴리 왕궁의 옛 장서를 페라라로부터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발렌시아가 문화적 중심이 된 것은 15세기인데, 당시 발렌시아는 아라곤 왕국의 가장 도시화되고 풍요로운 도시가 됩니다. 그리고 알폰소 5세와 아들 페르디난도 1세 시절의 아라곤-나폴리 왕궁은 교황청과 함께 음악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음악적 위상은 발렌시아에 칼라브리아 공작 페르디난도가 자리 잡으면서 더 강화됩니다. 이미 제르멘 왕비 시절 공작의 궁정 성가대는 40명이 넘는 가수와 연주자들로 구성되었고 페드로 데 파스트라나(Pedro de Pastrana), 후안 데 세파(Juan de Cepa), 마테우 플레차( Mateu Fletxa) 같은 음악가들이 궁정에서 일했습니다. 멘시아 왕비 시절에 이르면 음악가들의 규모는 더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칼라브리아 공작의 노래집 (Cancionero del Duque de Calabria)

 

발렌시아 궁정의 음악의 정수는 몇몇 노래집에서 찾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제가 새롭게 수정되고 추가된, 여러 작곡가들에 의한 2, 3, 4, 5부 노래집인 칼라브리아 공작의 노래집으로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서 발견된 이유로 웁살라 노래집이라 불기기도 했습니다. 한곡을 제외하고 노래의 작곡가가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몇몇 곡은 작곡가를 추정할 수 있는데, 플레차, 모랄레스, 카르세레스(Bartomeu Cárceres), 파스트라나, 세파 등이 추정됩니다. 

 

이 노래집은 1556년 베네치아에서 지롤라모 스코토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단순히 노래만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교육적·실용적 목적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성부, 3 성부, 4 성부, 5 성부로 구성된 다양한 노래들이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부록 및 교육 자료로 단선 성가(Plain Song) 8세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하는 초보자들을 위한 8세트의 연습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언어적 비율이 흥미로운데, 총 54곡 중 카스티야어(스페인어) 노래가 48곡으로 압도적인 반면, 카탈루냐어 노래는 단 4곡뿐인데, 이는 당시 발렌시아 궁정에서 카탈루냐어가 일상적인 용도나 토속 희극의 언어로 격하되었던 사회언어학적 상황을 반영합니다. 또한 54곡 중 12곡이 공작이 가장 좋아했던 축제인 크리스마스에 대한 노래로 압도적입니다.  

 

다른 시대도 비슷하지만 당시에도 유행하던 세속적인 노래의 가사를 종교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부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노래집의 곡들도 그러한 대상이 되어 후안 티모네다(Joan Timoneda)와 같은 시인들이 세속 곡들을 종교적인 가사로 개작하여 크리스마스 캐럴 등으로 다시 불렀습니다. 또한 이 노래집의 곡들은 악기 연주용으로 편곡되어 당대 최고의 비우엘라 거장들의 작품집에도 자주 등장하기에 이 노래집에 담긴 노래들이 당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엔살라다(Ensalada)에 대하여

 

엔살라다(Ensalada)라는 이름에서 샐러드를 생각해 낸다면 센스가 있는 분입니다. 엔살라다는 여러 가지 재료를 한데 버무린 샐러드처럼,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을 뒤섞어 만든 스페인 르네상스 특유의 다성 성악 장르로 단순히 섞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이고 유머러스한 장르로 탄생했습니다. 엔살라다는 일반적인 노래에 비해 제법 긴 편인데, 한 곡 안에서 청중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하면서 자리를 바꿉니다. 우선 언어적으로 스페인어(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심지어는 라틴어까지 한 곡에 등장하고 춤곡 같은 빠른 리듬이 나오다가 갑자기 경건한 성가풍으로 바뀌기도 하는 등 다양한 리듬의 변주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내용도 종교적인 내용을 주축으로 하지만, 일상적인 농담이나 세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는가 하면 당대에 유행하던 민요나 유명한 성가 구절을 중간중간 피처링하기도 하고 의성어를 사용해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단순한 노래보다는 극적 효과를 추구하는 노래로 하는 복합장르의 음악이었습니다.

 

엔살라다의 대표적 음악가가 두 번째 음반에서 다루는 마테우 플레차인데, 그가 엔살라다만 작곡한 것은 아니지만 플레차의 이름을 들으면 엔살라다가, 엔살라다를 말하면 플레차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작곡 기법상으로도 뛰어났지만 당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엔살라다가 독립적인 음악 장르로 취급되게 된 것도 플레차의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플레차의 음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는 1581년 프라하에서 플레차의 음악을 비롯한 악보 모음집을 출간한 같은 이름의 조카 덕입니다. 이 모음집에는 플레차의 엔살라다 여덟 곡과 함께 카르세레스 등의 당대 작곡가들의 음악, 그리고 조카 플레차 자신의 곡들이 담겨 있습니다.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 창단 25주년 기념 음반

 

아스트레 시절의 음반 중 네 장을 묶어 기념음반으로 구성한 이 세트에서 마지막 음반인 주안 세레롤스(Joan Cererols)의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Missa pro defunctis)와 전투 미사(Missa de Batalla)를 담은 음반을 제외하면 세장의 음반이 모두 발렌시아 음악의 전성기인 칼라브리아 공작 집권기의 음악을 담고 있습니다. 첫 음반은 이미 소개한 대로 칼라브리아 공작의 노래집(Cancionero del Duque de Calabria)에서 발췌한 곡들에 몇 곡의 기악곡을 첨부한 형태이고, 두 번째 음반은 공작의 궁정에서도 일했던 마테우 플레차의 엔살라다 세곡에 다른 작곡가들의 기악곡을 섞은 모음집이며, 세 번째 음반은 바르토메우 카르세레스의 곡을 중심으로 동시대 음악가들의 빌란시코와 엔살라다를 모은 음반입니다.

 

저는 시대악기로 연주하는 고음악의 감동은 녹음의 질에 따라 편차가 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음반의 녹음시기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로 제법 오래된 음원이지만, 알리아-복스의 기존 음반의 리마스터링 재발매가 늘 그렇듯 (알리아-복스는 알리아-복스 허리티지라는 레이블로 발매하고 있습니다) 이 세트의 리마스터링도 매우 훌륭합니다. 늘 그렇듯 연주도 훌륭해서 몽세라 피구에라스(Montserrat Figueras)를 주축으로 하는 노래나 조르디 사발을 주축으로 하는 기악 연주나 발렌시아 궁정의 음악적 향취와 그 정수를 듣는 이에게 전달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록 : 주안 세레롤스(Joan Cererols)의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Missa pro defunctis)와 전투 미사(Missa de Batalla)

 

시대적으로는 좀 더 후대이지만, 박스에 포함된 네 번째 음반인 주안 세레롤스의 두 개의 미사를 간략히 소개하고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 창단 25주년 기념 음반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레롤스는 1618년 태어나 1680년 사망했으니 그가 활동한 시기는 스페인 황금시대의 끝자락이라 하겠습니다. 스페인 황금시대에 다룬 모랄레스, 게레로, 빅토리아 같은 대표적인 종교음악 거장들의 뒤를 잇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는 상대적으로 음악사적 주목도 떨어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세속음악과 관련해서도 같은 글에서 소개한 노래집들의 시대에서도 뒤처지며, 이 시기에는 노래집도 편찬되지 않았습니다. 세레롤스의 악보집은 1930년이 돼서야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이에는 그가 활동했던 몬세라트 수도원에 보관 중인 문건들의 상당수가 나폴레옹 전쟁기에 파괴된 것도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음반에 수록된 첫 작품인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 간략하게는 진혼곡/레퀴엠인데 특정한 사건을 위해 작곡한 것은 아니고 일반적인 망자의 날을 위한 미사곡으로 바르셀로나에 전염병이 창궐하던 1650-1651년에 작곡되었습니다. 미사곡은 양쪽으로 나눈 두개의 합창단을 위한 곡으로 작곡되었는데, 한편에는 세 개의 중역대 성부가, 반대편에는 베이스와 다른 세 성부로 구성된 합창단이 자리합니다. 음악은 이 두 합창단의 대화로 진행되는데, 세 성부로 구성된 첫 합창단은 천상의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반대편의 네 성부는 이승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이 이승에서 천국으로 이르는 모습을 음악을 통해 구현하고 있습니다. 전투미사는 당대까지 유행하던 패로디-미사곡(주로 첫 라인을 기존 작곡가의 곡을 차용하고 이후를 오리지널 곡으로 채우는 형식의 곡)인데 펠리페 4세의 사생아인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가 나폴리의 반란을 진압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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