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TV에서 가끔 방영해 주던 영화 중에 찰튼 헤스턴과 소피아 로렌이 출연한 엘 시드(El Cid)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로드리고 디아즈 데 비바르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스페인의 역사를 모르고, 중세를 종교에 충실한 기독교-이슬람의 대립으로만 알던 어린 시절에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엘 시드가 때로는 기독교 세력에게 배척을 당하는가 하면, 이슬람 세력의 도움을 받는 장면도 나오기 때문이죠. 나이를 먹은 지금이야, 종교나 민족을 넘어 수없이 많은 합종연횡과 배신이 있을 수 있고, 실제 역사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말이죠. 그리고 이런 합종연횡만큼 당시 스페인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복잡하게 얽혀서 삶과 문화를 창출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에는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전형적인 서유럽 국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슬람이 스페인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면서 영향력을 미쳤던 알-안달루스의 역사와 문화가 스며들어 있으며 미술이나 음악도 예외는 아닙니다.
조르디 사발의 음반 그라나다, 1013 - 1502는 알-안달루스를 마지막까지 지탱했고, 우리에게는 알함브라 궁전으로 잘 알려진 그라나다의 역사를 중심에 놓고 그 속에서 펼쳐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문화와 음악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 문화는 때로는 다투면서, 때로는 화합하면서 좁게는 그라나다, 넓게는 알-안달루스의 문화와 예술의 특수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표지 -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이 유명한 곳에 대해서 딱히 설명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표지의 사진은 사자의 정원입니다.
알-안달루스의 간략한 역사
알-안달루스(Al-Andalus)는 중세시대 무슬림이 지배하던 스페인지역을 의미합니다. 전성기에는 상당히 북쪽까지 기독교 왕국들을 밀어붙였으나, 후기에 가면 점점 줄어들어 나중에는 그라나다만 남았고, 결국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기독교 군주들에 의해 정복당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알-안달루스는 700여 년간 이슬람 세력의 서쪽 최전방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이라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기독교 세력이 자리한 유럽은 물론 이슬람이 장악한 북아프리카로부터도 고립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특수성이 일반적인 기독교나 이슬람의 문화와는 다른 알-안달루스만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711-756년 : 우마이야 왕조 통치자들의 시대 (Umayyad Governors)
711년 7월, 아랍과 베르베르 연합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 후 전쟁과 외교를 통해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이 새롭게 정복한 땅을 알-안달루스라고 칭하기 시작합니다. 정복한 지역은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왕조로 편입되어 코르도바에 위치한 지역 통치자가 알-안달루스 전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756-929년 : 우마이야 토후국 시대 (Umayyad Emirate)
750년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왕조가 아바스 왕조(Abbasids)에 의해 무너지자, 우마이야 왕조의 일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학살하던 아바스의 시퍼런 칼날을 기적적으로 피한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생존자가 스페인으로 피난을 온 뒤, 스스로를 에미르 아브드 알-라흐만 1세라 칭하고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은 뒤, 알-안달루스의 모든 이슬람 세력을 자신의 휘하로 통합하여 우마이야 토후국의 시대를 엽니다. 그리고 북쪽의 기독교 세력은 물론 북아프리카나 비잔티움 제국과도 교류하면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와도 문화적 교류를 유지합니다.

929-1031년 : 우마이야 칼리파국 시대 (Umayyad Caliphate)
929년 알-안달루스의 우마이야 왕조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아브드 알-라흐만 3세는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로서의 지위를 천명하고 스스로 칼리프임을 선언합니다. 비록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군주들은 아바스 왕조의 권위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아바스 문화 예술의 영향을 받았고, 910년 튀니지에 성립되어 969년에는 이집트를 장악한 파티마 왕조의 영향 역시 받습니다. 이 시대에는 이런 동방 이슬람의 영향에 과거 우마이야 왕조의 전성기에 대한 향수가 곁들여진 문화가 코르도바에 많이 등장합니다.
1031-1086년 : 타이파 왕국 시대 (Taifa Kingdoms)
피트나(fitna) 또는 내전으로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붕괴되고 각지의 지방 지도자들이 중앙권력의 약화를 틈타 스스로를 독립적인 타이파(분파라는 의미)로 칭하며 14개의 지역에 각자의 소규모 왕국을 설립합니다. 이 시기동안 이 타이파 왕들은 각자가 거주하던 도시를 수도로 삼아 때로는 기독교 세력과 때로는 다른 타이파 왕국과 충돌하며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경쟁에는 문화적 경쟁도 한몫해서 타이파들은 코르도바의 전례를 따라 각자의 왕국의 문화적 번영을 도모했습니다. 비록 이전의 단일 왕국보다는 힘이 미약했지만, 세빌리아, 톨레도, 사라고사 같은 타이파 왕국은 지속적으로 예술을 후원하고 나름의 화려한 궁전도 건축하는 등 이 소규모 왕국이 난립하던 시대에도 알-안달루스의 문화는 발전했습니다.

1088-1232년 알모라비드/무라비트(Almoravid)와 알모하드/무와히드(Almohad) 통치기
1085년 톨레도가 알폰소 6세가 이끄는 카스티야의 기독교 세력에 함락된 후, 알-안달루스의 타이파 왕국들의 도움 요청에 부응하여 진출한 베르베르족 중심의 알모라비드 세력은 카스티야-아라곤 세력을 막아낸 뒤, 1090년 무렵부터 그라나다 지역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알-안달루스 전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알-안달루스의 타이파 왕조들에 비해 교조적인 무슬림이었던 알모라비드 왕조였지만, 결국에는 기존의 스페인지역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 건축물의 장식에 치중하는 등 기존의 화려한 문화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한 엘 시드(로드리고 디아즈 데 비바르)가 활동한 시대가 타이파 왕국의 시대가 알모라비드 통치기로 넘어가는 시점입니다. 각종 전승에서는 주군이라는 의미인 Cid에 정관사를 붙인 엘 시드(El Cid)로 불릴 정도로 알모라비드의 침공에 맞서 기독교 스페인을 구한 영웅으로 묘사되지만, 영화에서도 슬쩍 볼 수 있는 것처럼 전반적인 생애는 용병에 가까운 군벌로 당시 무슬림 타이파는 물론 기독교 왕국들도 그랬듯 이권과 상황에 따라 편을 바꿔가면서 활동했습니다.
알모라비드 왕조에 이어 마그레브 지역에서 베르베르족 중심으로 발흥한 알모하드 왕조는 알모라비드 왕조를 몰락시키고 알-안달루스에서 기존의 알모라비드의 세력을 대체합니다. 하지만 1212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에 의해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의 패배 이후 쇠퇴하기 시작해서 점차 기독교 세력에게 잠식당해 결국은 그라나다만 남게 됩니다.

1238-1492년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 (Nasrid Kingdoms)
나스르 왕조는 레콩키스타의 와중에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가 카스티야에 신하의 예를 갖추는 것을 전제로 에미르가 되어 무함마드 1세가 되어 시작됩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세력으로 남아 때로는 기독교 세력과 대치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물을 바치기도 하면서 200여 년을 존속합니다. 이 그라나다의 왕궁이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이며, 그라나다는 이사벨-페르난도 기독교 군주의 군대에 항복할 때까지 화려한 문화를 선보입니다.

세 개의 문화에 대한 신화
알-안달루스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인들이 나름의 조화를 이루며 찬란한 문화를 이룩해 낸 것으로 회자됩니다. 물론 이 신화에 어느 정도 진실은 담겨 있지만, 늘 그렇듯 실제 역사는 약자에게 가혹합니다. 유대인의 예를 보면 로마시대에는 시나고그를 건립하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의 결혼이 금지되었고, 비시고트 왕국시절에는 이런 차별이 더 강화되기도 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 무슬림이 진출하면서부터는 유대인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는데, 이슬람 정권은 다양한 신자들에 대해 이슬람 율법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대가는 세금의 납부였지만 말이죠. 그리고 많은 경우, 역사에서 이런 관용은 세금의 충당을 위한 실리적인 측면이 많았고, 그래서 정부는 이교도의 개종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종을 한 경우에도 늘 개종한 종교로부터도 위장 개종을 한 배신자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에 의해 그라나다가 정복된 이후, 항복에 대한 약조에도 불구하고 개종하지 않는 무슬림에 대한 추방, 기독교로 개종한 모리스코에 대한 추방으로 이어집니다.
1568년 말 완전한 기독교도가 되기를 강요하면서 정부와 종교재판소는 무슬림 복장의 금지, 여성의 베일 금지, 축제에서의 무슬림 춤 금지 등의 지속적인 요구를 강행했고 이에 저항한 그라나다의 모리스코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투르크와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국가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돈 후안이 이끄는 스페인군에 의해 2년간 지속되던 반란은 진압됩니다. 그리고 이 진압의 공신 돈 후안은 훗날 레판토 해전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이어 1580년에는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획득한 후, 이베리아 반도를 완벽한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리스코들을 추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 계획은 비록 30년간 표류했지만 1609년 펠리페 3세에 의해 추방령이 발효됨에 따라 모리스코의 추방이 이루어집니다. 자료에 의하면 발렌시아를 떠난 모리스코의 숫자는 15만 명에 이르러 사실상 스페인의 경제에도 커다란 타격을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추방된 모리스코들이 처음 정착하고자 한 곳은 당연히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지역이었는데,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입장에서 이들은 이미 기독교화된 이질적 모습으로 느껴졌고, 모리스코들의 입장에서는 무슬림들 보다는 그곳에 정착한 세파르디 유대인들과 더 유대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조르디 사발의 음반 그라나다, 1013 - 1502
그라나다에 무슬림 왕조가 처음 성립된 것은 지리(Zirid) 왕조로,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내홍으로 1013년 알제리 출신의 베르베르족 자위 이븐 지리(Zawi in Zirid)에 의해 성립된 그라나다 왕국입니다. 왕국의 설립당시 그라나다에는 유대인들의 커뮤니티가 있었기에 Gharnata al-Yaud(유대인들의 그라나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어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르디 사발의 음반은 이 지리왕조에 의한 그라나라 왕국의 성립 1000년을 기념하여 2013년 7월 1일 공연한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연주회 실황을 기반으로 일부 스튜디오 녹음을 첨가하여 만들어진 음반입니다. 그간 제가 소개한 조르디 사발의 음반 중에도 실황을 기반으로 한 경우가 있었지만 녹음의 상태에서 실황임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음질이 좋았는데, 그라나다, 1013 - 1502는 연주회장이 아닌 알함브라 궁전에서 있었던 실황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실황녹음의 한계를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좀 있습니다만, 알함브라 궁전의 소리를 듣는다는 생각을 하고 들으면 그 부족한 부분들이 오히려 감동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알-안달루스 음악의 기독교적 뿌리는 모사라베(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치하에서 개종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하던 가톨릭)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비시고트족 시절 이베리아 반도는 비잔티움 제국과 교류로 인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무슬림의 지배 이후에는 당연히 아랍의 영향이 모사라베 음악에 접목되어 독특한 음악적 경향을 만들어 냈습니다. 무슬림에게 있어 음악은 비도덕적이고 부정직한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한 아브드 알-라흐만 1세 시절부터는 왕궁에서 음악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해 점차 사회 전계층에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라나다에는 앞서 말한 대로 지리 왕조 성립 이전부터 유대인들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라나다의 음악은 세 종교적 영향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음반은 1013년 지리 왕조의 성립에서 시작해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기원의 다양한 노래와 기악, 그리고 시를 조합하여 지리 시대, 베르베르(알모라비드와 알모하드) 시대, 나스르 왕국 시대와 그라나다 왕국의 몰락과 카스티야의 지배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음반은 유대 기원의 가사를 기반으로 남부 모로코 지역의 세파르드 유대인 커뮤니티의 전승에 입각한 음악인 Qamti be-Ishon Laya (노래 중의 노래)로 시작해서 엘 시드의 발렌시아 정복과 관련해서는 알폰소 10세 시대의 음악집에서 발췌한 Ductia를 연주하고, 나스르 왕조의 건국에는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석판에 새겨진 시를 낭독하는가 하면, 카스티야-아라곤 왕국에 의한 그라나다의 함락에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를 찬양하는 빌란시코를 삽입하는 등 그라나다의 역사의 흐름은 물론 다양한 종교적 음악적 흐름을 함께 수록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 연주의 성과는 비평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고, SACD의 음질 역시 앞서 말한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실황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생생하고 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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