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 예술 - 공연/역사와 음악 시리즈

[음악]역사와 음악 (9) 베네치아 1000년의 기록 (VENEZIA MILLENARIA 700-1797)

by 만술[ME] 2025. 10. 21.

짐승 털로 만든 예복을 걸치고, 공화국의 군주를 상징하는 뾰족 한 모자 코르노를 쓴 도제는 그의 궁전 앞에 있는 부두에서 전용 평저선에 올랐다. 바다에 대한 도시의 자긍심을 가장 화려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황금 배인 부첸타우르였다. 이중갑판이 설치된 위풍당당한 이 선박은 금박으로 꾸며졌으며, 사자들의 문장과 바다 동물들이 호화롭게 그려져 있었고, 주황색 지붕이 씌워져 있었다. 168명이 노를 저어 배를 먼바다로 이끌었다. 황금빛 노들이 석호의 바닷물을 때렸다. 뱃머리에 정의를 대표하는 선수상이 저울을 높이 치켜들고 칼을 뽑아 들었다. 제비 꼬리 형태의 성 마르코 깃발은 돛대 꼭대기에서 펄럭였다. 대포가 발사되고, 관악기들이 연주되고, 북소리는 얼이 빠질 정도로 크게 울렸다. 곤돌라와 노 젓는 배들로 구성된 선단의 호위를 받으며 부첸타우르는 아드리아 해의 입구로 나아갔다. 여기서 주교가 기원 의식을 거행했다. "허락해 주소서. 오, 주여, 우리들과 여기서부터 항해하는 모두에게 바다가 잔잔하고 고요하기를." 그러고 나서 도제는 손가락에서 금으로 만든 결혼반지를 빼내 유서 깊은 말을 하면서 바다 깊숙이 던져 넣는다. "오, 바다여, 우리는 당신과 결혼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영원히 지배한다는 징표와 함께."

- 로저 크롤리, 부의 도시 베네치아 (다른세상)

 

 

15세기 초 베네치아 예산은 75만 두카토였던 반면 베네치아보다 훨씬 큰 프랑스 왕국의 예산은 100만 두카토 정도였다. 영국의 예산이 베네치아와 비슷하다. 예산이 베네치아 전체 소득의 5-10% 정도에 해당한다고 계산하면 총국민소득은 750만-1,500만 두카토에 달한다. (중략)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베네치아가 정복한 북부 이탈리아 땅, 즉 테라 페르마(Tera ferma)라 불리는 육상 영토의 예산 46만 4천 두카토와 동지중해에 있는 베네치아 해양 영토의 예산 37만 6천 두카토를 더하면 베네치아제국의 예산은 161만 5천 두카토에 해당한다. 이 수치는 유럽 최고의 예산이다. 당시 베네치아 전체(베네치아 + 육상 영토 + 해양 영토) 인구가 대략 150만 명 정도로, 프랑스 인구를 1,500만 명 정도로 잡는다면 베네치아는 프랑스보다 열 배 정도 부유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 남종국, 중세 해상제국 베네치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대부분의 관광객에게는 미로 같은 수로를 곤돌라를 타고 관광하는 유럽 내의 이국적 관광지에 불과할지 몰라도 베네치아는 그 기원과 역사에서 유럽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이라는 흑역사를 창출해 내기도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서진을 막는 일등 공신이기도 했고, 동과 서의 교류에 있어 어느 국가 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베네치아라는 도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르디 사발의 음반 베네치아 1000년의 기록(VENEZIA MILLENARIA 700-1797)은 이 베네치아가 겪고 만들어 온 1000년의 역사를 시간적 흐름을 따라가며 다양한 음악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표지그림 - 린드로 다 폰테 (일 바사노), 베네치아의 리바 델리 스키아보니(슬라브인의 부두) (1595년 / 산 페르난도 왕립 예술 아카데미 / 스페인, 마드리드 / 캔버스에 유채) 발췌

슬라브인의 부두 또는 (슬라브인들이 노예로 많이 팔렸기에 의미가 전이된) 노예의 부두라는 명칭은 도제 궁 인근의 산 조르지오 데이 슬라비 성당에서 비롯했는데, 이 부두는 도제와 그 일행이 베네치아의 영광을 기념하여 반지를 바다에 던지는 축제인 바다와의 결혼식을 위해 출발하는 장소였습니다. 바사노는 이 장면과 흡사한 그림을 한점 더 그렸는데 (바다와의 결혼식 행사를 위한) 베네치아 도제의 승선이라는 그림으로 현재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번 글은 이사벨 1세카를 5세에 대한 글처럼 음반의 구성을 따라 음반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필요하다면 연관된 음악에 대해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참고로 박스에서 이탤릭체로 표기된 부분은 음반에 수록된 음악에 대한 정보입니다.

 

c. 700
The birth of Venice: from the end of the century, the Byzantines, who occupy northern Italy, contribute to the creation of this new city on the lagoon to which the inhabitants of the region migrate under threat from the Lombards. The future Republic of Venice, la Serenissima, is administered by Byzantium through the Exarchate of Ravenna until 751, when the fall of the Exarchate leads to independent rule by the Doge (Duke), although Venice remains a province of Byzantium.
Fanfare (instrumental) After an 8th century melody

c. 828
The presumed relics of St Mark of Alexandria are transferred to Venice. Building of St Mark's Church, which is later enlarged in 976 and rebuilt in 1063.
Hallelujah - Composition in Byzantine style - Ioannes Damaskinos (8th century)

 

베네치아는 일반적인 유럽의 도시들과는 다르게 로마가 만든 계획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서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고트족의 침입, 훈족의 침입 등으로 베네토 지역 사람들의 임시 피난처로 사용되던 베네치아는 그 천혜의 방어적 가치 때문에 주목되었고, 다시 롬바르드족이 침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롬바르드족이 파비아를 수도로 삼고 눌러앉자 이 임시 피난지는 본격적으로 영구 주거지가 됩니다. 물론 이 도시가 자체적인 힘으로 지탱하기는 어려웠고, 처음에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에 귀속된 형태로 유지됩니다.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베네치아는 공화국이라는 정치형태를 유지합니다.

 

이렇게 다른 도시들에 비해 탄생의 배경이 근본 없는 도시였던 베네치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영광을 담보하는 탄생 신화였습니다. 그런데 (도시전설이던 실화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불법적 거래를 하던 두 명의 상인이 알렉산드리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서 만난 최근의 이슬람 정부의 박해에 불만을 품은 두 성직자와 함께 성당에 안치된 성 마르코(마가)의 유해를 훔쳐 베네치아로 달아나게 됩니다. 이들의 명분은 성 마르코가 알렉산드리아로 오기 전에 베네치아를 거쳐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베네치아가 성 마르코의 유해가 머무를 정당한 장소라는 명분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수감된 성 마르코에게 예수가 현현하여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전했다는 이야기가 마르코가 베네치아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갈 때 "너의 육신이 여기에 쉴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은 것으로 변형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유해를 옮기는 과정에서 악마들이 나타나 배를 공격하고 침몰시키려 했으나 성 마르코의 유해가 기적을 행해 악마들을 물리쳤으니 이것이 성 마르코가 자신의 유해가 베네치아에 머무르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유해를 기존의 대성당이 아닌, 도제 궁 옆에 예배당을 짓고 거기 임시 보관하는 방식으로 그 소유권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대성당은 주교, 즉 교회의 영향권에 있는 장소지만, 도제 궁의 예배당은 도제 개인의 장소이며, 따라서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발휘되는 곳이라는 것이죠. 이 예배당이 지금도 도제 궁 옆에서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는 산 마르코 성당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성 마르코/마가를 상징하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 됩니다.    

 

산마르코 광장과 성당, 입구위에 작지만 네마리의 청동 말이 보입니다.

 

c. 1082
The Byzantine Emperor Alexios I Komnenos grants trading privileges to the Republic of Venice, thus giving it access to the Orient.
Halatzoglou kratema - Anonymous Byzantine

c. 1096
First Crusade: The Venetian fleet transports the Crusaders to the East.

c. 1099
Jerusalem is taken by the Crusaders. Commercial opportunities for Venice, which secures a number of trading posts throughout the kingdom of Jerusalem.
Crusade song: Pax! In nomine Domini! - Marcabru (1100-1150)

c.1121-1130
War in the Mediterranean against the Venetians. Victory of the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 which establishes colonies in Palestine. From the 12th century to the first third of the 13th century: Venetian presence in North Africa.
Dance of the soul (North Africa) - Anonymous instr. (Berber tradition)

 

지정학적 위치상 베네치아가 택할 길은 해상 무역국이었고 뼛속까지 장사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네치아는 항상 무력에 의한 해결보다는 협상을 선호했고, 늘 무역과 관련된 이권에 목말라했습니다. 그리하여 동방무역에 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의 승인, 이어지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수송을 맡게 된 것, 그리고 그 성과로 예루살렘 왕국이 성립된 것은 무역국 베네치아의 도약의 발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베네치아의 역사는 이 무역에 대한 권리의 수호를 위한 지난한 투쟁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통계 연구에 의하면 베네치아의 해상무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상품이 협의의 개념의 향신료(당시 향신료는 광의의 의미로는 정말 다양한 물품을 칭하는 말로, 거의 상품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라 할 정도였습니다)라고 할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 상징성과는 별개로 중요한 시장이 아닌 대안 시장 정도의 역할만 수행했고, 베네치아의 향신료 선단은 알렉산드리아와 베이루트를 통해 인도의 향신료를 수입했습니다. 그렇기에 호들갑 또는 과장된 역사와는 달리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에도 유럽의 향신료 시장은 안정적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베네치아는 해상 무역 투쟁을 통해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c. 1202-1204
The Venetians assemble and equip the fleet destined for the 4th Crusade: Sack of Constantinople. The four bronze horses are placed on the façade of St. Mark's.
Ton Despóti (Lord Save) - Hymn for the Service of Matins Planctus byzantin (13th Century).

c. 1245
Treaty between Venice and Armenia.
Armenian song & dance - Instrumental (Dukuk), 13th century

c. 1270
Creation of a Venetian outpost at Ras al-Makhbaz (Tunisia), lying at the crossroads of Africa's caravan routes.
Conductus; O totus Asie Gloria, Regis Alexandria Filia (s. XIII)

c. 1295
Marco Polo returns to Venice after an absence of twenty-five years.
Istampitta: Saltarello - Anonymous (ca. 1300)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약탈 사건은 커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 통해 베네치아가 지중해 곳곳의 기존 비잔티움 제국 항구들을 차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사실상 장악하여 한층 강대한 해상무역제국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 그러나 이 사건은 결국 약해져만 가던 비잔티움 제국에 결정적인 한방을 가해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명목상의 위치만 점유하고 기존에 수행했던 동방의 압력을 막아내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어 결국은 이후 지난한 기간 동안 그 역할을 베네치아가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베네치아 쇠퇴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는 양면성을 지닙니다. 그리고 이 약탈의 상징물은 다 아시는 대로 성 마르코 성당 정문에 세워진 네 마리의 청동 말입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진위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그의 동방기행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베네치아 해상 항로와 그 위상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네치아가 정례 갤리선단 제도를 운영한 것은 14세기초부터로 향신료, (근래 연구로 중요성이 향신료 못지않게 부각된) 면화, 그리고 순례객이 주요 대상이었습니다. 향신료를 보면 자바섬에 집적된 향신료는 여러 단계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나 베이루트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넘겨진 뒤, 베네치아로 운송되어 베네치아에 주재 중인 독일상인들에게 판매된 뒤, 유럽 각지로 다시 판매되는 경로를 거칩니다. 이때 동방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와 베네치아 간, 서방으로는 베네치아와 대표적으로 플랑드르 간의 정기 갤리선단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방향의 선단은 톱니처럼 잘 물려 운영되었죠.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정기 선단을 운영했는데 주요 물품은 비단이었습니다. 여러 경로의 정기선단은 물품만 나른 것은 아니고 정보와 서신도 날랐습니다. 그렇기에 베네치아는 모든 정보가 모이는 집산지이기도 했고, 이것은 베네치아의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지순례만을 위한 예루살렘 인근의 항구인 야파까지의 선단이 운영되기도 했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성지순례를 위한 다양한 물품을 준비하기에도 좋은 곳이었기에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베네치아로 가야 한다는 것이 당대 정설이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이런 해양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c. 1348
Originating in the Crimea, the Black Death ravages Europe and claims the lives of three quarters of the population of Venice.
Pasan tin elpida mu (All my hope) - Prayer and Lamentation - loannis Damaskinos

c. 1404
The Republic of Venice expands onto the terra firma. It is a key station en route to the Holy Land.
Chiave, chiave (instr.) - CMM 131 -  anonymous

c. 1438-1439
Attempt to heal the Schism between the Latin and the Eastern Churches. Celebration of the liturgy at the cathedral of Hagia Sophia, in which Greeks and Latins join in the same prayer.
Adoramus te - Anonymous, Songbook 15th century
Hirmos Calophonique: Tin Déisin mu - Anonyme (15th century)

c. 1452
Siege of Constantinople by the Ottomans.
Ottoman Nikriz March - Anonymous (15th century)

c. 1453
Constantinople is taken by Mehmet II, who makes it the new Ottoman capital. Massacre of the inhabitants of the city.
Lamentatio Sanctae Matris Ecclesiae Constantinopolitanae - Guillaume Dufay

 

해상 무역을 통한 부는 육지지역의 영토인 테라 페르마(Tera Ferma)의 확보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얼마 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그곳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됨에 따라 해상에서의 베네치아의 위치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베네치아는 이전부터 이슬람 군대와 다양한 분쟁을 통해 겨뤄왔고, 이 경쟁과 무력충돌은 기독교 국가와의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베네치아의 테라 페르마로의 확장을 자신들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충돌은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만큼 베네치아의 국력을 소진시켰습니다.    

 

 

c. 1515
Battle of Marignan, Franco-Venetian victory.
La Guerre: La Bataille de Marignan - Clément Janequin (ca. 1485-1558).

c. 1526
Foundation of the first synagogue in the Ghetto Novo.
Song of songs (3,1-4) Damti be-Ishon Layla (I woke up in the middle of the night)

c. 1527
Rome is sacked by the troops of Charles V.
Adrian Willaert is appointed maestro di cappella of St. Mark's.
Villanesca alla napolitana: Vecchie letrose - Adrian Willaert (1490-1562)

c. 1570
Selim II orders Venetian ships in the Bosphorus and the Dardanelles to be seized.
Der makām-ı Uzzäl Sakîl - Anonymous Ottoman: Dimitri Cantenir, 324 (instr.)

c. 1571
Treaty of the Holy League, the Ottomans are defeated at the naval Battle of Lepanto.
Madrigal: Oíd, oíd... /..las buenas nuevas de Lepanto] - Joan Brudieu (1520-1591)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지중해의 거점을 둘러싼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의 경쟁은 지난하게 펼쳐집니다만 전반적인 추세는 이미 기울어져 다소간의 승리는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홀로 지중해를 지키려 한 베네치아의 점진적인 후퇴였습니다. 아무리 베네치아가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설득해도 결국은 베네치아 혼자 오스만 제국을 지중해에서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서방 기독교 세력이 잠시나마 오스만 제국에 한방을 먹인 것이 레판토 해전입니다. 카롤루스/카를 마르텔의 투르-푸아티에 전투의 승리처럼 레판토 해전도 양측에서 부여하는 의미가 차이가 많지만, 오스만 제국의 해양 진출이 잠시나마 주춤하게 했던 의미는 확실한 사건입니다.

 

레판토 해전의 발단은 베네치아의 영토이던 키프로스를 오스만 제국이 침공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상 무역국인 베네치아에게 있어 지중해 가운데의 섬인 키프로스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자원이었고, 키프로스의 확보를 위해 베네치아는 맘루크 왕조 시절에는 맘루크와, 이후 맘루크가 오스만 제국에 멸망한 뒤에는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하면서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방으로의 지속적인 진출을 모색하던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키프로스는 언젠가는 손에 넣어야 할 곳이었고, 결국 셀림 2세는 키프로스에 추방된 유대인의 보금자리를 만들려다 베네치아에게 적발되어 원한이 생긴 포르투갈 출신 유대인 친구 주앙 미케스의 청탁을 핑계로 키프로스를 침공하고, 이에 따라 베네치아는 교황에게 호소하여 신성동맹이 결성됩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입장에서 지중해는 큰 관심이 없는 지역이라 할 수도 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 입장에서는 동부 유럽을 위협하는 오스만 제국의 확장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 결국은 양 진영의 함대 간의 결전인 레판토 해전으로 이어집니다. 전투의 결과는 신성 동맹의 승리였고 많은 함선을 잃은 오스만 제국은 해양 진출에 있어 잠시라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으나 결론적으로 키프로스는 잃지 않았고, 베네치아는 크레타 등의 안전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무역을 중시하는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키프로스를 잃더라도 오스만 제국과의 화평과 다른 거점들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큰 성과라 할 수 있었습니다.    

 

 

c. 1571-1573
Construction of the Church/Cathedral of San Giorgio dei Greci in Venice.
David's Psalms: Ficht wider meine Anfechter (Psalm n. 35)
Claude Goudimel (1510-1572) / Ambrosius Lobwasser (1515-1585)

c. 1571
Lutheran scholars correspond with Patriarch Jeremias II.
Géfsasthe ke idete (O taste and see). Hymn of the Holy Eucharist John the Kladas (14th Century)

c. 1581
The Republic rules Cyprus, Crete, Corfu and part of the Dalmatian coast.
Sousta - Cypriot dance (instrumental)

c. 1584
Andrea Gabrieli is appointed principal organist at St Mark's.
Ricercar VII - Andrea Gabrieli

c. 1589
Election of the first patriarch of Russia.
Se hymnúme (We praise thee) - Hymn of the Holy Liturgy (in Slavonic) - Michael Chatziathanasiou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베네치아는 탄생 초기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로, 이후에도 비잔티움 제국과의 연관이 중요한 국가고 수없이 많은 문화에 이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교는 가톨릭이었고, 베네치아에서 정교 의례는 금지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인들은 베네치아로 몰려들었고 결국 그리스/정교인들은 자신들의 성당을 얻어내게 됩니다. 이렇게 베네치아에 생긴 정교회 성당이 성 조르조 데이 그레치 성당(그리스인들의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입니다. 

 

러시아 정교는 대주교의 지위(모스크바)를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형식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에 의한 축성이 필요했습니다. 러시아 정치권은 러시아의 국제적, 종교적 위상의 상승이 필요했고 그 상징으로서 모스크바의 대주교를 총 대주교(patriarch)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고, 1589년에는 이 일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후 표트르 대제는 총 대주교직을 폐지하고 정치 세력으로서의 러시아내 정교회를 무력화 한 뒤, 왕권을 강화하는데 이는 아래 언급된 것처럼 예카테리나 2세가 오스만 제국 내의 정교 신자들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c. 1603
Ambassadors of Shah Abbas I travel to Venice to seal an agreement to fight against Ottoman rule.
Laila Djân - Anonymous Persian dance: (instrumental)

c. 1622
Salomone Rossi publishes in Venice "Ha-Shirim Asher li Shelomoh", thereby introducing mesurée et polyphonic music into synagogues.
Psalm 137, (1-6) 'Al nàhärot bavél (By the rivers of Babylon) - Salomone Rossi (1570-1630)

c. 1638
Staging of 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 by Claudio Monteverdi.
Claudio Monteverdi is maestro di capella at St. Mark's in 1613.
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 SV 153 - Claudio Monteverdi (1567-1643)

c. 1667
Johann Rosenmiller, employed as a musician at St Mark's in Venice from 1658, publishes his Sonate da Camera. In 1678 he is appointed composer at the Venetian orphanage and music school, Ospedale della Pietà, later made famous by its association with Antonio Vivaldi.
Sinfonia Seconda - Johann Rosenmüller

c. 1669
The Turks besiege Kandia (Crete). Venice surrenders.

c. 1684
Peloponnesian War (Morea) between Venetians and Ottomans.
Makăm-i-Rehavi Çember-i-Koca - Ottoman dance - Tanburi Angeli (?-1690)

 

중세라는 기간 동안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치고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종교를 가진 세력 간의 전쟁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아울러 다른 종교의 세력과 연합하여 같은 종교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흔했죠. 사파비 제국의 아바스 1세와 오스만 제국의 관계도 그러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서쪽의 유럽 전선에 집중하는 동안, 베네치아와 협정하고 동쪽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략하여 성과를 거둡니다. 

 

베네치아의 대표 음악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사계로 유명한 안토니오 비발디겠지만, 그 이전 세대로 이야기하자면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몬테베르디는 만년을 성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재직했고, 오페라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르네상스 음악에서 우리가 바로크라고 부르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작곡가라 할 수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지중해에서 대립하던 베네치아는 20여 년간의 공방 끝에 1669년 칸디아가 함락되면서 지중해의 중요한 거점인 크레타를 잃고 더 이상 지중해 해상 무역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세기 반전 1499년부터 1503년까지 바예지트 2세의 오스만 제국과의 에게 해 공방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이 획득한 모든 것을 인정하는 치욕적인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오스만 제국의 선박에 대해 베네치아 선박이 자신들의 깃발을 내려 경의를 표하게 된 사건, 그리고 평화 조약안을 협의하기 위해 베네치아 대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의 재상을 만나 협상을 하려 할 때, 베네치아의 조건 따위는 필요 없다면서 "지금까지는 당신들이 바다와 결혼했다.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우리가 당신들 보다 더 넓은 바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향후 이어지는 베네치아 - 오스만 제국의 공방의 흐름, 그리고 결국은 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마지막 거점이던 크레타를 잃음으로써 해상 제국이 아닌, 지상 제국으로 추락하게 되는 베네치아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c. 1725
Marriage of Louis XV. Century of Lights.
"Di queste selve venite, o Numi" from La Senna festeggiante, RV 693 (Cantata "to the glory of Louis XV").
L'Età dell'Oro, La Virtù, La Senna. (Part I, No. 19) - Antonio Vivaldi (1678-1741)

c. 1771
Mozart visits Venice. The Greeks revolt against the Turks in the Peloponnese, supported by Russia.
Alla turca (Allegretto)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Musical version by Jordi Savall (from Piano Sonatan. 11, A-Dur KV331)

c. 1774
The Empress and Tsarina Catherine II of Russia becomes the protector of Orthodox Christians in the Ottoman Empire.
Deo gratias - Russian Orthodox Hymn - Anonymous 16th Century

c. 1789
Revolution in Franc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Constitutional song Nous sommes tous égaux
Anonymous melody. Musical version by Jordi Savall
Texts: Anti-Marchant, François Marchant (17612-1793), Jean Michel Sedaine (1719-1797)

c. 1796
The Carnival celebrations are "the most unbridled of the century"
Canzonette veneziane da battello. Raccolta di gondolier: Johann Adolf Hasse (1699-1783)
Ed. John Walsh - Musical version for four voices by Jordi Savall
Per quel bel viso
Mia cara Anzoletta

c. 1797
Napoleon Bonaparte's troops occupy the Terra Firma, Fall of the Republic of Venice, which is annexed to the kingdom of Italy under the Treaty of Campo-Formio.
La Sainte Ligue (La nuit est sombre) / The Holy League (The Night is Dark) by Luigi Bordèse (1815-1886), adaptation for 4-part male voice choir and organ (or piano) of Adolphe Joly's text to music by Ludwig van Beethoven: The Allegretto from his Seventh Symphony and the final Allegro from the Fifth Symphony.
Jordi Savall's musical version adds to these 4 sung parts the essential instrumental texture of Beethoven's original music.
La nuit est sombre After the Allegretto from Beethoven's Seventh Symphony
II. Vengeons la grande ombre by Guise (After the final Allegro from Beethoven's Fifth symphony)

 

 

향후 발칸 반도에 대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조르디 사발의 음반 중에 발칸 - 피와 꿀이라는 음반이 있습니다) 베네치아를 해상 제국의 지위에서 끌어내린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그 넓은 영토를 통치하거나 지중해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동유럽 지역에 대해서는 러시아, 합스부르크 제국 등이 다양한 저항을 획책, 지원했고,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서유럽의 민족주의 열풍이 이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여기에 종교 문제까지 겹치면서 현재까지 우리가 아는 발칸 문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한편으로는 위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났는데 소위 튀르키에 풍을 표방한 음악은 모차르트의 곡 중 대표적으로 파샤의 후궁에 감금된 애인을 탈출시키려는 코믹 모험극 오페라 후궁 탈출, 바이올린 협주곡 5번 K. 219, 피아노 소나타 K. 331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음반에서는 K. 331 소나타 3악장을 조르디 사발이 자신의 악단을 위해 편곡한 버전이 연주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막을 내린 것은 베네치아가 해상 제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지난하게 싸워 온 오스만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1 공화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쟁 중에 이탈리아로 진군한 나폴레옹은 밀라노 등의 북부도시,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베네치아를 함락시킵니다. 그리고 전쟁 결과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1000년간 이어진 베네치아의 독립적인 공화국의 지위는 막을 내리게 되고,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 왕국에 부속됩니다.

 


 

베네치아가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해상 제국의 지위를 구가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문화적으로도 최고의 지위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발전에는 부의 축적이 큰 공헌을 했지만 단지 그것만이 베네치아의 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베네치아가 공화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유럽 내의 각종 왕가 세력이나 교회 세력의 영향권에 있지 않았던 점이 중요합니다. 이에 따라 출판을 비롯한 다양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는데, 쿠란이나 탈무드의 첫 출판물이 베네치아에서 발간된 사실만으로도 그 자유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베네치아는 16세기 서유럽 최대의 출판도시였으며, 늘어선 잡화점에 관광객이 몰리는 리알토 다리에서 산마르코 광장으로 이어지는 메르체리 거리가 이 출판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특히 당시의 출판업을 위해서는 자본과 교역이 필요했고, 여기에 자유가 곁들여진 베네치아는 최상의 조건이었죠. 그리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지혜나 지식을 책으로 엮어 가격을 매겨 팔 수 있다는 출판업은 어쩌면 서양 자본주의 사상의 물질주의적 단면을 보여주면서, 모든 것을 사고 판다는 베네치아라는 국가의 생존 철학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산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네치아의 공화국 지위에서 나오는 자유와 함께 문화 발전에 기여한 또 하나의 축은 베네치아가 교역을 통한 동방의 관문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관문의 역할을 수행한 덕에 베네치아는 비잔티움의 그리스인, 아랍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슬라브인, 튀르키에인 등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거주하는 터전이었습니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과거 비잔티움 제국에 거주했던 사람들 입장에서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가장 닮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동방으로부터 들어오는 각종 문물은 물론, 다양한 거주민들의 문화, 또 이것들이 흡수되고 변형되어 나타나는 문화까지 베네치아는 거대한 문화의 용광로였습니다. 여기에 테라 페르마를 통해 북쪽의 독일이나 플랑드르 지역의 문물도 교류되었으니 동방-지중해-서유럽 지역의 무역은 물론 문화의 허브라 할 수 있습니다.

 

동방의 영향은 인구의 극히 일부라 할 수 있는 순례자, 수입되는 다양한 물품, 이민자에서 비롯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이 각지에 대사관을 수립하고 상근 하는 외교관을 파견했던 것과 달리 이슬람 국가들은 사절단을 운용하는 쪽을 택했고 16세기에만도 오스만 제국은 20차례가 넘는 사절을 파견했습니다. 이 유럽 순방 사절단은 상당수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동방 문물의 절정을 선보이며 서서히 행진했기에 그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이 순방의 끝이나 과정에서 베네치아는 이 사절단이 수개월 이상 장기간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베네치아는 이 사절단이 동양의 문물을 가장 많이 풀어놓는 공간이었고 또 서방의 문물을 입수하는 장소였습니다.     

 

미술의 경우, 전통적으로 비잔티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관광지인 산 마르코 광장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알 수 있죠. 여기에 물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특징은 도시 경관을 날씨나 시간에 따라 좀 더 극적으로 변하게 하는 효과를 일으켜 이런 특성이 미술에 반영됩니다. 인상주의의 시조작으로 불리는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바다(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이 물이 얼마나 극적인 시각적인 자극을 발생케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네치아화파로 불리는 티치아노, 틴토레토, 벨리니 일가 등의 화가들은 회화가 주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중 젠틸레 벨리니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1세에게 파견되어 유명한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젠틸레 벨리니,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 런던 내셔널 갤러리 (1480)

 

베네치아를 기반으로 한 음악가들의 리스트를 제법 나열할 수 있지만, 초기 베네치아의 음악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정교 음악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양식의 음악을 구가했습니다만 베네치아의 음악이 국제적인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제의 확립과 그 악장들 중심으로 음악활동이 이루어지면서부터입니다. 그 대표주자 중 하나가 1527년 로마가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해 약탈되던 해에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maestro di cappella)으로 임명된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aert)입니다. 빌라르트는 예배당 양쪽에 마주 보도록 두 개의 합창단과 오르간을 배치하여 합창의 울림 효과를 배가 하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빌라르트는 미사곡, 시편곡 등의 종교음악 외에도 마드리갈 같은 세속 음악도 작곡했습니다. 

 

출판 도시로서의 베네치아는 악보 출판으로도 유명해서 각지의 다양한 음악 악보가 베네치아에서 인쇄되었고, 이는 베네치아를 당대 유행하는 다성부 마드리갈의 성지로 만들었으며, 몬테베르디도 자신의 마드리갈을 베네치아에서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몬테베르디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오페라 작곡가로도 유명한데,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이야기에 기반한 클로린다와 탄크리디의 싸움 중 일부가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들의 전성기로 이어집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약탈로 귀결된 제4차 십자군 전쟁의 해상 이송을 베네치아가 맡은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이송을 위해 베네치아는 사실상 국가의 모든 경제활동을 이 원정에 받쳐야 했습니다. 베네치아의 도제 단돌로가 체결한 계약을 보면 4,500마리의 말과 9,000명의 기사와 시종, 2만 명의 보병을 수송할 수 있는 함대, 그리고 그들이 9개월간 먹을 식량을 조달해야 했고, 여기에 보너스로 제공되는 별도의 무장 갤리선 50척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준비기간은 13개월이었습니다. 추정하건대 별도의 무장 갤리선 50척을 포함하여 500척의 선박을 준비해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선박만이 아닌 이 배를 운항할 선원도 조달해야 했으니 3만 명 정도의 선원도 필요했죠. 이후에도 베네치아는 지중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선에 투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조선술과 연관된 목재에 대한 기술은 악기 제조로 유명한 크레모나에 목재를 공급함으로써 악기 발전에도 영향을 줍니다.

 

흥미롭게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베네치아의 음악가들이 등장하는 시점은 베네치아가 크레타를 잃고 무역강국의 위치에서 물러난 뒤 입니다만, 베네치아의 쇠퇴가 음악의 발전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고, 때마침 그 시기가 우리가 잘 아는 작곡가들의 이름이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는 후기 바로크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오 비발디, 토마소 알비노니,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 베네데토 마르첼로 등이 이 시기 베네치아의 음악가들이죠. 이 시대 음악가들의 음악은 다양한 곡을 다양한 음반으로 접할 수 있으므로 따로 추천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1797년 나폴레옹에게 항복하면서 베네치아는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1 공화정이 상징하는 민주정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기대했습니다. 항복 서약 며칠 후 새로 오픈한 페니체 극장에서는 민주주의, 자유, 프랑스의 영광을 기리는 공연이 펼쳐졌고, 새로 구성된 프랑스-베네치아 정부의 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산 마르코 광장에는 자유의 나무가 심어지고 구시대 귀족정치의 상징인 도제의 모자 코르노와 황금 책이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믿었던 것과는 달리 베네치아에는 민주주의와 인민의 해방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70년간의 외세의 지배가 찾아왔습니다.     

 

음반 베네치아 1000년의 기록은 루이지 보르데제의 칸타타 신성동맹 - 밤은 어둡고로 마무리됩니다. 이곡은 베토벤 교향곡 7번의 알레그레토 악장과 5번의 마지막 악장에 아돌프 졸리의 가사를 붙여 4 성부 남성 합창과 건반악기(오르간 또는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편곡한 것인데, 조르디 사발은 건반악기 파트를 베토벤 원곡의 틀을 살려 기악 합주곡으로 편곡한 자신만의 버전으로 연주했습니다.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을 작곡할 때 나폴레옹에 가졌던 희망과 기대처럼, 프랑스혁명의 정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인류의 해방에 대한 기대는 5번과 7번 두곡에 남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 정신을 전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