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기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의 일이었다. 여인들의 귀에 어떤 구성진 고운 목소리가 들려와 모두 귀를 기울였다. 특히 도로떼아는 잠이 깨어 있던 차라 더욱 열심히 들었는데, 도로떼아 옆에는 끌라 데 베에드마라고 불리는 판관의 딸이 자고 있었다.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무슨 악기를 따라서 부르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만 들려왔는데, 어떻게 들으면 마당에서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마구간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모두들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어리둥절해 있는데 문 앞에 까르데니오가 와서 말을 했다.
"주무시지 않는 분 있으면 들어보세요. 노새를 모는 소년의 목소리 가 들려오는데 저 노랫소리가 사람 마음을 끄네요."
"우리도 듣고 있어요. 나리!" 도로떼아가 말했다.
이 말을 하고 까르데니오는 가버렸고, 도로떼아가 바짝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노래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사랑의 뱃사공.
그 깊은 바다 속에서
나는 어느 항구에 다다를
희망도 없이 헤맨다네.
저 멀리 눈에 보이는
별 하나를 따라가네.
빨리누로가 본 별들보다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별.
내가 가는 곳 나도 모르고
정처없이 배 저어 가노니.
마음은 열심히 성심껏 그 별만
바라보기에 정신이 없네.
부질없는 신중함
세상 모르는 정숙함이
더욱 그녀를 보고 싶어할 때
내게 그녀를 숨기는 구름.
오 밝고 빛나는 별이여!
그 빛 속에 내가 죽어가나니.
내 눈에 그대가 숨는 순간이
내 죽음의 순간이 될지니.
돈끼호떼 1권, 제42장~제43장 / 민용태 번역 / 창비
조르디 사발이 자체 레이블인 알리아-복스를 통해 발매하는 음반은 항상 내지 해설의 수준이 높은데, 이 내지 해설의 형식을 극단으로 확장한 형태가 CD-Book이라는 형식입니다. 사발은 매년 한 종씩 특정한 주제를 담은 책자와 음반을 엮은 CD-Book을 시리즈 형식으로 발매하고 있는데, 이 시리즈 중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그 음악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라 만차의 돈키호테 - 로망스와 음악>이라는 음반은 이 시리즈의 첫 단추를 꿰었던 음반/책입니다.

표지 그림 -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엘 그레코 (1580년 / 프라도 미술관 / 스페인, 마드리드 / 캔버스에 유채)
스페인 황금시대의 대표적 화가이자 매너리즘의 대가인 엘 그레코(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의 대표적인 초상화인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는 누구를 그린 그림인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많이 알려진 후안 데 실바가 아닌 세르반테스라는 주장도 있고 심지어는 엘 그레코의 자화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초상화에 가슴에 얹은 오른손이 노출된 반면, 왼손은 마치 감춘 듯 프레임 밖에 있는 것도 레판토 해전에서 왼손이 불구가 된 세르반테스를 상징하는 것이라거나 후안 데 하우레기가 세르반테스를 그렸다고 주장되는 그림의 인물과 유사하다는 이야기 등이 이 그림을 세르반테스의 초상화라는 주장과 연관되지만, 그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조르디 사발이 엘 그레코의 초상화와 관련해서 이런 불확실성이나 부정확함을 모르고 이 그림을 돈키호테 음반의 표지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부정확함과 불확실함이 어떤 점에서는 작품 내에서 돈키호테 이야기가 다른 이의 작품을 번역해서 낸 것이라 주장하는 세르반테스의 주장, 그리고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전반적인 돈키호테 이야기의 논조와 주제와 묘하게 상응한다는 점에서 더 어울리는 표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반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돈 키호테>에 얽힌 어릴 적 추억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읽은 청소년 문고본 <돈 키호테>는 그의 본명을 <케사다>라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돈 키호테 = 케사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친구들을 하나 같이 제가 틀렸고, 돈 키호테의 본명은 <키하나>라며 제 무식을 비웃었고 저는 끝까지 고집을 접지 않았기에 이 문제는 돈 키호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다툼이 되곤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완역본을 보고서 이런 어릴 적 다툼이 다 의미 없는 반쪽짜리 지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죠.
제가 <돈 키호테>를 완역본으로 보게 된 계기는 출간 400주년을 맞아 창비에서 민용태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한 <돈 끼호떼>를 통해서인데, 이후 다양한 출판사에서 다양한 판본으로 완역본이 출간되어 요즘은 민용태 / 창비 버전은 추천 순위에서 좀 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20년 전, 책이 출간되던 시점에는 <돈 키호테>를 전문가의 완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아울러 세르반테스의 언어유희를 번역함에 있어 민용태 교수의 연배 때문인지 당시에도 좀 올드하게 느껴지는 농담들이 있지만 작품이 펼쳐지는 배경이 시골이라는 점에서 구수한 맛도 있어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호불호는 돈 끼호떼라는 번역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인명이나 지명에 당시나 지금 통용되는 발음이 아닌 원어에 가까운 경음을 적극 활용했기에 취향에 따라서는 좀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갈리는 듯합니다.

조르디 사발의 음반 <라 만차의 돈키호테 - 로망스와 음악> (DON QUIJOTE DE LA MANCHA - Romances y Músicas)도 민용태 교수 번역본처럼 출간 400주년을 기념해서 기획되고 출시된 음반입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위해 오랜만에 400주년을 기념한 책과 음반을 읽고 감상하면서 당시를 회상하다 보니 지금과 달리 책과 음반을 마구 구입하며 또 그것을 소화해 낼 시간과 열정과 체력(그리고 금전도)이 있던 아련한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묘한 감정이 들더군요.
현대적이다 못해 포스트 모던한 소설
돈 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직접 쓴 소설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를 기록한 아랍어 판본을 번역자를 기용해 번역해서 출판 한 책이라는 설정이 붙어 있습니다. 돈 키호테의 실명에 대한 불확정성도 오히려 이런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중간에 번역자가 이 부분을 번역함에 있어 사실관계에 의문을 품었지만 번역을 한다는 등의 언급까지 나옵니다. 세르반테스는 더 나아가 1권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뒤에 집필된 2권은 등장인물들의 상당수가 널리 유포된 1권을 읽어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어 돈 키호테와 산초의 행적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며 돈 키호테와 산초는 식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유명인의 지위까지 획득했다는 설정까지 붙어있습니다. 1권의 엄청난 인기로 2권 집필 중에 세르반테스가 쓴 것이 아닌, 가짜판본 2권이 발간되는 일까지 있었는데, 세르반테스는 작중에서 그 가짜 판본에 등장하는 설정 오류나 캐릭터의 잘못된 묘사에 대한 비판을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자신의 캐릭터 묘사에 대한 비판을 직접 하게 한다거나, 돈 키호테가 그 책이 가짜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당초 가짜판본과 같은 행선지에서 바르셀로나로 행선지를 변경하기까지 합니다. 그야말로 제4의 벽을 간단히 넘어버리는 것이죠.
1권이 아직 구시대성의 유물로 큰 줄거리와 상관없는 다양한 곁가지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2권은 그런 곁가지 이야기는 사라지고 시종일관 돈 키호테와 산초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러면서도 동굴의 사건과 같이 전혀 사실일 것 같지 않은 돈 키호테의 경험에 대해서도 자꾸만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어 어쩌면 돈 키호테 이야기 자체가 진짜 기록일 수도 있다는 묘한 착각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1권에 비해 2권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돈 키호테와 음악
동-서양의 고전을 읽다 보면 그 자체가 시(詩)인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같은 작품은 별도로 하더라도 많은 작품의 중간중간에 다양한 시와 노래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완역이 대세로 자리 잡기 이전에는 이 시나 노래는 줄거리에 큰 상관이 없다는 이유로 번역에서 가장 먼저 잘려나가곤 했죠. <돈 키호테>의 경우에도 어린이 문고본으로만 읽은 분들은 모르겠지만 중간중간에 많은 시/노래가 나오고, 단순히 시/노래가 삽입되어 있는 것을 넘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리코가 말하듯 둘시네아의 궁전을 찾아 돌아다니던 돈 키호테와 산초가 해 뜰 녘에 일하러 나선 농부가 부르는 론체스발의 노래의 시작 부분인 "론체스보의 파선/ 프랑스인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네" 하는 부분을 듣게 되는 장면에서 돈 키호테가 이 노래를 불운/저주로 생각하는 것이나, 산초가 농부가 칼라이노스를 불렀다고 우리 운명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하는 에피소드처럼 <돈 키호테>에서 시/노래는 늘 줄거리와 캐릭터에 단단하게 얽혀있습니다.
이 얽힘은 단순히 가사로 전달되는 시나 노래만이 아닙니다. 작품에서 돈 키호테가 직접 비후엘라를 연주하면서 로망스를 부르기도 하는 등 음악 자체, 더 넓게는 소리와 정적까지도 작품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물레방앗간 에피소드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쿵쿵거리는 불길한 소리가 사건의 주인공인 것처럼 <돈 키호테>는 음악과 소리와 정적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엮어내는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 키호테>의 이런 청각적 특성에 주목한 사발은 <돈 키호테>의 이런 청각적 특징을 극대화한 음반을 기획했는데 그 결실이 오늘 소개하는 음반입니다. 사발의 <돈 키호테> 음반 기획의 단초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은 에스페리옹 21(Hesperion XXI)이라 불리는 단체가 에스페리옹 20이던 시절, 사발은 세르반테스의 발라드 등을 모은 음반인 <Canciones y Danzas de Espana en la Epoca de Miguel de Cervantes>(미구엘 세르반테스 시대의 스페인 노래와 춤곡들)을 EMI에서 발매합니다. CD로 발매되지 않은 이 음반은 LP라는 매체의 특성상 많은 곡을 담을 수 없었고, 이 점을 아쉬워하던 사발은 출간 400주년을 맞아 <돈 키호테>를 시/노래라는 주역이 함께하는 이야기로 만들어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음반으로 제작해 발매합니다.
음반은 책의 내용을 따라 내레이션과 음악을 섞어 진행됩니다. 이글 첫머리에 인용한 1권 42~43장의 내용을 예로 들면 앞부분은 배경 음악의 반주 속에 해당 노래가 나오는 장면을 내레이션으로 읽어주고 이어서 소설에 삽입된 세르반테스의 시에 음악을 붙인 "사랑의 뱃사공"이라는 노래(작곡가 미상)가 나오는 식이죠. 세르반테스가 작품에 직접 삽입한 시/노래 외에도 음반에는 돈키호테가 각종상황에서 마치 고사성어처럼 인용해 사용하는 구절들을 찾아 그 원전 또한 수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권 제2장에서 첫 번째 모험을 나선 돈키호테가 여관을 성으로 착각하고 여관주인과 나누는 대화에서 주인이 침대 빼곤 얼마든지 편리를 제공하겠다는 이야기에 "성주 나리, 그런 건 괘념치 않소이다. 노래에도 나오지 않소. '나의 치장은 무기뿐 / 나의 휴식은 싸움뿐'이라고."라며 당대에 유명하던 로망스/발라드를 인용하자 여관주인도 뒷 구절을 인용해 "그대의 침대는 딱딱한 바위 / 그대의 잠은 항상 날새는 것"이라며 응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음반에서는 이 둘의 대화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준 뒤, 둘이 인용한 원작 발라드에 뤼스 밀란이 음악을 붙인 노래를 들려줍니다.
이렇게 원작의 텍스트와 그와 연관된 음악, 아니 오히려 반대로 돈 키호테에 나오는 음악을 중심에 놓고 그 음악이 도입되는 원작의 배경 텍스트를 병치함에 있어 음반에 수록된 텍스트는 배경설명을 위해 어느 정도는 축약을 해야 하기에 날것으로서의 세르반테스의 텍스트가 아니라 적절히 다듬어진 문장을 내레이션에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그 선행 내레이션을 위한 적절한 텍스트를 고름에 있어 등장해야 하는 음악이 탄식을 노래한 것이라면 그 슬픔의 이유를 알려주는 문장을 고르고, 사랑 노래라면 그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문장을 배치해서 돈 키호테의 줄거리와 분위기가 내레이션을 통해 적절히 음악에 이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세르반테스의 입지는 그가 경쟁자로 생각하고 이런저런 비꼼의 대상으로 삼았던 동시대의 로페 데 베가(상세한 내용은 이 시리즈의 스페인 황금시대의 음악에 대한 글 참조)에 비해 비할 데 없이 미약했습니다만, 돈 키호테 자체는 다양한 음악적 조명을 받아, 그 점에서는 오히려 로페 데 베가가 따라올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대중적인 작품은 아마도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일 것이지만, 돈 키호테는 1614년 파리에서 발레로 상연된 이래, 퍼셀, 멘델스존,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등 다양한 작곡가들이 돈키호테에 대한 음악을 작곡했고, 많은 애호가들이 음악을 통해서도 돈키호테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개하는 사발의 음반은 이런 음악가들의 돈키호테 사랑을 넘어 원작자인 세르반테스의 시를 가사로 사용한 노래와 그가 인용한 시와 노래를 직접 들려줌으로써 한 차원 높은 음악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음반의 구성
음반의 구성은 두장의 SACD에 아래와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각권별로 주요한 사건에 따라 그 해당 챕터가 명기되어 있고 배경음악과 함께 내레이션이 나온 뒤에 그 내레이션과 연관된 노래가 나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돈 키호테나 알띠시도라 같은 극 중 인물들이 부르는 노래는 물론, 극 중에서 인용된 노래들도 나오며, 마지막에는 돈 키호테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조르디 사발 자작의 라크리모사와 함께 모랄레스의 레퀴엠 중 <피에 예수 도미네>로 마감합니다.
이 시리즈의 책자는 스페인어를 비롯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까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아쉽게도 한글이 들어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제법 높아졌음에도 늘 책자의 언어에서 소외되는 이유가 좋은 번역자가 없기 때문인지, 아직 우리나라의 시장성이 미흡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사발의 이 시리즈에 우리말 번역이 수록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더 나아가 음반에 우리말 내레이션이 수록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스트리밍으로는 우리말 내레이션 버전도 제공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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