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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역사와 음악 시리즈

[음악]역사와 음악 (15) 영국 찰스 1세와 윌리엄 로스의 음악

by 만술[ME] 2026. 6. 26.

 
Nor was the King’s soul so ingrossed with grief for the death of so near a Kinsman, and Noble a Lord, but that hearing of the death of his deare servant William Lawes, he had a particular mourning from him when dead, whom he loved when living, and commonly called the Father of Musick.

  History of the worthies of England, Thomas Fuller (1662)

 
국왕은 가까운 혈육인 고귀한 영주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음에도, 아끼던 신하 윌리엄 로스의 사망소식을 듣고서는, 그를 생전에 늘 음악의 아버지(Father of Musick)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것처럼, 죽은 뒤에도 각별한 애도를 아끼지 않았다. 

― 잉글랜드 명사열전, 토마스 풀러 (1662)

 
 
 

 

윌리엄 로스, 5 성부와 6 성부 콘소트 음악 - 조르디 사발, 헤스페리옹 21 (알리아-복스 / 2 SACD)
[표지그림 : 화가미상, 윌리엄 로스의 초상 / 보델리언 도서관 / 영국, 옥스퍼드] 

 
 
국왕을 사랑해서 죽은, 국왕이 사랑한 음악가
 
앞에 인용한 토마스 풀러의 문장은 아마도 17세기 잉글랜드의 작곡가 윌리엄 로스(William Lawes,1602~1645)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장일 것입니다. 윌리엄 로스는 찰스 1세의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국왕 찰스 1세와 의회의 갈등으로 촉발된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내전이 발발하자 자진해서 국왕을 위해 싸우겠다며 왕당파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를 아꼈던 국왕은 로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를 근위대(King's Life Guards)에 배치합니다만, 제1차 내전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인 체스터 포위 전에서 전사합니다. 이때 국왕의 사촌인 리치필드 백작(Earl of Lichfield) 버나드 스튜어트 경(Lord Bernard Stewart)도 사망했는데, 국왕은 그 와중에도 한낱 궁정 음악가인 윌리엄 로스의 죽음을 챙기며 깊이 애도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거나 훼손되어, 매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시인 토마스 조르단이 쓴 윌리엄 로스의 비문은 아래와 같이 그의 죽음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Will. Lawes was slain by such whose wills were laws."
 
윌리엄 로스의 생애
 
1602년 태어난 윌리엄 로스는 존 쿠퍼(John Cooper)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스승인 존 쿠퍼는 이탈리아식 예명인 존 코프라리오(John Coprario)로 더 잘 알려졌을 만큼 이탈리아 음악에 심취해 있었고, 쿠퍼로부터 로스는 당시 최신 이탈리아 음악의 극적인 표현과 정통 잉글랜드 다성음악을 결합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윌리엄 로스가 찰스 1세와 연을 맺은 것은 아마도 이 스승 덕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존 쿠퍼는 1622년 당시 왕세자(Prince of Wales)이던 찰스 1세에게 고용되었고, 그의 스승도 겸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로스가 당시 왕세자이던 찰스 1세의 음악가로 고용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며, 1626년 스승인 쿠퍼/코프라리오의 사후 형제들과 함께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로스는 가수이자 테오르보 연주자로 이름을 날리며, 이런저런 곡을 작곡하고 음악공연에도 기여를 합니다. 그가 찰스 1세의 왕실 음악가가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여의 세월이 흐른 1635년으로, 사망한 류트 연주자 존 로렌스의 후임으로 기용되었습니다. 이후부터는 줄곳 찰스 1세의 궁정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1645년 체스터 인근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할 때까지 국왕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찰스 1세의 시대 - 불안한 예술의 황금기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잉글랜드의 왕으로 추대된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처형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가계상으로는 헨리 7세의 딸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와 남매지간인 마거릿 튜더의 손녀였기에 늘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1세의 사후에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할 계승권은 명확했죠. 그리고 이 제임스 1세의 아들이 찰스 1세입니다. (위 가계도에 파란색으로 표시한 인물들)
 
찰스 1세가 겪어야 했던 종교적 갈등은 즉위 당시부터 예상되었던 바입니다. 찰스 1세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딸이었던 앙리에트 마리와 결혼했는데, 가톨릭 국가를 표방하고 있던 프랑스의 왕녀를 영국의 왕비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의회가 반길리는 없었고, 찰스 1세는 전비 마련을 위한 과세권 갈등과 총애하던 버킹엄 공작에 대한 의회의 탄핵 시도를 막기 위한 목적과 결혼을 위해 선제적으로 의회를 해산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신-구교 간의 대립이 전쟁으로 비화된 30년 전쟁의 와중이었는데, 전쟁자금과 관련한 문제, 재정 문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반란 문제 등에서 찰스 1세는 의회와 지속적으로 충돌했고, 찰스 1세는 왕으로서의 권한을 주장하기 위해 결국은 1642년 내전이라는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내전이 과거에는 청교도 혁명으로 불리고 요즘은 잉글랜드 내전으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내전의 와중에 국왕이 총애하던 음악가 윌리엄 로스가 죽기도 했지만, 찰스 1세 자신도 패전으로 결국은 1649년 1월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이런 불안한 정국에도 찰스 1세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화가 루벤스는 찰스 1세를 세계 최고의 미술 애호 군주로 칭했는데, 그는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같은 거장을 궁정 화가로 두고 작품 활동을 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예술에 대한 사랑은 일종의 집안 내력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와 어머니 덴마크의 앤 왕비는 예술의 후원자로 유명했고, 요절한 형 헨리 역시 미술품 수집으로 유명했습니다. 찰스 1세는 영국 역대 군주 중 최고의 미술품 수집가라 할 수 있어서 무려 1,500 여점의 그림과 500 여점의 조각품을 소장했는데, 이들은 다 빈치, 라파엘로, 홀바인, 루벤스, 반 다이크 등 최상급의 작품이었습니다. 더구나 찰스 1세의 왕비였던 앙리에트 마리 왕비는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메디치의 막내딸이었던 바, 남편과 함께 미술, 공연, 건축 등을 후원했습니다.
 
음악과 공연을 위한 왕의 극장은 런던의 화이트홀 궁(Whitehall Palace)에 마련되었는데, 이 공연장은 이탈리아 비첸차의 올림피코 극장을 참조했습니다. 찰스 1세는 이 궁전을 처남인 루이 13세의 루브르 궁과 비견될 수 있도록 확장할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국왕은 백성의 행복과 정치적 안정보다는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드 높이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찰스 1세의 미술품 수집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세기의 거래라 일컬어지는 1628년 곤자가 컬렉션 매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찰스 1세는 왕세자이던 1623년 마드리드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왕 필리페 4세의 궁전에 6개월간 머무르면서 스페인 궁전의 수집품에 대한 동경을 가졌는데, 자신의 왕위 즉위 직후 필리페 4세에 대한 경쟁심의 발로인지, 재정이 파탄 날 위기 속에서도 티치아노의 로마 황제 반신 초상화 11점을 포함한 이탈리아 만토바 공국의 거대한 예술 컬렉션(티치아노, 라파엘로, 카라바조 등의 걸작)을 통째로 사들였습니다. 찰스 1세는 이 컬렉션 구입을 위해 빚을 내야 했고, 상환에 무려 2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올리버 크롬웰 정부는 수집품을 매각했는데, 왕정복고 후 아들 찰스 2세에 의해 회수된 작품도 많지만 상당수는 프랑스의 루브르, 스페인의 프라도 등 유럽 여기저기로 흩어졌습니다.
 
찰스 1세가 불안정한 정치, 경제 상황에도 예술에 대한 투자와 후원을 아까지 않았던 배경에는 어릴 적부터 예술 애호가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나 취향, 왕비 앙리에트 마리의 영향 같은 것도 있지만, 찰스 1세가 생각하는 군주의 개념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찰스 1세는 스스로를 절대군주라 생각했고, 절대군주가 되기 위해 평생을 투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왕은 1629년부터 1640년까지 11년 동안 의회를 단 한 차례도 열지 않고 독재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가 의회와 대립하고 결국은 내전으로 나라를 이끈 것은 바로 군주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런 개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후원과 수집은 어쩌면 자신이 절대군주임을 표방하는 하나의 장치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을 절대군주의 권위 강화 도구로 적극 활용했던 찰스 1세 부부의 야심이 가장 극명하게 투영된 장르가 바로 가면극이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직접 신이나 고대 영웅으로 분장하고 무대에 올라, 어지러운 세상을 평화롭게 되돌린다는 서사를 주도했습니다. 이는 훗날 스스로 태양이 되어 왕의 춤을 선보였던 루이 14세의 치밀한 정치적 무대를 묘하게 연상시킵니다.
 
윌리엄 로스, 5 성부 / 6 성부 콘소트 음악
 
국왕이 추구했던 이상은 화려한 가면극을 통한 절대권력의 시각화였을지 모르지만, 화려한 궁궐 내부와는 달리 점점 암울해져 가던 궁 밖의 현실을 감안하면 가면(Mask)이라는 형태는 아이러니하게도 파국을 가리려는 시대적 위장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저히 단절된 궁정 내부의 찬란한 환상과, 밖에서 밀려드는 파국적 현실 사이의 부조화는, 오늘 소개하는 윌리엄 로스의 음악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2002년, 잊혔던 작곡가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조르디 사발과 헤스페리옹 XXI(Hespèrion XXI)이 두 장의 SACD에 담아낸 이 음반은 5 성부 콘소트 5곡과 6 성부 콘소트 5곡 ― 윌리엄 로스가 작곡한 콘소트 전곡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5 성부 콘소트는 비올과 오르간으로, 6 성부 콘소트는 바이올린과 비올, 오르간의 편성으로 연주됩니다.

음반을 들어보면 이전에 소개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음악들과는 확연히 다른, 묘한 이질감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각 성부의 진행에 집중해 듣다 보면, 형식상으로는 당대에도 유행이 지났다 할 수 있는 5 성부와 6 성부의 실내악이, 바로크 음악이라기보다는 마치 20세기 현대음악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합니다. 음들이 겹겹이 쌓여가는 과정은 당대 음악에서 기대할 법한 단단함과 조화로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질적인 균열을 만들어냅니다. 불협화음의 화성들은 안정적으로 해소되기보다, 팽팽한 긴장감을 남긴 채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도 하죠.

윌리엄 로스 음악의 최고 권위자이자 이 음반의 내지 해설을 작성하기도 한 음악학자 데이비드 핀토(David Pinto)는 이 콘소트 모음들에 제목을 붙인다면 사랑과 전쟁 환상곡(Fantasies of Love and War)이라 할 수 있다며, 로스 특유의 거친 불협화음이나 예기치 못한 선율의 도약을 두고 실수나 미숙함이 아닌, 의도된 신경증적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찰스 1세의 궁정이라는 단절되고 폐쇄된 온실 속에서 안주하면서도, 외부의 정치적 파멸과 종교적 갈등이 유발하는 압박감을 음악가들이 묵시적으로 내면화한 결과물이라는 설명입니다.
 
왕에게 사랑받던 음악가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왕의 처형 
 
1645년 9월, 찰스 1세가 직접 지켜보던 체스터의 로우턴 히스 전투(Battle of Rowton Heath)에서 왕당파는 참패하고, 근위대에 속해 있던 궁정 음악가 윌리엄 로스는 적의 총탄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왕에게 사랑받던 음악가의 죽음이나 하나의 전투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이미 기울어가던 왕당파의 몰락을 확인하는 결정적 전투였습니다. 이후 찰스 1세는 수감, 탈출, 그리고 새로운 내전과 패전을 거쳐 1649년 처형되어 튜더-스튜어트 왕조 시절에 꽃 피웠던 잉글랜드의 르네상스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정권이 들어서면서 화려한 궁정 음악과 극장들은 문을 닫았고, 예술가들은 에일하우스 구석으로 숨어들어 근근이 연명해야 했습니다. 조르디 사발이 연주하는 윌리엄 로스의 음악은 튜더-스튜어트 시대 찬란했던 잉글랜드 음악의 인디언 섬머 또는 백조의 노래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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