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BBC 뮤직 매거진에서 발표한 위대한 피아니스트 명단입니다. 100명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에게 각각 세 명씩의 피아니스트를 뽑아달라 한 것을 종합한 결과인데, 이전에 발표된 것과 좀 차이가 있습니다만 라흐마니노프가 1위인 점은 변화가 없습니다. 각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평가는 제 평가가 아니라 매거진의 평가를 요약한 것입니다. 주황색으로 마킹한 피아니스트는 제가 피아니스트가 남긴 전부 또는 대부분의 음반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를 표시한 것입니다. 물론 마킹하지 않은 피아니스트의 경우에도 우치다의 슈베르트나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 녹음, 허프의 중요한 하이퍼리언 녹음들, 쉬프의 슈베르트 소나타 전곡이나 바흐, ECM의 중요녹음 같이 피아니스트 별로 어느 정도 기본은 갖추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 연주자들에 대해서는 주황색으로 마킹한 피아니스트들과는 달리 집중탐구의 시기를 거치지는 않았기에 디스코그래피에 빈틈이 제법 있습니다.

21명의 리스트를 보면 젊은 현역 거장이 세 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세 명 중에 엘렌 그리모의 경우는 그녀의 데뷔부터 한동안 열렬히 음반도 구입하고 음악회도 다니고 했지만, 근래에는 좀 뜸하고 근자에는 오히려 유자 왕의 음악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젊은 다닐 트리포노프는 91년 생이니 젊다고 해도 되겠지만, 유자 왕이 벌써 39세이고, 그리모는 69년생이니 젊은 거장이라는 표현은 이제 어울리지 않고 그냥 현역 거장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21명의 리스트를 BBC 뮤직 매거진의 평가와 함께 옮겨 싣는 것은 지면의 낭비에 불과하기에 약간의 양념 차원에서 각각의 피아니스트의 음반 중 좋아하는 한 장을 골라 간단한 이유를 곁들였습니다. 물론 일부는 순수하게 음악적인 선택도 포함되지만 상당수는 개인적인 추억과 인연이 녹아있는 선택입니다. (초록색)
BBC 뮤직 매거진 선정: 위대한 피아니스트 명단

- Sergei Rachmaninov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경이로운 리듬감과 해일처럼 밀려오는 압도적인 추진력,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통찰력이 담긴 완벽한 타건. 라흐마니노프의 녹음은 이미 수십 년 전에 1919-1942년의 녹음을 모두 모아 RCA/BMG에서 열 장 짜리 전집을 내놓았고, 이후 이런저런 리마스터링이 있었습니다. 그의 협주곡 자작자연 녹음이 가장 보편적인 추천이라 생각합니다.
- Artur Rubinstein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 넓은 레퍼토리에서 예술적 이상향에 가장 근접한 연주자이며, 특히 쇼팽 해석에서 귀족적인 품격과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줌. 루빈스타인의 모든 녹음을 보유하고 있지만 단 하나를 선택한다면, 다른 글에서 소개했던 쇼팽 왈츠 모음집 두 번째 녹음이 루빈스타인의 특징으로 이야기한 귀족적 품격과 우아함의 극치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RCA)
- Vladimir Horowitz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20세기 피아노 기교의 정의 그 자체이며, 화려한 옥타브 기술부터 지적인 탐구심이 돋보이는 후기 해석까지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함. 호로비츠가 남긴 (최소한 발매된) 모든 녹음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 만만치는 않지만 개인적 추억을 무한히 담아 그가 만년에 DG로 이적한 뒤 처음으로 스튜디오에서 남긴 1985년 뉴욕 스튜디오 녹음 음반을 선택하겠습니다. (DG 첫 녹음인 The Last Romantic 음반은 호로비츠의 뉴욕 아파트 거실에서 이루어진 녹음으로 스튜디오 녹음은 아닙니다.)
- Sviatoslav Richter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 음악 속에 완전히 몰입하여 작곡가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는 듯한 연주를 들려주며, 세속적인 명성보다 예술적 진실성을 추구함. 리히터의 수많은 비/정규 녹음 중 한 장을 고른다면 저는 올림피아 레이블로 발매된 슈베르트 소나타 D.664 / D.784 등을 담은 79년 도쿄 실황을 고르겠습니다. 첫 음부터 그의 특징으로 묘사한 몰입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 Mitsuko Uchida (미츠코 우치다) -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해석에 있어 명료함과 섬세함, 그리고 깊은 음악적 통찰력을 갖춘 우리 시대 최고의 해석자 중 한 명. 우치다의 음반을 가장 오랜 기간 들었던 것은 박스로 구매한 그녀의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필립스/데카)과 발매 때마다 한 장씩 구입해 듣던 슈베르트 소나타들(필립스/데카)인데, 둘 중에서는 모차르트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 Alfred Cortot (알프레드 코르토) - 기술적인 완벽함 너머의 드라마와 시적인 웅변을 중시하며, 피아노 소리를 인간의 목소리나 영혼의 오페라처럼 울리게 한 거장. 코르토는 쇼팽을 고르지 않을 수 없는데, 저는 소나타 2, 3번과 발라드 네 곡 등을 담은 비덜프 음반을 선택하겠습니다.
- Stephen Hough (스티븐 허프) - 뛰어난 기교와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모험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연주자이자, 작곡과 저술 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다재다능한 예술가. 허프는 알 알려진 곡도 잘하지만 특히 빛나는 순간은 (이제는 제법 알려졌지만) 몸푸의 피아노 곡(하이퍼리언) 같이 다소 생소한 곡에서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경우라 생각합니다.
- Dinu Lipatti (디누 리파티) - 초인적인 반사 신경과 정교한 기술을 갖췄으면서도, 모든 음이 영혼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듯한 순수한 예술성을 보여줌. 리파티의 음반을 하나만 고를 때 미완성의 연주회를 고스란히 담은 부장송 실황(EMI/워너) 외에 다른 음반을 고르는 애호가는 아마 없을 것이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Artur Schnabel (아르투르 슈나벨) - 베토벤 해석의 기준을 세운 인물로, 화려한 기교보다는 음악의 정신적 가치와 구조적 정직함을 우선시한 '음악가들의 음악가'. 일종의 바이블인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고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저는 이상하게 디아벨리 변주곡 음반(Pearl / 1937 HMV)이 더 끌립니다. 특히나 펄(Pearl) 레이블의 모든 잡음까지 살린 리마스터링으로 들을 때 더 그렇습니다.
- Martha Argerich (마르타 아르헤리치) - 변덕스러우면서도 폭발적인 에너지를 지닌 카리스마의 화신으로, 특히 협주곡과 실내악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동감을 발휘함. 지금까지 수많은 명반을 만들었고, 그중에서도 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버린 연주를 들려준 라흐마니노프 3번+차이콥스키 1번 협주곡 실황 음반(Philips)이 마음 한구석에서 손짓을 하지만, 단 한 장을 고르라면 듣기 전부터 표지의 아우라만으로 아르헤리치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녀의 데뷔 음반(DG / 1960)을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 Emil Gilels (에밀 길렐스) - '강철 타건'과 '황금빛 음색'을 동시에 지녔으며, 베토벤부터 러시아 현대 음악까지 엄격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연주를 들려줌. 길렐스의 음반 중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음반이 많지는 않지만, 그리그의 서정곡집의 음반(DG)만은 언제나 이 음악을 들을 때 처음 손이 가는 연주입니다.
-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악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투명한 음색과 완벽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극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음악적 질감을 창조함. 음반의 수가 많지 않고, 하나하나가 다 훌륭한 미켈란젤리지만, 마음은 그의 음악을 처음 사람하게 만들어준 베토벤 소나타 4번 음반(DG)을 꼽겠습니다.
- Krystian Zimerman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 건반 위에서 가장 여유롭고 완벽한 기술적 평정심을 유지하는 연주자로, 극도로 세밀한 음향 조절과 장인 정신이 돋보임. 경력에 비해 의외로 음반이 많지 않은 지메르만의 음반 중 한 장을 고르라면 그의 정교한 피아니즘의 정수를 보여준 드뷔시 전주곡집(DG)을 선택하겠습니다.
- Alfred Brendel (알프레드 브렌델) -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구조적 복잡성과 감정적 깊이를 지적으로 명확하게 풀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거장. 브렌델의 음반에 대해서는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모음집(Philips)이라고 이미 다른 글에 적은 바 있습니다.
- András Schiff (안드라스 쉬프) - 역사적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적 참여를 통해, 정교한 기술과 감정적 깊이가 조화를 이루는 독창적인 해석을 들려줌. 데카 시절의 바흐, 베젠도르퍼로 녹음한 슈베르트 소나타들도 좋지만 저는 ECM으로 이적한 뒤 녹음한 베토벤 소나타들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중 한 장을 고르라면 작품 31 세 곡과 발트슈타인을 취리히 톤할레 실황(ECM)을 고르겠습니다.
- Yuja Wang (유자 왕) - 전율을 느끼게 하는 비르투오소적 기교와 두려움 없는 해석, 그리고 고전부터 현대곡까지 아우르는 대담하고 매혹적인 무대 장악력.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이런 섞어찌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으로 한번 놀라고, 그런데 그것이 기막힌 파인다이닝으로 느껴진다는 것에 두 번 놀라게 되는 2022년 비인에서의 실황(DG)이 유자 왕이 어떤 연주자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음반이라 생각합니다.
- Ignaz Friedman (이그나즈 프리드만) - 쇼팽의 폴란드적 리듬과 성악적인 멜로디를 본능적으로 포착해 냈으며, 피아노 음색을 인간의 목소리처럼 변화시킨 황금기 거장. 남아 있는 녹음도 많지 않으니 뭔가 추천하기도 그렇고 지금도 가끔 꺼내 듣는 펄에서 모든 솔로 녹음을 모아 발매한 4장짜리 박스를 선택하겠습니다.
- Daniil Trifonov (다닐 트리포노프) - 동세대 중 가장 비범한 재능으로 꼽히며, 정밀함과 열정, 그리고 내성적인 깊이가 공존하는 예술성으로 전 세계의 찬사를 받음. 젊고 왕성히 활동하는 피아니스트인 바, 뭔가 결정반을 선택한다는 마음보다는 나온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꺼내 듣는 음반을 고르자는 생각으로 바바얀과 함께한 둘을 위한 라흐마니노프 음반(DG)을 골라봅니다.
- Hélène Grimaud (엘렌 그리모) - 강렬한 음악성과 정서적 깊이를 지닌 연주자로, 베토벤과 브람스 등에서 보여주는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해석이 특징. 그리모의 음악적 여정을 상당기간 따라가게 만든 에라토 데뷔 음반인 슈만 피아노 협주곡 음반을 선택하겠습니다.
- Radu Lupu (라두 루푸) - 화려함을 멀리하고 내면의 성찰에 집중한 피아니스트로, 벨벳 같은 음색과 시적인 프레이징을 통해 빈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보여줌. 근래에 즐겨 들었다는 이유로 사심을 가득 담아 6장짜리 미공개 녹음집(데카)을 선택합니다. 이런 좋은 연주들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되다니!
- Emmanuel Ax (엠마뉴엘 액스) - 서정적인 해석과 따뜻한 음색을 지녔으며, 독주뿐만 아니라 실내악에서도 동료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섬세한 파트너십으로 존경받음. 저는 독주자로서의 액스 보다 실내악 협연자로서의 그가 더 좋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파트너십은 최근의 녹음들에서도 오히려 더 빛나고 있습니다. 이미 소개한 베토벤 교향곡 편곡 녹음들을 추천합니다.
보너스 - 위 명단에는 없지만 추천하는 피아니스트
위 명단에는 빠져 있지만 다른 피아니스트를 넣을 수 있다면 추천하고 픈 피아니스트들이 있습니다. 객관성은 무시하고 사심만을 가득 담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면 어떤 곡을 연주하건 그만의 음악을 만들어낸 슈라 체르카스키(Shura Cherkassky), 라흐마니노프를 잇는 초절기교 작곡가 피아니스트의 정통파 마르크-앙드레 아믈랭(Marc-André Hamelin), 정확하고 서늘하지만 그 와중에 음악이 뜨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국내서 저만 좋아하는 것 같았던, 찬란한 인디언 썸머를 보여주고 떠난 세르지오 피오렌티노(Sergio Fiorentino), 거장들의 시대 이후 광고문구 같았던 자칭/타칭 러시안 피아노 스쿨의 계승자 중 유독 빛나던 니콜라이 데미덴코(Nikolai Demidenko), 마스턴 레이블을 구독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어지간한 애호가도 전혀 모르는 숨겨진 보석 같은 에른스트 레비(Ernst Levy), 한때 제게 베토벤 소나타 연주의 교과서였던 리처드 구드(Richard Goode)와 스티븐 코바세비치(Stephen Kovacevich), 객관적이지만 기계적이거나 건조하지 않으면서도 심오함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에듀아르트 에르트만(Eduard Erdmann), 당연히 들어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빠져있는 머레이 페라이어(Murray Perahia), 조셉 호프만(Josef Hofmann)과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같은 피아니스트들을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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