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보 소개라기보다는 지난번 같은 제목의 글을 올린 이후에 즐겨 들었거나 아직 즐겨 듣고 있는 음반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따라서 따끈한 신보 소개가 아닌 어느 정도 숙성된 음반에 대한 평가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요즘은 Gramophone 같은 정간물을 구독하지도 않는지라 어떤 음반을 접하는 시점도 발매된 지 제법 된 경우도 많습니다. 아울러 제 음악 생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각종 음반 듣기 프로젝트와 관련된 음반은 소개 대상에서 빠져있습니다.

현재 진행형인 액스, 카바코스, 요요마의 베토벤 교향곡의 피아노 3중주 편곡 버전 음반 시리즈는 매번 나올 때마다 챙겨 듣고 있습니다. 보통 대규모 곡을 소편성으로 편곡하여 연주한 음반은 음악의 깊은 곳까지 엑스레이 촬영을 해서 펼쳐 보이는 느낌 또는 낱낱이 해부해서 보여주는 느낌인 경우가 많고, 덕분에 굵은 텍스쳐 속에서 못 보고 지나치거나 중요하게 생각지 못한 부분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장점이 있는데, 이들 세명의 음반은 이런 거창한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원곡이 3중주 곡인 듯 자연스럽게, 때로는 하이든의 3중주를 연주하는 듯한 소소하고 친밀한 음악적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딴생각 없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준 편곡자인 샤이 우스너와 세 연주자들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티모 안드레스의 음악 모음집 음반인 블라인드 배니스터(The Blind Banister)는 2016년 퓰리처상 결선 진출작인 동명의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하여 2021년 작품인 컬러풀 히스토리(Colorful Histoty), 2017년작 첼로 협주곡인 업스테이트 옵스큐라(Upstate Obscura)의 세곡을 담고 있습니다. 첫 곡이자 타이틀곡으로 안드레스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한 블라인드 배니스터는 피아니스트 조너선 비스를 위해 작곡되었고 그에게 헌정된 작품으로 비스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함께 연주할 새로운 협주곡을 써줄 것을 작곡자 안드레스에게 요청한 것에서 기원하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 초기 협주곡이 작곡된 지 20년쯤 지난 시점에 새로운 카덴차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일종의 ‘리노베이션’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카덴차는 초기 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하기보다는 리노베이션 당시의 성숙한 베토벤의 정신을 담고 있어, 이 카덴차를 붙여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게 되면 카덴차 부분에서 친숙한 과거에서 새로운 미래로 도약하는 단절을 보여줍니다. 블라인드 배니스터라는 곡의 제목은 토마스 트랜스트뢰머의 시구에 영감을 받은 제목으로 베토벤의 음악과 정신이 이 새로운 곡에 준 영감을 표현하기 위해 붙여졌는데, 베토벤의 음악이 새로운 음악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단초를 제공하거나 특정한 구절이 인용되지는 않았지만 베토벤이 새로운 카덴차를 통해 보여주었던 과거와의 단절이 블라인드 배니스터의 작곡에 있어 보이지 않는 가이드로 작용한 것을 의미하는 제목입니다. 이에 대해 작곡가 안드레스는 “베토벤 협주곡을 위한 나만의 카덴차를 쓰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작품을 안에서부터 통째로 삼켜버리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DG에서 녹음한 리게티 죄르지의 음원을 모은 4장짜리 앨범인 Clear or Cloudy는 가끔씩 찾아서 듣는 음반인데, 요즘은 이 음반 첫곡인 하이모비츠가 연주한 첼로 솔로를 위한 소나타로 시작해서 두 번째 음반 첫곡인 Atmospheres까지를 즐겨 듣고 있습니다. 이런 음악 감상의 여정은 제법 그럴듯한데, 충분히 신선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현대음악과 달리 난해하지는 않은 첼로 소나타로 시작해서, 아기자기하면서 독특한 조화를 보여주는 관악 5중주를 거쳐 현악 4중주, 그리고 아바도가 지휘하는 비인 필의 연주가 돋보이는 Atmospheres까지의 다양한 음악의 향연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순서로 음악을 들으면, 첼로가 리게티의 세계를 여는 듯하고, 윈드와 현이 다양한 코스요리를 선사하다, Atmospheres에 이르면 밀려오는 음의 텍스쳐들의 파도가 시공을 떠난 세계로 서서히 침잠하는 느낌이 드는 멋진 결말을 선사합니다.

12월을 크리스마스 음반을 듣지 않고 지날 수는 없는 법. 작년에는 타이달의 추천 플레이 리스트(특히 크루너를 주로 들었습니다)를 들었다면, 올해는 새러 윌리스가 쿠바에서 사귄 친구들이라 할 수 있는 새러반다(The Sarahbanda)의 따끈한 크리스마스 캐럴 신보를 듣고 지냅니다. 새러 윌리스는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의 호른 주자 정도의 실력자임에도 가면증후군에 시달렸는데, 쿠바에서 새로운 음악의 즐거움을 찾게 되어 쿠바 연주자들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담은 음반을 내고, 결국은 새러반다라는 쿠바 음악 앙상블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올해는 DG에서 크리스마스 앨범을 발매합니다. 저야 쿠바 음악을 사랑하기에 쿠바 풍으로 편곡된 캐럴에 고전적인 프렌치 호른이 합류한 이 독특하고 흥겨운 앨범이 반갑기만 합니다. 징글벨, 고요한 밤 같은 곡은 물론 호두까기 인형에서의 편곡,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까지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는데, 이 계절이 다가오면 매년 나오는 다양한 장르의 얼치기 편곡 크리스마스 앨범과는 다른 차원의 음악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프랑스 음악, 특히 이 음반이 선사하는 19세기나 20세기 초반의 프랑스 음악은 즐겨 듣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이 브루 제인의 10장짜리 컴파일레이션 세트는 제게는 축복 같은 음반이자, 딱 적당한 정도의 프랑스 낭만 시대 음악을 담은 최적의 음반입니다. 팔라제토 브루 제인(Palazzetto Bru Zane)은 베네치아에 자리 잡은 낭만주의 시대 프랑스 음악 센터인데, 악보와 자료수집, 연주나 음반 제작지원은 물론 브루 제인 레이블로 자체 음반도 발매하고 있습니다. 이 음반에는 오페라 (2장) / 오페레타와 카페 콘서트 / 칸타타 / 종교음악 / 오케스트라 음악 / 콘체르탄테 음악 / 실내악 / 피아노 음악 / 가곡이 한 장씩의 음반에 담겨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브루 제인 자체 레이블은 물론 여러 레이블과의 협업 녹음에서의 다양한 발췌곡이 들어 있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음악을 뷔페식으로 맛보고 싶다면 이 음반 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을 듯합니다. 이 음반을 듣다 보면 19세기 프랑스 음악을 그리 즐겨 듣지 않는 저 같은 사람도 이 음반에서 맛본 특정한 맛을 찾아 새로운 음반을 구입해 프랑스 음악에 깊이 빠져 들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음악사적으로도 그렇도, 남긴 곡의 수준으로도 그렇고 훨씬 더 알려지고 대접받아야 함에도 묘하게 독일 음악 주류에서 살짝 밀려나 있는 듯한 느낌의 대우를 받는 것이 펠릭스 멘델스존인데, 교향곡만 보아도 CD 세장이면 전곡을 담을 수 있음에도 다른 독일 유명 작곡가들에 비해 교향곡 전곡 녹음의 수도 적고, 그 리스트에 유명 지휘자/악단의 명단도 많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파보 예르비와 취리히 톤할레의 4장짜리 교향곡 전곡 + 한여름밤의 꿈 발췌 음반은 너무나 반가운 세트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내지에 담긴 예르비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톤할레에 취임했을 때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기록에 멘델스존의 교향곡이 빈약한 사실에 놀라서 교향곡 전곡연주를 기획했고, 이 음반은 그 성과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이 음반이 단지 톤할레 오케스트라만의 기록의 차원을 넘어 현대적이면서도 시대연주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리듬감 넘치면서도 투명하고 선율미 또한 기가 막힌 최상의 연주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전곡음반으로는 경쟁자가 없고, 당분간 왕좌를 지킬 수 있는 음반입니다.
'음악 - 예술 - 공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미술]MMCA 해외 명작: 수련과 샹들리에 / 신상호: 무한변주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4) | 2026.01.15 |
|---|---|
| [음악]최근에 즐겨 들은 음반들 (2025년 10월) (2) | 2025.10.16 |
| [음악]알프레드 브렌델 - 필립스 레코딩 전집 (Alfred Brendel - Complete Philips Recordings) (2) | 2025.09.18 |
| [미술]후지산에 오르다, 야마나시(山梨) - 국립청주박물관 (4) | 2025.09.16 |
| [음악]세온 피아노 듀오 시리즈 I (최의종 / 이세란) 후기 (4) | 2025.09.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