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 사건, 조직 등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 인물, 사건, 조직과 유사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본 문서의 작성과정에서 단 한 마리의 저글링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지금은 잊힌 역사에 대한 일방적인 주장을 담고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지난 이야기

폭스 가문의 여성들 - 탄생과 입양의 역사
아직 스타크래프트 밀레니엄이라는 명칭을 얻기 한참 전, 회사 동료들과 시작한 동호회는 극히 일부의 외부 회원의 가입이 이루어지면서 조금씩 진짜 온라인 동호회의 모습을 갖춰갑니다. 아무래도 늘 곁에서 볼 수 있는 회사 동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로 대화하고 글을 올리는 의미를 찾는 데는, 면접적 관계를 벗어난 외부 회원의 유입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부 유입 중 최고는 폭스 가문 여성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최초의 사건은 이쁜여우(NippenFox)님의 등장으로 당시 스탭으로 활동하면서 게시판에 가장 많은 글과 답글을 올리던 저(MansurFox)를 경애하는 마음으로 가입했다는 '기믹'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아이디도 이쁜여우로 정했던 것이고요.
첫 여성 회원의 등장으로 동호회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더구나 (시대를 생각하면 경이롭게도) 등장부터 기존 권력자(?)의 추종자이자 가문의 일원임을 선포했고, 게시판에서도 그 기믹을 훌륭히 소화했습니다. 이어서 자신의 친구까지 동호회에 가입을 시켰는데, 그분은 섹시폭스(SexyFox)라는 아이디를 씀으로써 게시판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죠. 게시판의 활약과는 다르게 실제 게임에는 매우 드물게 참여해서 회사 내 이너서클에서는 그 실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었고, 일부는 동호회 활성화를 위한 저의 자작극 아니냐는 음모론도 생기는 등 여성회원에 대한 당대의 전형적인 시각도 존재했습니다.
이 와중에 메텔님의 화려한 등장은 모든 음모론을 잠재웠습니다. 지금이라면 생각할 수 없겠지만, 당시 게시판에는 사진 게시판도 있어서 회원들이 자신의 모습을 올리기도 했는데, (이쁜여우님이나 섹시폭스님도 사진으로 본인의 실존을 증명하기는 했지만) 메텔님이 올린 사진은 왜 아이디가 메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긴 금발머리 ― 진짜 메텔의 실사화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게시판이나 배틀넷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메텔님이 자신도 메텔폭스(MetelFox)로 개명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동호회의 창씨개명 운동을 촉발합니다. 남성회원들도 귀신폭스 같이 자신의 기존 아이디에 폭스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죠. 더구나 메텔님은 오프라인 모임에도 늘 참석함으로써 오프 모임 활성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웹디자이너라는 (밤샘정도는 일상인)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오프 모임에서 그야말로 새벽까지 달리곤 해서 더욱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아울러 플래시를 이용한 동호회 배너 등을 제작하는 재능기부를 통해 프리챌 게시판의 모습이 좀 더 그럴듯한 모습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실력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동호회 또는 실력은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하기
탄생부터 동호회에 부여한 정체성이 성인/직장인을 위한 스타크래프트 동호회였다면, 동호회의 모토는 '실력보다는 사람을 좋아하는 동호회'를 지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편에서 말한 대회의 규정을 보면 전문 프로리그 규칙의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숨겨진 기제는 그 반대였습니다. 당시 배틀넷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상당수는 무한맵이었고, 유한맵이어도 헌터스 아니면 로스트 템플이 전부였습니다. 다들 익숙하고 아는 맵에서 수백 번 반복한 전략으로 실력을 발휘해서 승리하고 높은 래더 점수를 받겠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이 한정된 맵을 활용한 게임의 관행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국민맵을 벗어나고 싶었기에 처음에는 게임에 포함된 맵들을 활용했지만, 결국은 좀 더 흥미롭고,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스타리그 공식맵으로 동호회 리그를 진행했습니다. 늘 하던 맵이 아니니 좀 더 창조적이고 재미있는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온게임넷 방송을 통해 혀를 내두르면서 본 프로 게이머들의 전략/전술을 흉내 내볼 수도 있지 않냐는 기대를 했습니다. 일부 회원 중에는 자신의 실력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국민맵을 원하기도 했지만 저는 단호히 스타리그맵을 고집했습니다.
즐기자는 생각은 제가 종족 선택 시에 랜덤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미지와 확률을 게임에 넣어 천편일률적인 상황을 방지하고 싶었고, 재미를 좀 더 추구하고 싶었던 것이죠. 이 방식은 상대방의 뻔한 빌드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런 취지는 일부 회원들도 게임을 할 때 랜덤을 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동호회 리그의 숨겨진 다른 기제는 수십 경기를 통한 실력 발휘로 얻는 결과는 결국은 좋은 시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리그 꼴찌도 리그 최종순위를 가르는 라운드에 참여할 수 있고, 최하위도 리그별 라운드에서 윗 순위를 계속 잡아 올라가면 리그 최종 우승자 시드를 배정받을 수 있는 구조이기에 순위상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 이 결승 라운드에는 큰 의미가 있었고, 그래서 리그 마지막 게임까지 버리는 게임 없이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결승라운드를 단판제로 진행했기에 한 번만 기막힌 전술/전략으로 상대를 이기면 되기에 전략이 실력을 이길 수 있는 길도 터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즐기다 보니 실제 게임보다 때로는 다른 회원들의 게임을 보거나 게임을 끝낸 후 나누는 대화가 더 흥미롭고 즐겁기도 했습니다. "까목스님은 또 벙커러시하네", "만장님의 3 게이트 질럿 러시는 꿈에도 나온다" 같은 말이나, "까목스님은 차라리 마린 컨트롤 안 하고 어택 땅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아요" 같은 말들이 오갔습니다.
물론 실력보다 사람들 간의 재미를 추구하는 동호회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을 동호회에 불러 모으고 오프라인 모임도 활성화되는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있었습니다. 동호회를 통해 좀 더 실력 있는 게이머가 되고 싶었던 회원이나 동호회를 통해 실력자들과 겨뤄보고 싶었던 회원들에게는 고만고만한 실력을 지닌 직장인들이 모여서 별난 스타일의 게임을 하는 영양가 없는 동호회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고, 부족한 부분은 다른 곳에서 찾으면서 활동을 유지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죠.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이성(異性)을 좋아하게 되더라, 동성(同性)은 잘 모르겠고
오프라인 모임의 활성화는 장점만큼 많은 문제도 불러왔습니다. 사실 비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동호회를 시작한 기반인 회사, 특히 주요 멤버가 운집된 사업부는 술값으로 회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접대비가 여유롭고 관대했던지라 동호회 모임, 그 오프라인을 위한 대회 상품 같은 것은 모두 저와 당시 마스터이던 까목스님을 비롯한 몇몇 원로들이 부담하면 되었으니까요. 형식적인 회비정도야 걷었지만 말이죠.
겉으로는 바랄 바 없이 좋았습니다. 아이디로만 보던 회원을 직접 볼 수 있었고, 활성화된 게시판에서 나누던 이야기를 직접 나누는지라 의외로 어색함도 없었습니다. 부부가 스타를 좋아하니 얼마나 행복하냐며 다들 부러워하던 부부회원도 있었고, 연인관계이던 회원도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에서 30대까지 직장인 중심의 모임이니 소위 말하는 회식분위기야 익숙한 것이라 동호회 오프 분위기도 어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온-오프에서 활동하는 여성회원들이 있다는 점은 더 많은 여성회원을 가입하고 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 쪽 후문 밖의 음산한 골목길처럼, 화려한 모임의 뒷면은 그림자가 스며들 여지가 충분했습니다. 미세한 조짐인, 한 유부남 원로 회원과 미혼 여성회원의 저만 아는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어느 정도 유명 회원이었던 동호회 유력자이자 유부남인 A와 역시 셀러브리티적인 인기를 누리던 미혼 여성회원 B가 오프라인에서 친해진 뒤 (사실 온라인에서만 대화하다 실제로 만나니 서로 연예인을 실제로 만난 것처럼 신기한 부분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범한 개인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하필 이게 A의 와이프에게 발각된 것이죠. 20여 년 전이니 직장인들의 성인지 감수성은 지금보다 한참 낮았고, 어쩌면 "A님은 제 타입이에요" 같은 농담도 섞여 있었을 겁니다. 결국 많은 정치인이 그렇듯 A는 건강을 이유로 잠시 공식적인 활동을 접어야 했죠. 물론 B는 속사정을 알 수 없었고, 단지 A가 건강 문제로 메시지가 뜸한 것 정도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호회 내의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잠재우기 위해 저는 왕을 수도원에 감금하고 정권 탈취의 야욕을 불태우는 궁재(宮宰)의 기믹을 노골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스며든 그림자는 좀 더 커집니다. 동호회 회원들이 누구나 좋아하는 선남선녀(善男善女) C와 D가 동호회 공식 커플이 되어 엄청난 환호와 축복을 받고, 또 결별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여성회원 E는 F를 좋아하고 남성 회원 G는 E를 좋아하는 삼각관계와 그로 인한 폭행사건도 발생합니다. 이때 즈음에는 게임은 핑계고 오프라인에서 술 먹는 것을 좋아하는 20대 중심으로 동호회가 재편되고 있었고, 이런 모임이 불편하지 않은 몇몇 30대만 이들과 어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들 보다 약간 더 연배인 최초 동호회를 만들고 소위 원로로 자리매김하던 제 또래들은 이 자리에 끼지 않거나 못했고, 점점 게시판 속의 전설이 되어가던 중이었죠. 그리고 이 사건은 게시판의 분란이나 게임대회 운영과 달리 제 카리스마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사건이 벌어지고 한참 뒤에야 알게 될 정도로 오프라인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무지했기에 정권이양에 대한 결심을 확실하게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이건 나중에 다른 이야기와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아무튼 활동성이 강한 회원들의 소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는 잘되건 잘못되건 동호회 입장에서는 활기의 저하로 돌아왔습니다. 잘될 때는 둘만의 활동을 위해 동호회를 등한시하고, 잘 안되면 동호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죠.
다섯 살 차이는 동무고, 열 살 차이는 스승이다 ― 5년은 몰라도 10년은 좀 그렇지
20대가 대거 유입되던 동호회의 전성기이자 침체기의 시작점의 구성은 저를 비롯한 30대 중반의 극 초창기 회원, 30대 초반의 초창기 회원, 20대의 회원들로 크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제 또래와 30대 초반의 회원들과는 형-동생 하면서 격 없이 지냈고, 이렇게 30대가 주축이던 시점에는 20대는 귀여운 친구들, 우리가 이끌면 이끌어지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0대들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제 또래 회원들은 손도 느려지고, 업무량도 늘어나 동호회에 뜸해지면서 동호회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30대 초반의 회원들이 20대 회원들의 형이 되고, 30대 중반의 초기 회원들은 퇴직 임원 느낌이 된 것이죠. 물론 30대 초반의 실권자들이 우리를 형으로 대하고 격 없이 대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20대와는 커다란 거리감이 자리했습니다. 특히 우리가 동호회의 주축일 때는 20대 회원들을 우리가 끌고 가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밀려나는 상황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죠.
30대 중반의 나이에 20대 친구들을 보면서 그냥 조금 어린 동생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였겠지만, 그들은 우리를 영포티 정도의 느낌으로 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는 동호회 형님 이전에 다른 회사 과장님이었던 것이죠. 예나 지금이나 진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진심으로 격 없이 대하는 것은 늘 가능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진심으로 격 없이 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열전(列傳)의 느낌으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을 나열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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