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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영화 <오디세이>의 흥행에 편승한 서점가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마케팅에 올라탄 책소개

by 만술[ME] 2026. 8. 11.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 개봉에 힘입은 서점가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뒷세이아 팔아먹기에 원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블로그에 늘어놓으며 편승하기에는 좀 남사스러운 감이 있어서 한번 더 꼬아서 호메로스의 이 두 작품에 영향을 받은 책 세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기는 놈, 뛰는 놈, 나는 놈, 말하자면 놈놈놈 글쓰기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먼저 소개할 책은 매들린 밀러(Madeline Miller)의 아킬레우스의 노래 키르케입니다. (이은선 옮김 / 이봄) 
 
매들린 밀러 아킬레우스의 노래
 
볼프강 페터젠의 영화 트로이가 의도적으로 신을 배제하고 일리아스를 인간의 이야기로 만들었다면, 매들린 밀러의 소설들은 신의 간섭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아킬레우스는 테티스 여신의 아들로 나오고, 그의 타고난 운명조차 노골적으로 표현됩니다. 신화적인 배경이나 구성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면서 캐릭터에게는 인간적인 숨을 불어넣어 진정한 생명체로 만들어 내는 것이 밀러의 작품의 매력입니다.
 

 
매들린 밀러는 이 이야기를 현대소설로 만들기 위해 (수 없이 많은 작품이 현대화를 명목으로 행한 것과 달리) 이미 알려진 이야기의 큰 줄기를 비틀지도 않습니다. 다만,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친구이자 연인인 파트로클로스의 입으로 전합니다. 전달자가 스펙상으로는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과 어울리지 못할 듯한 파트로클로스인지라 그의 눈에 비친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신격화되기도 하지만, 아킬레우스와 극히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인간 아킬레우스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 덕분에 그의 입으로 전달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는데, 이점은 신의 아들이자 인간 최고의 영웅이라는 아킬레우스의 신화적 이미지와 절묘하게 합치됩니다. 읽다 보면 의지와 행동 사이에 갈등을 느끼지 않는 전형적인 호메로스적 인간인 아킬레우스와 현대적인 인간인 파트로클로스의 대비가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일리아스의 에피소드 중에서도 수없이 회자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생산된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특별한 설정파괴 없이 전달하면서도, 본인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하는 한 청년과 그 청년을 바라보며, 그의 죽음을 막기를 희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소명을 달성하고 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양가의 마음을 지닌 연인의 시선만으로 이야기가 새롭게 느껴지고,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지게 만든 매들린 밀러의 필력은 대단합니다.
 
매들린 밀러 키르케
 
반면 소설 키르케아킬레우스의 노래 보다 더 많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야 했습니다. 오뒷세이아에서 키르케의 등장은 칼립소에 비해 미약하다 할 수 있는데, 오뒷세우스의 고향을 찾는 10년의 방황 중 단 1년 만을 지연시켰기 때문이죠. 그리고 희생자도 의외로 적어 본인의 실수로 추락사한 엘페노르 단 한 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짧은 등장에도 오뒷세이아를 읽고 난 독자에게 키르케의 이름이 더 오래 남는 것은 선원을 돼지로 변신시키는 사악한 마법을 발휘할 수 있으면서도, 오뒷세우스의 칼날에 굴복해서 동침을 제안하고, 결국은 그와 1년의 세월을 함께 하다 고향으로 향하는 오뒷세우스의 최종 목적을 위해 그를 놓아주며 그를 축복하고, (스킬라를 비롯한) 앞길까지 열어주는 다층적인 캐릭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소설 키르케는 그녀의 탄생, 형제자매의 이야기, 불운한 어린 시절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비록 신의 지위를 지녔지만, 올림푸스나 티탄족 신들에 비해서는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인 님프인 신분, 어원상 여신의 뜻 말고도 신부(新婦)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미래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신세, 하다못해 인간들에게 유괴와 겁탈을 당할 걱정까지 해야 하는 존재인, 고작 영생을 보장받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님프 키르케의 어린 시절에서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매들린 밀러는 이 이야기의 여성주의적 성격을 감추지 않습니다.
 
작품이 발표된 2018년에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다루는 것이 특별히 선진적이었다거나 파격적이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2018년 소설이라기에는 남성 등장인물들은 그리스 신화의 신과 영웅답게 (아래 기술한 대로) 호메로스적이며, 단편적입니다. 남성우월주의적이며, 가부장적입니다. 그렇다고 여성들도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주요 등장 캐릭터는 신(神)인데,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인 신의 특징은 결국은 능력이 있으니 사용한다라 할 수 있기에 도덕이나 고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 소설에서 무능력자로 태어나 인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지난한 학습의 과정을 통해 능력을 형성해 가는 존재는 키르케뿐입니다. 그렇기에 키르케는 현대적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천편일률적인 캐릭터 속의 이 극명한 대비는 오히려 키르케라는 캐릭터와 그녀의 이야기를 상투적인 여성주의 소설을 넘어 흥미로운 서사로 만들어 줍니다. 
 
마거릿 애트우드 페넬로피아드
 
오뒷세우스가 20년 동안 집을 비운 동안 독수공방하면서 집안과 나라를 유지한 것은 아내이자 왕비인 페넬로페였습니다. 헬레네의 결혼과 관련해서 구혼자들 간의 연대보증을 획책한 자신의 꾀로 인해 당시로서는 세계를 넘어 신들의 전쟁으로 번진 전쟁을, 본인은 광기를 가장해서 회피하려다 들통나자 같은 처지의 병역기피자인 아킬레우스를 끌고 가 결국은 전장에서 죽음을 당하게 만들고, 10년간 전장에서 지낸 것도 모자라 프리아모스의 왕비 헤카베를 전리품으로 삼았다가 놓아주고, 칼립소, 키르케 등과 살림을 차리기도 하면서 10년을 방황한 오뒷세우스를 무려 20년간 믿고 기다린 것이 바로 페넬로페였죠. 
 

 
 
매들린 밀러의 작품들이 원작의 이야기를 크게 벗어남 없이 고전적인 이야기의 현대화를 도모했다면,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는 여성주의적 접근을 통해 원전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해부해서 작가적 상상으로 구성된 진실을 독자에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트우드는 이것을 신화적 진중함을 걷어내고 오히려 가볍디 가벼운 유머와 해학을 가득 담아 수행합니다. 그래서 헬레네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었으니, 최소한 몽둥이찜질이라도 한번 야무지게 당했어야 마땅할 텐데 아무런 형벌도 받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망친 여자로 묘사되고, 오뒷세우스가 돌아왔을 때 그의 변장을 눈치챘지만, 남편의 그 잘난 체를 눈감아주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아내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모른 척합니다.
 
소설의 문체는 블랙 유머 가득한 오뒷세이아의 패러디라 할 수 있고, 극히 현대적인 대사와 장치 덕분에 술술 읽히면서 즐겁기까지 하지만, 이 속 시원하기까지 한 패넬로페의 입장에서의 이야기가 결국은 그녀 생전에 발화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어서야 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페넬로페가 전달하는 영웅 서사에 가려진 여성의 이야기는 단순한 여성주의적 패러디를 넘어서는 울림을 선사합니다. 
 
부록 : 호메로스의 원작에 대하여
 
그리스어로 원작을 읽을 수 있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호메로스 원작을 읽음에 있어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선 번역과 관련해서, 저는 몇 년 전 이준석 번역의 아카넷 판본이 나오기 전까지 유일한 그리스어 번역본이었던 천병희 번역본(숲) 외에 대안이 없었던 시절에 일리아스오뒷세이아를 읽었던 지라 현시점에 어떤 판본이 좋은지 추천을 할 여건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천병희 번역본을 기준으로, 읽을 때 답답하다거나 너무 고리타분한 느낌이 들지 않는 스타일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운문입니다. 6 보격의 느낌을 우리말로 완벽히 전할 수야 없겠지만, 이 운문의 특징을 번역에서 무시한다면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없고, 그렇기에 소설처럼 쑥쑥 읽히는 문장이 아니라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장엄한 신화시대의 풍광과 영웅의 서사가 펼쳐지는 현대적 의미의 스펙터클을 기대하시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원작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온 것입니다. 따라서 외워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한 구전문학의 특징이 자주 나타납니다. 기억하기 좋게 앞서 말한 운문의 형식을 띠는 점에 더해 기억을 위한 반복적인 관용구가 계속 나타나고, 이게 현대의 독자에게는 어색하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짜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전장이 아닌 막사에 있을 때에도 늘 준족(駿足)의 아킬레우스로 불립니다. 이게 한두 번이면 몰라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면 늘 이런 식에 다른 영웅이나 신들도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부르고 때로는 함선 같은 사물도 유사하게 상투적인 문구를 써서 부르니 좀 어색할 수밖에 없죠. 
 
이런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중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뒷세이아 뿐입니다. 그리고 구전문학의 특징을 생각하면 이들이 문자로 기록된 시점은 오히려 창작시기와 구전의 과정에서 텍스트의 유동성이 넘쳤던 구전시기를 지난 이들 문학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쇠퇴기가 된 연후에야 기록을 통한 보전이 의미 있는 일이 되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서 소위 학자들 간에 중요한 화두인 호메로스 문제(호메로스가 한 명의 작가인가 아니면 여러 명의 집단인가, 또는 두 작품이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사람에 의해 집필된 것인가 등)는 차치하더라도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구전되어 오던 두 작품에 최종적인 형태를 부여한,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과 유사하게) 소재에 있어서는 구전의 전통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독창적인 창작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알려진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호메로스가 과거로부터 구전된 이 소재를 다루는 솜씨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일리아스의 10년, 오뒷세이아의 10년을 작품의 시간 흐름에서는 극히 일부만을 다루면서 모두 소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리아스에서 실제로 작품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아가멤논과의 갈등으로 자신의 진지에 틀어박힌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분노하여 헥토르를 죽이고,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로부터 헥토르의 시체를 찾아 장례 지내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짧고 굵직한 이야기 속에서 영화의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기법처럼 과거의 이야기와 미래에 대한 예견을 작품 속에 다뤄 독자는 트로이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짐작하면서 아킬레우스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오뒷세이아의 경우에는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일을 전달하는 1인칭 화자의 기법을 사용해서 굵직한 사건만을 다룸으로써 10년의 세월을 압축하죠.  
 
일리아스가 그 소재로 인해 역사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반면, 오뒷세이아는 그 기담(奇談)적인 성격 덕분에 역사적 사실 여부와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습니다. 일리아스가 진짜 일어난 일인가, 트로이는 실존했던 도시인가 같은 문제는 많은 학자들이나 취미가들의 탐구의 영역이 되어왔지만,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는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 엄청난 양념이 얹어진 이야기라고 결론이 나더라도 역사책에 한 줄도 바뀌거나 새로 기록될 사항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오뒷세이아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이후의 수많은 이야기의 클리셰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가장 큰 모티브는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영웅이 자신의 경쟁자들을 벌하고 다시 자신의 것(그것이 왕좌이건 여자이건)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선원의 모티브라 할 수 있는, 풍랑, 바다괴물, 섬에서의 고립과 탈출, 여정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랑, 허튼짓하는 동료 선원으로 인한 위기 등이 그것이죠.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늘 그렇듯 결국에는 동료들과 각종 보물을 다 잃고 혈혈단신으로 고향에 돌아갑니다. 
 
등장인물의 동기와 행동에 대해서는 일리아스가 전형적인 호메로스적 인간으로 구성되어 명성의 추구를 위해 모든 동기가 모여진다면 ― 그래서 아킬레우스에게는 명예만이 중요할 뿐 그가 명예를 얻으면 죽도록 결정된 운명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오뒷세이아의 인간군상은 명예보다는 생존이 중요하고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서는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며 전장에 임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 아니다'라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거칠게 말한다면 일리아스에서 오뒷세이아로 넘어가면서 정의가 승리하는 시대에서 승리하는 것이 정의가 되는 시대로 변해버렸다고나 할까요?    
 
호메로스의 원작을 국역본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 이 두 이야기에 친숙하지 못하다면 해설판이나 운문의 느낌을 거의 없앤 동서문화사 판본 같은 것을 추천합니다. 그래야 줄거리를 쉽게 파악하고 소설 읽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운문체 번역의 경우에는 이미 줄거리 정도는 알고 계시는 분이 서사시의 맛을 느끼기 위해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과거와 달리 몇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고, 영화 덕분에 서점에서 쉽게 비교할 수 있으니, 우선은 읽기 편한 버전으로 읽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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