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소설가 사와무라 이치(澤村伊智)의 작품 중에 소위 히가 자매 시리즈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작가의 데뷔작인 보기왕이 온다에서 등장했던 히가 마코토, 히가 코토코 등의 히가 성을 지닌 자매들이 활약하는 세계관의 연작을 일컫는 이름인데, 이들 자매는 주요 등장인물이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아니고 작품은 주로 피해자의 시점에서 1인칭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각 작품마다 이들 자매는 주요 사건을 이끈다기보다는 해결사 정도의 역할만을 수행합니다.
저는 시리즈를 한 권 한 권 읽어가고 있지만 (국내에는 제5권인 젠슈의 발소리까지만 번역이 나와 있습니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첫 번째 작품인 보기왕이 온다 정도만 읽거나 두 번째인 즈우노메 인형까지 읽어 보면, 시리즈의 스타일이나 진행방식이 눈에 보이기에 이 시리즈를 더 읽어야 할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독자는 보기왕이 온다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시리즈는 말하자면 사회파 괴기물이라 할 수 있는데, 첫 작품에는 이런 설정이 새롭고 그럴듯했지만, 같은 방식이 이어지면서 귀신이나 악령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 부른다는 이야기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파적인 구조에서 발생한 범죄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악령이나 귀신이 되는 순간, 추리물로서의 긴장감은 조금 떨어지면서 공포물로서의 긴장만 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사회파 추리소설의, 영적 존재보다 더 무서운 사람을 만들어낸,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가 더 가슴을 먹먹하게 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작가의 이런 선택을 지지합니다. (그러니까 시리즈를 계속 읽고 있죠) 사회파 추리물에 비해 앞서 말한 단점이 있지만, 반면에 뜬금없는 괴기/공포물 보다는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고통이 불러내는 대상이 단순한 악인(惡人)이 아닌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하는 평범한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초월적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영적 능력을 지닌 특수 능력자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데, 이 캐릭터들이 나름 매력적입니다. 능력에 비해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캐릭터는 수없이 보아왔지만, 작가는 이들 자매의 캐릭터 구축을 위해 겉으로는 큰 공을 들이지 않기에 오히려 독자입장에서 그들 자매를 작품에 등장하는 일반인과 같이 살짝 경이로움과 거리감을 지닌 채 바라보게 하는 효과를 내줍니다. 이러면서 작품이 쌓여갈수록 숨겨진 이야기들을 알아가면서 독자 스스로 이들 자매의 캐릭터를 나름대로 구축하고 이미지를 만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토리가 중요한 괴기/공포물을 원하시면 1권이나 2권을 읽고 판단하시면 되고, 일반적인 독자라도 1권 보기왕이 온다 정도는 읽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다만 첫 작품을 읽고 저처럼 이들 자매에 대해 궁금해지신 분들이라면 한 권 한 권 더 읽어 나갈 때마다 조금씩 이들 자매를 알아가는 매력이 있으니 이 점을 참작해서 시리즈를 주파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미약하지만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가 자매 시리즈 이야기를 하면서 첫 이야기인 보기왕이 온다를 소개하거나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이야기를 한 번에 소개하는 방식이 아닌, 네 번째 이야기, 그것도 시리즈의 장편들 대비 얇은 분량(276쪽)의 나도라키의 머리를 소개하는 데는 제가 이 시리즈를 읽고 좋아하는 이유를 다시금 명확하게 해 준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섯 개의 단편을 통해 장편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옛이야기를 엿보며 각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전편들의 이야기들과 그들의 행적이 새롭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도라키의 머리는 여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작품은 지난 장편들의 과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등장인물들이 성숙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사건의 규모나 난이도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쉬운 편입니다. 내용만 보면 엄청나게 공포스럽지도 않아요. 전작들을 읽은 독자라면, 사건의 내용이나 규모에 상관없이 네 번째 이야기인 비명(悲鳴)이 가장 공포스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각각의 단편이 히가 마코토(1편 5층 사무실에서 / 2편 학교는 죽음의 냄새 / 5편 파인더 너머에) / 히가 코토코 (2편 / 3편 술자리 잡담) / 히가 미하루 (2편) / 노자키 카즈히로 (1편 / 5편 / 6편 나도라키의 머리) 등 주요 인물들이 나오는 반면, 4편인 비명은 이들 중 누구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마치 기존 독자를 테스트하려는 듯 4편의 등장인물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4편은 다른 단편과 달리 악역의 탄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악역은 시리즈 2편 즈우노메 인형에서 등장했던 리호입니다. 그녀는 마치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듯, 그녀가 내뱉은 언어를 현실 속의 저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는데, 비명은 어릴 적부터 이런 능력을 발휘했던 그녀의 대학생 시절 이야기입니다.
제가 가장 반가웠던 것은 히가 미하루가 2편 학교는 죽음의 냄새의 주인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즈우노메 인형에서 짧지만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녀를 다시 만나서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이전 작품을 통해 그녀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기에 살짝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언니 히가 코토코와의 대화에서, 단지 유령이 누군가를 해하지 않으니 내버려 둔다는 언니와 달리 유령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최고의 능력자인 언니조차 못 듣던 망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능력자였음을 알게 되었기에 즈우노메 인형에서의 그녀의 선택이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가 되면서 안타까움이 배가 됩니다.
나도라키의 머리는 가장 무섭거나 가장 극적인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히가 자매 시리즈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다시금 확인하게 해 준 작품이었습니다. 장편에서 활약을 했던 인물은 물론, 스쳐 지나갔던 인물들도 이 단편집을 통해 조금씩 입체감을 얻고, 이미 알고 있던 사건들마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됩니다. 1권이나 2권까지 읽고 히가 자매 시리즈를 계속 읽을지 고민하는 독자라면, 오히려 이 얇은 책 한 권을 먼저 읽는 것이 다음 권을 펼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 게임 - 취미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독서]지금 사용하고 있는 북파우치 (4) | 2026.06.25 |
|---|---|
| 레슬매니아 42에 대한 소감 (2026) (2) | 2026.04.22 |
| [독서]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 민음사) (2) | 2026.04.21 |
| [독서]셰익스피어 프로젝트 (2) | 2026.04.09 |
| [독서]셰익스피어 400+10 (6) | 2026.0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