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엄청난 일의 시작
회사의 자기 계발을 위한 예산이 갑자기 증액되어 평소 찜해두었다기 구입지 못한 도서를 몇 권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런 기회에 장만하기 좋은 책은 통독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곁에 두면 두고두고 쓸모 있는, 하지만 가격이 부담되어 쉽게 장만하기는 어려운 책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책 중에 하나로 제 장바구니에 들어 있던 책이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 1~4권 세트였습니다. 권당 7만 원이 넘어가고 1,000쪽에 달하는, 벽돌 중의 벽돌이죠. 두권 정도 읽어 본 바로는 책의 구성이 사실상 통독을 전제로 하지 않고 그야말로 서양 중세 공부를 위한 방대한 참고서입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이런 방대한 책을 곁에 두고 있어도 들춰보는 것은 어쩌다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제가 역사와 음악 시리즈를 블로그에 올리고 있어서 그렇지, 고음악이나 중세 미술은 제 주요 관심분야도 아니어서 음악이나 미술 공부를 위해서 에코의 책을 뒤질 일도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책이 진정한 쓸모를 가지려면 서양 중세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시절 르네상스,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등 사학과의 전공과목들을 (제 입장에서는) 교양과목으로 선택해서 듣기도 했고, 이런저런 단행본을 통해 다양한 역사서적을 섭렵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모두 체계 없이 흥미로운 주제와 시대를 골라 읽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에코의 책이 의미를 지니려면 우선적으로 그간 두서없이 학습했던 서양 중세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특정 강좌를 수강하거나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이런저런 책을 통한 독학이 전부이겠지만요.

인공지능과 함께 한 로드맵 작업
우선은 제가 이미 읽어 보유하고 있는 책들을 정리해 로드맵에 포함할지를 결정하고, 필요한 책을 추천받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책들이나 추천받은 책들 중에 심화학습 단계로 넘겨야 할 책을 골라내고, 필요한 책 중에 제 취향이나 필요에 더 맞는 책을 찾는 과정은 두 개의 인공지능 서비스와 함께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양의 중세와 병행해서 펼쳐지는 비잔티움의 역사를 끼워 넣었고, 핑켈의 오스만 제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 책도 로드맵에 넣어 약간은 사적 취향을 가미했습니다. 십자군 같은 각론을 다룬 책들은 우선 배제했고 흐름을 다루는 책들만 남긴 뒤에 결국은 이 모든 일의 발단인 에코의 중세로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두 개의 AI와 함께하는 로드맵 작업은 제법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주변에 서양 중세사 및 비잔티움의 역사 공부 로드맵에 대해 상담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 이런 경우 AI가 많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잘못되거나 부족한 정보를 파악하고, 제 의도와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교류하면서 하나하나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은 회사에서 직원들과 프로젝트 로드맵을 만드는 과정처럼 사용자가 분명한 리더십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진행해야 합니다. 어떤 책을 추천한다고 할 때도 그 이유를 따져 묻고, 대안을 탐구하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처음에는 AI에게 "중세사를 공부하려는데 책을 추천해 달라"라고 물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좋은 답을 얻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질문을 설계해야 했습니다. 어떤 책을 왜 넣는지, 왜 빼는지, 제가 원하는 공부의 방향이 무엇인지 AI와 계속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씩 정리해 나가야 했습니다.
서양 중세사 및 비잔티움의 역사 공부 로드맵
이 로드맵은 결론적으로 (에코의 중세를 4권으로 산정할 때) 14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틀라스가 1권, 서양 중세사가 3권, 비잔티움 역사가 3권, 오스만제국의 역사가 1권, 1차 사료집 1권, 도록 1권, 그리고 서양 중세와 비잔티움을 아우르는 에코의 책이 4권입니다. 책 값도 비싸고, 국역본 중에도 좋은 책이 많은지라 원서는 네 권만 넣었습니다. 한 권은 서양 중세의 역사를 다양한 지도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아틀라스 형태의 책이라 원서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고, 다른 두 권인 로젠와인의 책은 제가 가지고 있는 다른 서양 중세사 책들과 달리 교과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책과 1차 사료 모음집의 역할을 하는 책으로, 국내에는 번역본 중에 이런 류의 책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중세의 역사를 생각할 때, 그 중세의 모습을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는 중세 수도원에 대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도록이 마지막 한 권의 원서입니다.

제가 역사학도도 아니고, 특별히 역사에 대한 관심이 있어 시작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중세 1~4라는 책이 쓸모 있는 책이 되게 하려는, 그래서 그 책 보다 더 많은 책을 읽는 조금은 황당한 이유에서 시작된 일이고, 한편으로는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은 체계적으로 파고 들어가 봐야 할 이야기들이니 계기가 주어진 김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어차피 마음 다잡고 이 책들만 읽을 것도 아니고, 로드맵 자체가 여기저기 외도를 하게 꾸며져 있는지라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될 듯합니다. 학부에서도 서양 중세사는 보통 두 학기 분량인데, 저는 비잔티움에 오스만 제국도 다루니 더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서양 중세사 1단계 로드맵 (rev. 1.1 추가)
1단계 독서에 있어 병행 독서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한 가이드가 필요했습니다. 중세사 공부의 시작이 에코의 중세 1~4를 기반으로 했던 것인 바, 각권의 시대구분을 따라 중간중간에 쉬어가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1단계에 참고하는 모든 책의 구성이 에코의 책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개략적으로 아래 로드맵과 같은 정리가 가능했습니다.

대략적인 독서과정은 로젠와인의 한 챕터가 끝나면 그에 관련된 Atlas의 항목을 읽고, 해당 부분 전체를 읽지는 않지만 타이어니의 서양중세사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내용을 읽습니다. 그리고 에코의 책도 같은 방법으로 몇 개 항목을 읽습니다. 이렇게 읽은 뒤 다시 로젠와인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 반복합니다.
로젠와인의 책에서 한 색깔로 구분된 블록이 끝나면, 역사, 철학, 문학 등 각 시기별 분야별로 정리하기 딱 좋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 에코의 책의 각 파트의 맨 앞에 나오는 분야별 서문들을 읽습니다. 이어 인터메쪼(간주곡)로 되어 있는 책을 읽는데, 이 책들의 목적은 잠시 쉬어가면서 교과서적인 책을 떠나 해당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주는 책들을 골랐습니다. 물론 이 중에 먼 거울을 제외하면 과거에 이미 읽은 책이지만, 중세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뒤에 이 책들의 이야기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도 흥미로운 관건입니다.
여기에 블로그의 역사와 음악 시리즈에서 다루는 조르디 사발의 음반과 해당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을 덧붙였습니다. 광범위한 이야기로 풀어낼지 아니면 특정한 사건과 연관해서 풀어낼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만, 어쩌면 이 중세사 공부의 진척도는 역사와 음악 시리즈 게시물로 파악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하면 역사를 공감각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저만의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체화할 수 있는 장점이 생기리라 봅니다.
이걸 달성하고 나면 아마 르네상스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rev. 1.1 (2026.07.27) 총괄 로드맵 업데이트 - 약간 세밀한 조정을 했습니다.
서양 중세사 1단계 로드맵을 추가로 작성했습니다.
rev. 1.2 (2026.08.03) 서양 중세사 1단계 로드맵 수정 - 조르디 사발 음반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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