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톰 베힌(Tom Beghin)이 연주한 C.P.E. Bach 변주된 반복을 곁들인 소나타(Sonatas with Varied Reprises), Wq 50 음반의 연주자가 직접 쓴 내지 해설의 번역입니다. 연주에 있어 반복(Reprises)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어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AI 시대에 번역을 블로그에 올리는 일이 구태여 필요할까 스스로도 의문이기는 합니다만, C.P.E. Bach의 작품 제목을 번역함에 있어 "with"를 고급스러운 요리 이름을 연상시키는 "곁들인"으로 번역하는 센스는 AI가 따라오려면 조금 더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며 명분을 찾아 봅니다.

변주의 진정한 예술에 관한 에세이
C. P. E. 바흐의 '변주된 반복을 곁들인 소나타(Sonatas with Varied Reprises)', Wq 50
톰 베힌 (Tom Beghin)
반복은 즐겁다
"반복은 즐겁다." 호라티우스(Horace)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격언은 반복이 즐거움을 배가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의 『시학(Ars poetica)』(361~65행)을 살펴보면 더 구체적인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를 그림에 비유하며(ut pictura poesis) 이렇게 말한다. "이 [그림은] 단 한 번만 즐거움을 주었으나, 저 [그림은] 열 번을 반복해도 항상 즐거움을 줄 것이다(haec placuit semel, haec deciens repetita placebit)." 만약 우리가 호라티우스의 이러한 비평적 관점을 뒤집어 음악 연주에 적용한다면, 좀 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반복이 과연 본질적으로 음악 작품을 더 좋게 만드는가?
대부분의 음악 형식 내에서, 반복은 오랫동안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18세기 후반부터 기악 음악을 지배해 온 전형적인 형식인 소나타(sonata)는 곡 내부의 반복(internal repeats)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제시부(exposition)'가 반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으며, 다른 편으로는 후반부를 형성하는 '발전부(development)'와 '재현부(recapitulation)' 역시 반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양편에 점이 찍힌 겹세로줄(double bars) 형태의 도돌이표(repeat signs)라는 악보상의 관례는 이러한 기대를 굳혀, 형식적 대칭성이건 지속적인 즐거움에서건, 반복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도전받지 않았다.
그러나 향후 이에 대한 불안감이 감지되기 시작했는데, 음악학 문헌에서는 1797년 그레트리(A.M. Grétry)가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 다음의 인용구가 그 시점으로 지목되곤 한다. "소나타는 하나의 연설(oration)이다. 자신의 담화를 반으로 자른 다음 그 각각의 절반을 반복하는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뭐라 생각하겠는가? '나는 오늘 아침 당신의 집에 있었습니다; 네, 나는 오늘 아침 당신에게 무언가에 대해 말하기 위해 당신의 집에 있었습니다; 당신과 무언가에 대해 말하기 위서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음악에서의 반복이 나에게 미치는 효과다."
이러한 생각은 파리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1782년 베를린의 라이하르트(J. F. Reichardt)는 "음악에서 반복이, 특히 어떤 중요한 주제의 반복이 기분 좋고 필수적일 수 있는 것처럼, [...] 곡의 끝에서 처음에 시작했던 곳으로 시종일관 되돌아가는 것 또한 부자연스럽고 무의미한 일이다."
오히려 그레트리가 소나타를 하나의 "연설(oration/discours)"로 언급한 바로 그 수사학적(rhetorical) 패러다임 속에서 반복은 단지 용인되는 것을 넘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20년 전인 1777년에 C. L. 융커(C. L. Junker)는 "두 번째 반복(bey einer zweiten Wiederholung)을 통해 모든 음악적 인상이 더 큰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름다움은 반복되지 않는 전달(Vortrag)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고 경험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라고 주장했다. 융커가 수사학적 '연기(actio)'나 '발성(pronuntiatio)'의 등가물로서 '전달(delivery)'을 언급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명시하지 않은 것은, 연주자들 또한 그들의 반복을 '변주(vary)'했으리라는 사실이다. 같은 것을 두 번 똑같은 방식으로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은 18세기 중반의 거의 모든 연주법서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1752년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J. J. 콴츠(J. J. Quantz)는 단순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변주하는 방대한 옵션들을 보여주는 변주에 관한 전체 장의 끝에서 "변주와 관련된 이 모든 규칙들은 주로 아다지오(adagio)를 겨냥한 것인데, 왜냐하면 아다지오야말로 변주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시간과 기회(Gelegenheit zu verändern)를 가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규칙들 중 많은 것들을 알레그로(allegro)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레그로에 관한 [규칙들]은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라고 적고 있다.
알레그로를 변주하는 것은 콴츠(Quantz)의 베를린 궁정 후배인 건반 연주자 겸 작곡가 C. P. E. 바흐(C. P. E. Bach)가 계속해서 탐구한 주제였다. 바흐는 1753년에 출판된 그의 중요한 저서 『올바른 피아노 연주법(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Clavier zu spielen)』(이하 Versuch)의 맨 마지막 단락에서, 이 책의 부록으로 출판된 연습곡(Probestücke) 중 하나를 예시(ein Abriß)로 들며 "오늘날 두 개의 반복부(reprises)를 가진 알레그로를 두 번째 연주할 때 어떻게 변주하는 경향이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제3장, § 31). 그의 단어 선택에 주목하면, 두 번째로 발생하는 융커의 '반복(Wiederholung)'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바흐는 소나타 형식 내에서 두 번 연주되어야 하는 특정 섹션("알레그로")을 지칭하기 위해 "반복부(repris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동어반복(pleonasm)이라는 의미를 제거한 이런 단순한 언어("반복부를 반복한다"는 말은 다소 이상하게 들린다)는 악보에 보이는 방식(도돌이표로 경계 짓는 형식적 섹션으로서의 반복부)과 그것이 어떻게 들려야 하지(반복될 때 장식되거나 변주됨) 사이의 차이를 암시한다. 바흐에게 중요한 것은 반복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연주자가 즉흥적 변주(improvised variation)의 관행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압박을 어느 정도까지 느껴야 하는가였다.
변주된 반복을 곁들인 소나타 (Sonatas with Varied Reprises)
바흐는 변주된 반복을 곁들인 여섯 개의 소나타(Six Sonatas with Varied Reprises, Wq 50)를 통해, 대담한 실험에 착수했는데, 작곡가이자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을 섞어가며, 지나치게 널리 퍼져 나가기를 원치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를 목표로 했던 모종의 관행에 기여코자 했고 이는 수많은 문제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다.
클라비어를 위한 변주된 반복을 곁들인 여섯 개의 소나타(Six Sonates pour le Clavecin avec des Reprises Variées 혹은 Sechs Sonaten fürs Clavier mit veränderten Reprisen)는 1760년 베를린의 게오르그 루트비히 빈터(Georg Ludwig Winter)에 의해 출판되었다. 바흐는 이 작품을 자신의 고용주인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의 여동생 아마리아 공주(Princess Amalia)에게 헌정했다. 바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된 제목과 서문이 있는 이 이중 인쇄물(발행인의 이름도 "George Louïs Winter"와 "George Ludewig Winter"로 표기됨)을 통해 1753년 출간한 연주법(Versuch) 이후 교육자로서 싹트고 있던 자신의 명성을 확고히 하고자 했음이 틀림없다.
이 악보의 참신함은 전체 34페이지에 걸쳐 단 하나의 도돌이표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대신 바흐는 변주의 기법을 각각에 적용하면서 전체 반복부의 모든 반복을 일일이 악보에 기입해 놓았다. 바흐 자신이 서문에서 설명하기를,
이 소나타들을 작곡함에 있어, 나는 주로 초보자들, 연령이나 직업 등의 이유로 충분한 연습 시간이나 인내심이 부족한 아마추어들을 고려했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이런 변주곡(Veränderungen)을 창작(erfinden)해야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곡을 써 달라고 부탁해야 할 필요 없이, 그리고 많은 노력을 들여 그것들을 외워야 할 필요 없이, 변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간편한 수단을 제공하고 싶었다. 끝으로, 나는 좋은 해석(zum guten Vortrage)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것을 명시적인 방식으로 악보에 표현해서, 연주자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auch bey einer nicht gar zu guten Disposition) 일지라도 전혀 문제없이 자유롭게(mit aller Freyheit) 이 곡들을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쓴 변주곡을 암기해야 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스스로 무언가를 창작(수사학적 '창작(inventio)'은 음악적 사고나 '사물(res)'을 위한 장소로 환기된다)해야 한다는 염려 대신에, 바흐의 <바른 피아노 연주법(Versuch)>에 명시된 해석의 전형을 적용하면서 잘 마련된 대본(단어 또는 '언어(verba)')을 읽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웅변가와 음악가 모두에게 있어 훌륭한 해석은 이상적으로는 약간의 준비되지 않은 장식이나 변주를 포함하지만, 여기서는 "전혀 문제없이 자유롭게"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읽는 것에만 국한할 수 있다.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것은 또한 이 실험이 탄생한 사회문화적 네트워크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서문을 마무리하며, 바흐는 자신이 "내가 아는 한, 후원자들과 친구들의 유용함과 즐거움을 위해 이런 방식(auf diese Art)으로 작업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쁘다"라고 선언한다. 이런 독창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인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J. A. P. 슐츠(J. A. P. Schulz)는 J. G. 줄처(J. G. Sulzer)의 1774년 백과사전 <순수 예술에 관한 일반 이론(Allgemeine Theorie der schönen Künste)>에 기고한 글에서 바흐의 변주된 반복이 있는 소나타를 "변주의 예술(Kunst zu verändern)"에 있어서 "훨씬 더 높은 장르(Gattung)"로 추켜 세웠기 때문이다. G. W. 뢸라인(G. W. Löhlein), J. W. 헤슬러(J. W. Hässler), F. W. 루스트(F. W. Rust) 등의 다른 작곡가들도 바흐의 선례를 따라 변주된 반복을 곁들인 소나타들을 출판했다.
반면 대럴 버그(Darrell Berg)와 다른 이들이 상기시켜 주듯이, 변주된 반복을 곁들인 소나타는 바흐의 경력 전체에 걸친 그의 연주 관행의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760년 이전이나 이후 모두에서 우리는 이러한 악장들의 예를 50여 개나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1753년 연습곡(Probestücke)에 수록된 단 하나의 악장을 제외하고는 1760년 이전에 인쇄물로 출판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바흐가 주목한 바와 같이, 아마추어 연주자들에게 있어 지나치게 큰 부담이 되어가고 있던 연주 관행의 난점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변주된 반복부를 인쇄물로 제시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올바른 피아노 연주법(Versuch)>에서 바흐는 반복을 변주하는 "창작(Erfindung)"을 가리켜 "감탄할 만하지만,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다"라고 말한다(제3장, § 31). 그가 Wq 50의 서문을 시작하면서, "필요에 쫓겨, 제지된 음표들의 표현에서 미흡한 점을 변주에서의 뻔뻔함으로 대체하려는 사람 [...] '브라보'를 기대하면서 주어진 음표들을 우선적으로 연주할 인내심조차 없(이 화려한 변주를 제시하)는 사람"의 모습을 비꼬듯 묘사한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청중이 좋은 연주자뿐만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바흐의 생각에 위계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작곡가에게도 해로운 유행을 퍼뜨리는 데 공범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청중이 그의 새로운 출판물의 타깃 시장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즉, 바흐가 조롱했던 바로 그 변주에 집착하는 '예비 거장(would-be virtuosos)'들에게 노출되었을 법한, 레슨을 받는 "초보자들과 아마추어들" 말이다.
그렇다면 바흐의 소나타는 어느 정도까지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을 때조차도 문제없이 자유롭게 이 곡들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맥락에서 "자유(freedom)"는 일반적으로 즉흥 연주(improvisation)를 의미한다. 바흐가 "청취자들의 마음을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즉흥적인 [즉, 자유로운] 환상곡(fantasies)을 통해서이다"(Versuch, 제3장, § 13)라고 이야기할 때 야심 찬 프로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자유로운 환상곡 연주를 위한 몇 가지 이론적 지침을 공유하기 위해 1762년에 출판된 <올바른 피아노 연주법(Versuch)> 2권의 마지막 장까지 기다렸다. 대조적으로 Wq 50 작품에서 그는 명시적으로 아마추어들(압도적으로 여성이었을)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며, 어떠한 상상력도 필요 없는 세심하게 준비된 악보를 제공한다. 여기서는 "그냥 (악보대로) 읽기만 하면 성공할 것이다"라고 약속하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 성패가 달려 있는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연주자인가, 아니면 바흐 자신인가?
이제, 도돌이표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악보를 제시받았을 때의 실제적인 결과들을 몇 가지 생각해 보자. 바흐는 이런 악보의 이점을 칭송하지만, 잃는 것은 없을까?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구조와 관련된 명확성이다. 반복되어야 할 반복부와 관련하여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더 이상 늘 명확하지는 않다. 둘째, 페이지 넘김에 부여될 수 있는 일종의 수행적 의미(performative meaning)의 부재이다. 첫 번째 반복부 이후에 우리가 의도적으로 눈을 돌려 "맨 위로" 돌아갈 때 페이지 넘김을 미루거나, 혹은 우리가 두 번째 반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는 신호로서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의 부재 말이다. 18세기의 악보 읽기 문화에서 이러한 페이지 넘김 순간들의 수사학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연주 행위/관습에 단단히 박혀 있는 이런 행위는 오늘날 연주자가 모든 것을 암보로 연주하는 독주회나 녹음된 음악을 듣는 경험과는 전혀 다르게, 못 보고 지나칠(un-seen)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연주자가 페이지에 있는 것을 읽으려고 하거나 반대로 변주에 착수하여 텍스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관련된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음악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한 빠른 페이지 넘김도 있지만, 이 역시 18세기의 관찰자에게는 이해되었을 것이며 감상 경험의 흥분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반면 바흐의 <변주된 반복(Varied Reprises)> 인쇄물에서 페이지 넘기기는 완전히 글로 쓰인 대본의 지속적인 전진 운동에 부수적인 것이 된다. 연주자가 가상의 즉흥 연주(make-believe improvisation)를 완벽하게 구현함에 있어 텍스트를 암기할 것을 권장하는 것으로부터 바흐는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의문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는 자신의 음악을 외워서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모두가 경이를 느낀 예외적인 위업), 다른 사람의 음악을 암기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모차르트와 같은 전문가에게 기대되었던 기술은 초견(sight-reading), 즉 다른 사람의 작품을 처음 보고 쉽고 정확하게 연주(prima vista)하는 것이었다. [변주까지 곁들여진] 악보를 외워야 하는 의무는 초보자와 아마추어 연주자라는 타깃 그룹의 자유를 더 박탈하고 그들을 수십 시간의 연습에 얽매이게 했을 터인데, 이 역시 매우 시대에 맞지 않는 개념이다. 이보다는, 더 나은 즉흥 연주자나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음악 이론을 배우는 데 시간을 할애하라는 것이 더 나은 제안이었겠지만, 그 공부(이제 우리는 역설의 핵심에 다다르고 있다)는 대체로 남성 학생들만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바흐는 자신의 1760년 출판물이 초보자와 아마추어를 위한 것이라고 홍보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역설적으로 바흐와 같은 작곡가 겸 건반 연주자를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위계를 확인시켜 주었을 것이다.
[각각의 곡에 대한 이론적 설명에 대한 번역은 생략]
클라비코드에 대한 마지막 메모 하나. 이 녹음을 위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라비코드를 사용했다. 1760년경의 작센(Saxon)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한 20년 이상 된 5옥타브 폿블리허(Potvlieghe) 악기로, A부터 f3까지 이르는 레퍼토리를 연주하기에 안성맞춤인 5옥타브 범위(F부터 f3까지)를 갖추고 있다. 바흐의 질버만 악기는 A부터 e3까지의 범위를 지녔으며, 바흐가 라이하르트를 맞게 될 함부르크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던 1767년경에 이 악기는 보다 최신식인 5옥타브 프리데리치(Friederici) 악기로 보완되었을 것이다. <청음 기계 속에서(Inside the Hearing Machine)>(2017, EPRC0025)와 <베토벤의 프랑스 피아노(Beethoven's French Piano)>(2020, EPRC0036) 같은 이전 녹음 프로젝트에서, 나는 베토벤이 생애의 각 단계에서 두 대의 새로운 악기를 경험했을 때의 마음을 연상하면서 새로 제작한 두 대의 피아노 복제품의 신선함을 뿌듯해했다. 반면 클라비코드로 C. P. E. 바흐를 연주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악기와의 길고 개인적인 관계가 참으로 걸맞고 적절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 악기는, 잊힌 역사적 관행뿐만 아니라 18세기의 주요 음악적 인물 중 한 명을 대표하는 주목할 만한 레퍼토리, 즉 "키보드 키웍스(keyboard keywork)"를 탐구하는 데 있어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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