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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역사와 음악 시리즈

[음악]역사와 음악 (16) 토비아스 흄의 '유머(humor)'에서 시작된 유머러스한 이야기

by 만술[ME] 2026. 7. 20.

엘리자베스 시대찰스 1세 시대의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소개했어도 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어 한 꼭지로 따로 다루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음반이 있습니다. 조르디 사발이 비올라 다 감바로 연주한 (이름 때문에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친척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법도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토비아스 흄(Tobias Hume)의 음악을 담은 알리아-복스의 음반인데, 이 음반은 국내 수입 시 아래 사진과 같은 해설/홍보 문구를 붙이고 나왔습니다. 

 

 

음반의 제목인 Tobias Hume : Musicall Humors토비아스 흄 : 희극적 기질로 번역했는데, 기질(氣質)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희극적(喜劇的)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오역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제목을 만들어 냈습니다. 작은 글씨로 적은 음반 설명을 오류 없이 제대로 적은 것을 보면 이런 묘한 음반 제목이 나온 이유가 더 궁금해집니다. 괴팍, 호전적인 기질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는 희극 또는 (현대적 의미의) 유머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도 하니까요. 

 

Humor는 유머가 아니다

 

Humor라는 용어는 원래는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웃음/해학 같은 의미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Humor라는 단어는 즙이나 수액을 뜻하는 말인 그리스어 'χυμός(chymos)'에서 시작하여 라틴어 humor를 거쳐 영어의 humour(humor)로 이어진 말로 처음에는 고대인들의 의학에서 비롯한 용어였는데, 사체액설(Four Humors)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에서 출발한 갈레노스 의학에 의하면 인간의 신체는 네 가지 체액의 균형에 의해 유지된다고 보았습니다. 혈액(Blood) / 점액(Phlegm) / 황담즙(Yellow bile) / 흑담즙(Black bile)이 그것인데, 마치 우리에게 익숙한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유사하게, 이 체액이 사람의 건강과 성격을 결정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체액의 균형이 건강한 것이며, 균형이 무너지는 경우 인체는 고통을 느끼거나 병에 들게 되고 각각의 체액은 그 특징에 의해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에도 영향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혈액(Blood)은 (우리가 다혈질이라는 용어를 아직도 쓰고 있듯) 열정적, 활동적, 사교적인 특색을 띠고 붉은 피를 가진 사람은 친절하고 잘 웃으며 약간 붉고 예쁜 피부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황담즙(Yellow bile)은 야심 차고, 단호하며, 공격적이고, 성미가 급한  담즙질의 기질을 나타내며, 흑담즙(Black bile)은 그리스 원어인 μέλαινα χολή(melaina kholé)로도 짐작할 수 있듯 게으르고 두려움이 많으며 병약한 우울질(멜랑콜리)의 기질을 지닙니다. 점액(Phlegm)은 점액질로 내성적인 행동의 기질을 지닙니다. 

 

토비아스 흄 또는 17세기의 Humors

 

네 가지 체액에 대한 의학과 기질에 대한 이론은 중세를 거쳐 17세기에도 널리 통용되는 이론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셰익스피어 보다 10년 정도 후배이자 함께 활동했던 벤 존슨(Ben Johnson)은 Comedy of Humour(기질 희극)이라는 기치아래 네 가지 체액에 대한 이론을 연극에 도입해서 이를 풍자의 도구로 삼아서 특정 성격이나 강박 관념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우스꽝스러워진 인간 군상을 묘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십인십색 같은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의 원제가 Every Man in His Humour입니다.

 

조르디 사발이 녹음한 토비아스 흄의 음악집 제목인 Musical Humors도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유머가 아니라 바로 이 17세기 용법으로 Humor를 해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조르디 사발 음반의 수입사에서 붙인 희극적 기질이 아니라 음악적 기질이 올바른 번역이며,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바꾼다면 음악으로 표현한 기질들 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듯합니다. 실제로 토비아스 흄의 작품집에 수록된 곡들의 제목은 나의 희망은 사그라들고(My Hope Is Decayed), 들어라, 저 소리를(Harke, Harke), 비올의 본질( The Spirit Of Gambo), 죽음(Death) 등 다양한 음악적 기법과 표현을 통해 인간의 기질을 묘사하는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체액으로 유머(웃음)를 만드는 방법

 

그렇다면 체액, 나아가서는 사람의 기질을 뜻하는 humor라는 말이 어떻게 오늘날의 유머가 되었을까요? 사람의 기질이라는 뜻을 지녔던 humor는 17세기 이후, 과학의 발전 등으로 (얼마 전까지도 혈액형이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유사과학이 버젓이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체액과 기질의 연관은 약해지고 이 기질이라는 의미는 개인은 독특한 성향, 또는 이상한 성격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 독특하고 이상한 성격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웃음을 불러오게 마련이라 우스운 성격, 나아가서는 웃음을 유발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고 변형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언어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현대에 이어지며 의미의 확장과 변화를 겪었는데, 아마도 중세 시대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부모나 조부모가 살았던 세계와 본질적으로 같은 세계를 살아간다고 믿었지만 17세기 이후의 유럽인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의 발전 등으로 자신이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확실한 인식과 함께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체액이 인간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시대는 점차 저물어가고, humor라는 단어는 의학적 의미를 잃은 대신 개인의 독특한 성격을 가리키는 말로 살아남았고,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유머'라는 의미에 이르게 된 것이죠. 체액에 따른 기질 중 하나인 흑담즙이 많은 체질을 의미하던 Melancholy가 오늘날에는 우울하다는 뜻이 된 것도 유사한 사례입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단어 하나의 의미 변화라기보다는 17세기 유럽에서 과학혁명과 함께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체액이 인간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믿던 세계관은 점차 힘을 잃었지만, 그 언어는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조르디 사발이 복원한 17세기 스타일의 Humors

 

원제가 흄 대위의 음악으로 표현한 기질들(Captain Humes Musicall Humors)인 토비아스 흄의 첫 작품집 음악으로 표현한 기질들은 100여 곡의 비올 작품을 담고 있는데 비올 연주의 선구자 중 하나인 조르디 사발은 비올라 다 감바를 공부하기 시작하던 1964년 첫 인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작곡가인 흄이 작품집의 제목에 흄 대위를 강조한 것처럼, 토비아스 흄은 늘 스스로를 군인이라 생각했고, 음악은 군 복무 중의 취미생활로 여겼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아는 한 흄은 두 권의 작품집만을 출간했는데, 첫 작품집인 음악으로 표현한 기질들이 1605년,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작품집 흄 대위의 시적 음악(Captain Humes Poeticall Musicke)이 출간된 것이 1607년임을 생각하면, 2년여에 걸친 기간에 그의 음악적 활동이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지그림 - 니콜라스 힐리아드(Nicholas Hilliard), 마법사 백작(The Wizard Earl) /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릭스 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발췌 

힐리아드의 미니어처 초상화는 퍼시 가문의 많은 헨리 중의 하나인 9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를 그린 그림입니다. 헨리 퍼시는 과학에 대한 관심과 많은 장서로 마법사 백작(The Wizard Earl)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부유했지만 이런저런 사연이 많았던 퍼시 집안답게 1605년의 제임스 1세 암살 음모(화약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런던탑에 수감되어 16년간을 지냈지만, 탑에서 유복한 생활을 하며 도서관을 꾸리고 학자들을 초대해서 토론하기도 했기에 마법사 백작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토비아스 흄과 노섬벌랜드 백작과의 인연은 알려진 바 없지만, 둘의 활동시기가 비슷하고, 묘하게 흄이 음악으로 표현한 기질들을 출간한 1605년은 헨리 퍼시가 런던탑에 투옥되게 된 사건인 화약 음모 사건이 발생한 해이기도 하며, (기회가 된다면 표지 그림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다루겠지만) 그림에서의 백작의 자세는 Humor의 하나인 흑담즙 기질을 표방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태어난 해가 명확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애에 대한 기록이 드문드문 남겨져 명확하게 연결되는 삶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 없는 토비아스 흄은 두 음악집을 출간하기 이전에는 스웨덴 국왕 칼 9세 휘하에서 장교로 복무한 기록이나 러시아 제국군대에 복무한 기록이 있어 유랑하는 용병으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런던에서 두 권의 음악집을 출간한 30대 또는 40대 이외의 행적은 음악가로서의 행적은 없이 군인으로서의 기록만 남아 있으며, 그의 말년에 런던의 차터하우스(Charterhouse) 빈민형 양로원에 살았던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토비아스 흄의 음악의 놀라운 점은 스스로를 취미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 자리매김했음에도 그의 작품이 기존의 문법에 순종하지 않는 파격을 보여주고 있으며, 류트 보다 비올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통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 중 하나이자 류트 연주자인 다울런드로 하여금 논쟁에 참여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흄이 보여 준 파격은 조르디 사발의 음반을 통해 들을 수 있는데, 들어라, 저 소리를(Harke, Harke)의 경우 활 뒤편으로 현을 치라는 지시가 있는데, 이는 콜 레뇨(col legno) 기법의 최초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새소리를 흉내 내거나 두 사람이 하나의 비올을 연주하는 기법 등 독창적이면서도 유별난 방식의 곡을 작곡했습니다.

 

이런 독특한 기법이나 군대 행진곡 풍의 음악 외에도 때로는 우울하거나 슬픔에 잠기는 음악들도 있는 등, 토비아스 흄은 그야말로 음악집의 제목처럼 다양한 기질들(Humors)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흄의 음악을 최상의 연주로 담아내어 17세기의 사람들의 다양한 성향을 음악을 통해 오늘날에 재현한 소중한 기록이 오늘 소개하는 조르디 사발의 음반입니다. 그리고 이 음반에 담긴 음악을 들으며 다시 음반 표지를 바라보면, 희극적 기질이라는 제목이 왜 어색한지뿐 아니라, humor라는 단어 속에 2천 년 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까지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역사와 음악 시리즈에 대하여

이 블로그 연재는 조르디 사발의 음반을 들으며, 그 음반에 담긴 음악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풀어가는 코너입니다. 본편은 조르디 사발의 음반에만 한정해서 연재하고, 드물게 사발의 음반이 아닌 경우에는 외전(外傳)의 형태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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