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가 국내에 처음 들어오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스타벅스는 제가 가장 즐겨 찾는 커피 전문점이었습니다. 외국 출장에서도 (미국인도 아니면서) 아는 맛/분위기가 필요할 때는 스타벅스를 이용하곤 했죠. 제가 스타벅스를 자주 이용했던 것은 맛이 좋아서도, 굿즈를 탐해서도 아니었고 그냥 특별한 맛은 없지만 익히 아는 맛을 모든 매장이 오차범위 한도 내에서 보여주고, 매장의 시설이나 분위기도 늘 일정했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남에서건 지방 소도시에서건 스타벅스는 늘 스타벅스였기에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런 안전한 선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브랜드와 달리 직영으로 점포들을 유지하는 점이 이런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 안정성은 다른 브랜드에서는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안정적으로 별로인 브랜드는 있지만 말이죠.
첫 만남, 카페모카와 카라멜 마키아토
국내에 처음 스타벅스가 생긴 곳은 당시만 해도 핫플레이스였던 이대 앞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처음 스타벅스를 처음 접했던 곳은 호놀룰루였지만 말이죠. 처음 매장에서 커피를 주문하면서 생소한 이름을 가진 메뉴와 다양한 크기에 약간은 당황했었습니다. 하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수많은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들고 다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피 브랜드의 커피를 접한다는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앉을자리가 사실상 없는 것도 신기했고요.
테헤란로에서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라 회사 근처, 그리고 건너편에 매장이 생기면서 저는 스타벅스의 단골이 되었습니다. 이때 가장 많이 마시던 커피는 초기에는 카페모카, 그리고는 카라멜 마키아토였습니다. 늘 벤티 사이즈에 샷을 추가한 단맛과 쓴맛의 극을 달리던 시절이었죠. 동료직원 하나는 스타벅스의 카페모카가 자신이 마셔본 최고의 음료라며 평생 그것만 마시겠노라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팀장이 된 이후는 아메리카노 벤티를 오전에 한잔, 오후에 한잔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직원 중에 뭔가 잘못한 직원은 출근하면서 자신이 스타벅스에서 커피 사가니 사 오지 말라 전화하곤 했던, 이 정도의 갑질은 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07:00 오픈런의 시절
아침 일곱 시나 일곱 시 반부터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일상인 시절도 있었고 직장 생활의 상당 기간을 (회사차를 포함한) 자차로 출근해 온 지라 일찍 출근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몸에 배어 있기에 다운타운 매점은 보통 아침 7시에 문을 여는 스타벅스는 커피 충전을 위해 소중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개인 사무실이 없던 시절, 회의 없는 날은 회사에 주차를 하고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적당한 시간까지 책을 보다 출근하곤 했죠. 이 시절에는 오늘의 커피를 시키곤 했습니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오늘의 커피를 주문하는 첫 손님인지라 늘 새롭게 커피를 내려주고는 해서 다양한 원두의 맛을 새로 내린 커피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가격도 아메리카노에 비해 저렴해서 스타벅스의 최고 가성비 커피를 택하라면 오늘의 커피고, 사실 아메리카노 보다 맛도 훨씬 좋습니다.
스타벅스, 싸서 마시는데요?
남들보다 일찍 팀장이 된 덕에 팀장 경력이 전체 경력의 반을 훨씬 넘어, 이러다 팀장으로 은퇴하는 것 아닌가 하던 팀장 경력 말년시절, 제 팀원 하나가 법인카드 사용 전표를 결재하는 임원에게 불려 가서 한소리를 들었답니다. "니네 팀은 어떻게 외근하면 커피는 무조건 스타벅스냐? 너무 비싼 데서 마시는 아냐?" 이에 대한 그 직원의 답은 "스타벅스가 제일 싸서 가는 건데요?"였답니다. 물론 그때는 오히려 동네 이름 없는 카페들이 스페셜티 커피라는 명목으로 커피값을 올리던 시절이었기에 그랬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그 직원의 얘기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었습니다. 외부 회의를 나가거나 사람들을 만날 장소로는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익숙한 분위기와 맛이 필요했는데, 스타벅스만큼 어디에나 있고, 늘 일정한 분위기에 늘 아는 음료와 맛을 보장하면서 그 정도의 가격인 곳도 없었습니다.
프리퀀시, 그리고 굿즈
프리퀀시의 계절이 오면 반강제적으로 모든 만남의 장소는 스타벅스여야 했습니다. 외부 협의나 약속 후 커피 한잔도 스타벅스여야 했죠. 그리고 늘 프리퀀시는 챙겨서 직원에게 넘겨주는 형식이죠.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얻은 프리퀀시를 어찌 되었건 제 계정으로 적립하고 그것을 직원에게 주는 행위까지 문제로 삼는 직장이 아니었고, 받은 직원도 받은 굿즈를 혼자만 독식하지도 않았으니 (그와 중에 저도(라기보다는 딸아이가) 종종 수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스타벅스 프리퀀시는 나름 조직에도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이벤트였던 것이죠.
가장 즐거웠던 사건은 거래처 모 회장님과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제가 결제를 한 뒤, 매장 직원이 프리퀀시 적립에 대해 말하자 갑자기 거래처 회장님이 "프리퀀시 적립은 여기로 해주세요"라며 얘기했던 순간입니다. 회장님은 쑥스럽게 웃으며 손녀 줘야 해서 말이야라며 말끝을 흐렸죠. "아... 이러면 제가 C과장에게 혼나는데요"라고 하자 "C과장에게 내가 잘 부탁하더라고 좀 말해줘"라며 서로 웃었습니다. 어느 순간 오픈런까지 하는 미친 이벤트가 되었지만, 스타벅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름 훈훈하기도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멸콩의 시간
이제 스타벅스와의 추억은 뒤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싼 옷을 입는 것이 멋있는 사람인 줄 아는 모지리 추종자들 덕에 SNS에 이런저런 천박함을 드러낼 때도 그냥 개인의 일탈 정도로 생각했습니다만, 이번 일은 조직 자체가 악하고 썩었거나 멍청하거나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모 배달회사도 그렇고, 고객이 자신들 없는 작은 불편조차 못 참고 노예근성에 빠져 있다고 착각하게 해 주기는 싫습니다. 저나 와이프는 다음날 새벽에 뭔가를 받아야만 할 정도로 준비성 없게 살지도 않기에 원래 그 배달회사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간 제 직장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많은 기억을 품고 있던 스타벅스도 안녕을 고할까 합니다.
많은 일은 적당히 넘어가고, 행동하지 않고 넘어가고, 못 본 체 눈을 감고 살아도 됩니다. 마음속에 작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누군가 선을 넘는 것을 보면서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탐욕에 절어 유대인을 호구취급하던 쉰들러 조차도 나치가 선을 넘는 것을 보고는 행동을 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 선 넘음에 대한 저항과 행동이 쉰들러처럼 목숨을 거는 정도도 아닐진대 딱히 망설일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Addendum
10만원이 넘게 충전되어 있는 스타벅스 앱을 보면서 발행 버튼을 눌러야 하나를 잠깐 고민했던 것은 소시민의 양심이 잠깐 아비누스의 저울에 올려졌던 것이라 변명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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