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 선물에 대한 추억과 연말 특유의 분위기는 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작은 기대를 품게 합니다. 작은 행복을 누리는 삶이란, 크리스마스처럼 매년 돌아오는 날을 특별하면서도 예측 가능한 '나만의 의식'으로 만들어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도 저만의 크리스마스 행사들을 준비했습니다.
2025년의 슈톨렌
올해도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별도로 슈톨렌을 준비했습니다. 작년에는 지인들의 선물이었던 반면 올해는 내돈내산으로 준비한 것인데, 슈톨렌이 국내에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고는 해도 연말에 파는 곳이 흔하지는 않아 반얀트리에 가서 몽샹클레르의 슈톨렌을 사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회사 근처에 슈톨렌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어 구입했습니다. 몽샹클레르에 비해 가격은 저렴하면서 포장도 그럴듯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는 딱입니다. 슈톨렌 맛이야 뭐 비슷한 것 같고요.

2025년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작년 블로그의 글에서 매년 크리스마스 행사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듣는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올해는 톤 코프만의 에라토 음반을 듣기로 했습니다. 작년에 들었던 아르농쿠르의 음반과 비교할 때 생기가 넘치지는 않지만, 프레가르디엥의 노래가 특히 좋고, 때로는 응축적인 힘이 부족한 듯하지만 정갈하고 섬세한 연주로 희구하는 바가 평온한 크리스마스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스타일의 연주도 나쁘지 않습니다.

2025년의 크리스마스 와인
올해 크리스마스를 위해 선택한 와인은 샤또 끌레르 밀롱 2005년입니다. 그랑크뤼 클라세 5등급 와인으로 (일부 하드코어 와인 애호가들에게 "무똥 따위"라는 밈을 유행시키기도 했던) 1등급인 무똥 로칠드의 이웃 밭으로 무똥에 인수되어 혹자는 무똥 로칠드 5등급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 와인으로, 5등급이지만 사실은 2~3등급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랑 클뤼 클라세의 등급 자체가 1855년 나폴레옹 3세 시절에 시작되어 사실상 고정이고, 등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시절 그대로의 전통을 유지한다는 것이 중요한 바 (많은 애호가들에게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큽니다. 이탈리아에서 전통 등급을 포기하고 창의력을 선택한 슈퍼 토스카나 와인들이 테이블 와인으로 분류되는 IGT 등급임에도 호평과 함께 고가로 판매되는 것도 그런 이유죠.
제가 가지고 있는 빈티지와 관련해서는 작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 와인아카데미를 다닐 때 국내 1호 소믈리에인 서한정 선생 강의 시간에 이 빈티지는 언제쯤 따는 것이 좋겠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 왈, 아직 갓난애기니 최소 15년은 묵혀두고 그 뒤에 마시라 하셨는데, 그때는 어느 세월에 이걸 맛보나 하고 생각했는데, 냉장고 깊숙이 보관하면서 잊고 지내다 보니 어느덧 개봉하고도 남는 시점이 왔네요.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고 2010년에는 호기롭게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라피트 2002년을 마시는 정점을 찍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간직하던 끌레르 밀롱은 이제야 오픈하게 되네요.
2025년의 크리스마스 보드게임
매년은 아니지만 아이들 어릴 적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작해서 크리스마스에 보드게임을 장만하곤 해왔습니다. 히트 게임즈의 연말 세일 덕분에 올해는 아트 소사이어티 (Art Society)를 장만했습니다. 제가 이 게임이 세일에 들어갔다고 와이프에게 소개했을 때, 미술을 좋아하는 와이프는 구성을 보더니 바로 주문을 하더군요. 구성으로 보았을 때 아트 소사이어티에는 미술 애호가의 소유욕을 자극할 요소가 제법 있습니다. 우선 박스부터 각종 부품들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설명서를 제외하면 한글판이 특별히 필요한 종류의 게임은 아니지만, 제가 구입한 것은 한글판인데, 원판이 어떤지 몰라도 일단 한글판의 완성도가 좋습니다. 박스부터 파네라이의 샌드위치 다이얼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되어 고급스럽고, 각종 컴포넌트의 두께도 좋습니다. 여기에 일부 나무 미플까지 곁들여졌다면 좋았겠지만, 그러면 가격이 더 올라가겠죠.

미술품 경매와 수집이라는 테마도 미술 애호가에게는 어필할 수밖에 없는데, 더구나 수집하는 그림들이 오리지널 작품도 있지만, 상당수가 딱 보면 알 수 있는 유명 작품의 패러디입니다. 위 박스 이미지만 보아도 뭉크의 절규, 카텔란의 코미디언,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등의 패러디가 보입니다. 패러디도 흥미로운데, 뭉크의 그림은 유령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호쿠사이의 그림은 라면 그릇에 파도가 치는 모양입니다.
게임의 룰은 초보자가 바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그림이 나오면 경매해서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사람 순서대로 가져가서 자기 개인 갤러리에 규칙에 맞게 진열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 묘미가 있는데, 경매에서 팔리지 않은 그림은 미술관이 사가게 되고, 진짜 미술시장의 흐름이 그렇듯 유명 미술관에 어떤 작가의 그림이 걸리면 그 그림의 가치는 급격히 상승하고, 이것은 플레이어들의 소장품의 가치에 영향을 줍니다. 게임에서는 작가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기보다는 작품의 종류(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등)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 차이입니다.
자세한 리뷰는 기회가 있으면 별도의 글로 올리기로 하고, 결론적으로 구성품이나 색상, 디자인, 플레이 스타일이 크리스마스에 가족들이 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바흐의 선율을 배경 삼아, 달콤한 슈톨렌에 잘 숙성된 끌레르 밀롱 한 잔을 곁들이며 가족들과 보드게임판 앞에 둘러앉는 풍경. 이것이 제가 정성껏 준비한 2025년의 크리스마스입니다. 떠들썩하고 화려한 파티는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 기다려온 와인처럼 깊고 은은한 온기가 여러분 모두의 연말에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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