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그렇다 해도 산의 거대함을 못 보고, 마음으로 사물의 많음을 겪지 못한다면 변화에 통달하고 그 이치에 이를 수 없으므로 그릇이 비좁고 앎이 트일 수 없다. 그래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결정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이지만 강과 산이 아름다운 경치를 두루 돌아보겠다고. 강에서 목욕하고 언덕에서 바람을 쏘인 뒤 노래하며 돌아온 공자의 제자 중점을 본받겠다고 하면 성인께서도 마땅히 뜻을 함께 하실 게다.
이제야 알았네 하늘과 땅이 크다 해도 내 가슴속에 담을 수 있음을.
- 김금원, <호동서락기> (최열, <옛 그림으로 본 조선 (2) - 강원>에서 재인용>
최열 선생의 역작인 <옛 그림으로 본 ~> 시리즈 중 근간인 <강원> 편을 읽다 이 인용글을 마주쳤을 때, 그 글의 작가가 조선시대 여성의 몸으로 14세 때 남장을 하고 여행을 나서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둘러본 김금원이란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원문인 <호동서락기>을 읽어보고픈 마음에 찾아보니 다행히 김경미 선생이 <여성, 오래전 여행을 꿈꾸다>라는 제목아래 <의유당관북유람일기>와 <서유록>과 함께 번역문으로 엮어 놓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남성들도 쉽지 않았던 여행은 여성에게는 내외법이나 부녀상사금지법 같은 제약으로 더욱 힘든 일이었습니다. <호동서락기>의 김금원 정도를 제외하면, 가족모임이나 남편을 따라 발령지를 가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여행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의유당이 일출을 보기 위해 함흥판관인 남편에 조르고 졸라 여행을 성사시키는 모습을 보면 그 모습이 상상이 가서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의유당관북유람일기>는 과거 (현재도?) 교과서에도 수록된 <동명일기>가 수록된 기행문으로 "항 같고 독 같은 것이 ~"하는 일출 묘사로 유명하죠. 당시 시험에 잘 출제된다는 지문이었기에 열심히 공부했던 덕인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다시 현대어로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고 당시 느꼈던 일출과 파도의 시각적 이미지가 동일하게 떠오릅니다.
<호동서락기>는 아낙의 찰진 기행문 같은 <의유당관북유람일기>에 비해 추상적이고 선비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김금원이 어려서부터 글 읽기와 시 짓기를 즐긴 조숙한 천재였다는 점과, <호동서락기>를 쓴 시점이 실제 여행의 시점과 상당한 시차가 있다는 점이 여행기가 생동감보다는 사색에 치우치게 된 배경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그 사색의 스펙트럼을 따라가며 억압된 상황 속에 깨어있는 여성의 의식을 찾아 읽는다면 단순히 명승지에 대한 기행문을 넘어 당대 여성 지성인의 사고의 궤적에 대한 기행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골 아낙의 서울유람기인 강릉 김 씨의 <서유록>은 강릉에서 서울까지의 여정, 그리고 일제 강점 초기 서울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놀라웠던 점은 50대 시골 아낙의 깨어있는 시선이었는데, 강릉 김 씨는 비록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은 전형적인 시골 여인이었지만, 늘 책을 곁에 두고 스스로 공부했기에 이런 깨어있음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 구경하여 별수도 없고 효험도 없다고 말할 터이나 지금 세계에 이전 풍속만 생각하고 들어앉으면 더구나 여자계의 암매함을 면치 못할 듯하다. 우리나라 이천만 동포의 일천만은 여자인데 여자계가 어두우면 나라 앞 길 어이할까. 나도 이 구경 아니하였다면 세계가 무엇인지 동포가 무엇인지 몰랐을 터인데 구경한 효험으로 이것저것 아는 것 어찌 별수 없다 하리오. (...) 어서어서 구경들 하고 정신들 차리시오.
참혹한 일 우리나라 통분한 일 우리 정도 보고 듣지 않으면 모릅니다. 단군께서 창업하신 삼천리강산 사천 년 국가 오늘날 없어졌소. 아시오 모르시오. 아무리 여자인들 국민이 아니라면 분하지 아니하오. 서양 강국 영국 얘기 잠깐 들어보니 여자가 왕 노릇 한 일 많고 지금은 그 나라 여자가 나라 정사 다스리는 권리에 참여하겠다고 남자 사회와 다툰다니 그 나라 여자계가 여북이나 발달하였겠소. 우리도 정신 좀 차려보면 그러한 일 하여 볼까. 무식하니 답답하다. 여자학교 아니하면 뒤처진 여자니 말 못 되오.
이 세편의 기행문에 이 글들을 엮고 번역한 김경미 선생의 해설인 <조선여성들, 여행하고 기록하다>를 붙여 230쪽짜리 아담한 책자로 엮어낸 <여성, 오래전 여행을 꿈꾸다>는 어려운 시절에도 그 어려움을 뚫고 보고, 느끼고, 깨닫기를 갈망하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성들의 멋진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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