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년을 제외하고는 당대에도 부와 명성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현대의 저작권 제도가 있었다면 사계 한곡만으로도 평생을 호화롭게 살 수 있었을 안토니오 비발디는 엄청난 다작가이기도 해서 협주곡의 수만 해도 500여 곡에 이릅니다. 이중 대부분은 솔로와 현악기군을 위한 곡이거나 독주가 없는 형태인데, 애드리언 챈들러와 라 세레니시마의 음반은 Vivaldi x2²라는 표제처럼 독특하게도 다중의 솔로 악기를 위한 협주곡을 담고 있습니다. 수록된 음악은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에서 시작해서 2대의 플루트를 위한 곡, 두대의 첼로를 위한 곡 등을 거쳐 2대의 바이올린, 두대의 오보에, 두대의 리코더를 위한 협주곡에 이르고 마지막은 바이올린, 첼로, 두대의 플루트, 두대의 오보에, 통주저음을 위한 협주곡 RV 572로 마무리합니다. 비발디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음반을 제법 가지고 있고 즐겨 듣기도 하지만, 듣다 보면 워낙 비슷한 악상의 곡이 반복되다 보니 그게 그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 음반에 수록된 음악들은 악기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차별성이 있습니다.

언제나 흥미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크리스티나 플루하와 라르페지아타의 최근 녹음인 황금의 탑(La Torre del Oro) 음반은 세비야의 황금의 탑이 식민지에서 황금을 가득 싣고 들어오는 배들을 맞이하던 상징성을 내세워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적 교류와 영향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음반은 (수록 순서는 시계열적이지는 않지만) 스페인 르네상스의 음악에서 시작해서 멕시코, 베네수엘라의, 스페인 음악의 영향을 받거나 현지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다시 스페인 음악에도 영향을 준 다양한 노래들을 담고 있습니다. 플루하의 음반에 늘 참여했던 가수들인 루치아나 만치니, 빈첸조 카페주토, 셀린 쉔 등이 이 음반에서도 멋진 노래를 들려줍니다. 이 음반은 2022년 잘츠부르크 성령강림절 축제를 시작으로 여러 공연을 통해 공고해진 프로그램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만큼 내용이나 연주의 질, 녹음까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합니다.

프랑스 파리 음악 박물관의 소장악기를 활용한 녹음 프로젝트인 스트라디바리 시리즈로 나온 알린 피불의 포레 녹턴과 뱃노래 음반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929년 가보(Gaveau) 피아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피아노로는 쇼팽이 생전에 가장 선호했다는 플레옐 (Pleyel)이나 흔히 듣는 스타인웨이에 가깝지만 프랑스적인 맛은 간직한 에라르(Érard)가 유명하고 이들 피아노를 활용한 음반은 제법 많습니다. 한때 피아노 음악에 천착해 있던 시절도 있고, 지금도 제법 피아노 음악을 많이 듣고 있음에도 가보 피아노를 사용한 음반은 이 음반이 처음이었는데, 스타인웨이가 금속성의 맑은 소리로 들린다면 가보 피아노는 좀 더 나무에 가까운 소리고 그러면서도 뵈젠도르퍼에 비해서는 가벼운 소리였습니다. 병렬식 피아노의 특징을 일부 떠올리게 하는 낮은 장력과 프랑스 특유의 설계 덕분에 소리가 딱딱하게 굳지 않고 목재 고유의 탄력 있는 나무 소리가 살아나, 포레가 의도했던 투명하고 찰랑거리는 음색이 극대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두 프랑스 피아노에 비하면, 이 탄력성 때문인지 (스타인웨이만큼은 아니지만) 더 화려한 음색으로 들리더군요. 피불의 연주나 녹음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올라온 지 몇 년 되었지만 최근에야 보게 된 넷플릭스 영화 페일 블루 아이(The Pale Blue Eye)의 OST입니다. 더 레이븐 이후 나온 흥미로운 에드거 앨런 포가 등장하는 영화였는데, 음악이 영화 분위기와 어울리면서 듣기 좋아서 OST를 찾아보니 하워드 쇼어의 음악이라 "역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음반의 아쉬움은 요즘 영화 음악의 특성 때문에 각각의 트랙이 짧다는 것인데, 영화의 전체적인 톤 앤 매너가 일정하기에 음악 분위기도 일정해서 OST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도 장대한 한 편의 곡으로 듣는 느낌이라 이 아쉬움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원작 소설 자체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올린 바 있으니 링크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관련글 바로가기)

루돌프 부흐빈더의 최신 음반은 제목처럼 슈베르트의 보물 같은 작품들을 두 장에 가득 담은 음반입니다. 슈베르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춤곡들 160 트랙을 담은 이 음반은 엄청나게 심오하거나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슈베르트의 따스함, 소박함, 작은 미소, 우울감 등 모든 면을 살짝살짝 짧게 보여주는 음악들이라 하겠습니다. 집중하지 않고 반복재생을 해놓아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음악들로 가득합니다. 피아노 앞에 앉은 부흐빈더의 어릴 적 사진을 담은 표지도 80살의 노대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연주를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포근해지면서도 빛바랜 사진처럼 이제 그를 보내주어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는 생각도 들어 그야말로 슈베르트적 감성을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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