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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첫 음반, 첫 사랑 시리즈

[음악]첫 음반, 첫 사랑 (9) -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RCA)

by 만술[ME] 2026. 5. 27.

오페라의 줄거리 상당수가 막장 드라마라 그나마 음악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누가 좋아하겠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극적인 막장과 흥미진진한 명작이 한 끗은 아니어도 서너 끗 정도 차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도 음유시인이라는 낭만적인 제목과는 달리 어둡고 기괴하면서도 출생의 비밀과 근친 간의 경쟁과 살해까지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습니다. 

 

너무 잘 알려진 줄거리지만 막장 드라마의 요소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굵직 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백작이 자신의 두 아들 중 하나가 아픈 원인으로 집시 여자를 지목하고 화형에 처함 (전형적인 갑질)

그 백작에 복수하라는 화형에 처한 집시여자의 요청에 의해 그 딸이 백작의 두 아들 중 한 아이를 납치해 그 불구덩이에 던져서 살해 (호러물)

그런데 알고 보니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백작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남 (호러물 2)

집시 딸은 살해하려 납치했던 백작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키움 (출생의 비밀)

세월이 흘러 백작이 된 큰 아들 루나 백작은 레오노라라는 귀족 여성을 사랑하지만 그녀는 음유시인 만리코를 사랑 (부자 남자 놔두고 가난한 남자에 빠지는 여주인공 클리셰)

그런데 만리코는 바로 루나 백작의 납치되었던 동생이자 백작과 내전을 벌이는 반역자 중 하나

레오노라를 두고 두 형제는 결투를 벌여 만리코가 루나를 거의 죽일 뻔했으나 뭔가 이상한 예감에 살려줌

루나 백작은 사랑에 눈이 멀어 레오노라의 납치를 시도하였으나 만리코에 의해 제지됨

루나 백작은 화형당한 집시의 딸이자 만리코의 어머니인 집시여인을 잡아들여 만리코를 유인 (패드립 시전)

어머니를 구하려던 만리코는 결국 포로로 잡혀 어머니와 함께 처형을 당할 신세가 됨

레오노라는 루나 백작의 수청을 들어 자신이 사랑하는 만리코를 구하기로 함 (사랑을 위해 다른 남자에게 몸 바치는 클리셰)

하지만 레오노라는 연인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미리 독약을 먹어 둠 (독약은 모든 연인의 벗)

늘 그렇듯 독약이 딱 비극을 완성하기 좋은 기막힌 타이밍에 퍼져 만리코가 석방되기 전에 만리코의 사랑을 확인하며 레오노라 사망 (사랑의 죽음 클리셰)

레오노라에게 속았음에 분노한 루나 백작은 만리코를 처형하고, 만리코의 어머니 아주체나는 백작에게 만리코의 정체를 공개하고 복수가 드디어 이루어졌다고 선언 

 

이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베르디의 강력한 음악과 아리아에 실려 전달되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는 제목과 달리 음악이 결코 음유적이지는 않지만 처음 듣는 사람도 이미 들어 봤을 아리아나 합창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초보자도 감상하기 좋습니다. 다만 조용하고 서정적인 노래를 좋아하면 시종일관 귀가 먹먹하게 가수들이 소리만 질러댄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앞서 소개한 이야기를 연기하면서 부드럽게 할 수는 없지 않아요? 막장 드라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김치로 싸대기를 치고 하는 맛이죠.

 

 

 

제 첫 일 트로바토레 음반은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어떻게 구했는지 의문인 지구레코드에서 라이선스로 발매한 RCA 레이블의 레나토 첼리니 지휘의 음반입니다. 성음도 아닌 지구레코드 라이선스인데 무려 전곡 음반입니다. 성음에서 나왔을 파바로티 / 서덜랜드 등이 보닝과 함께한 데카 음반이 당시 라이선스로 발매되었는지, 전곡으로도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당시에 첼리니판을 선택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수수께끼입니다. 더구나 당시 제게 첼리니는 생소한 지휘자였고, 비욜링을 제외하면 밀라노프나 워렌도 이름만 들어본 가수이고, 아주체나를 부른 바르비에리는 전혀 모르던 시절이니 가수를 보고 고른 것도 아니고, 아마도 당시 구할 수 있던 유일한 전곡음반이었기 때문에 이 음반을 선택했던 것이라는 짐작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음반은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듣보잡일 것이고 일부 애호가들만 아는 음반입니다.

 

이 일부 애호가들은 당대에는 (최소한 라디오를 통해서라도) 메트 오페라를 감상하던 미국의 애호가들 중심입니다. 이 음반의 가수들이 메트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으니까요. 지금 들어보면 전곡음반이기는 하지만, 당시 오페라무대(이건 요즘도 그렇습니다)나 전곡을 표방한 음반들이 그렇듯 관례적인 생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임에도 바르비에리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국제적인 캐스팅인데, 스웨덴 출신의 비욜링, 크로아티아 출신의 밀라노프, 미국인인 워렌이 참여한 국제판 4인방 일 트로바토레라 할 수 있습니다. 음악적 성취는 지금 들어도 충분히 즐길만합니다. 아니, 여전히 처음 들었을 때 이 오페라를 한방에 좋아하게 만들었던 장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첼리니의 지휘는 겉으로 뭔가를 하지 않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페이스를 유지하는데, 이게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로버트 쇼가 이끄는 합창단은 합창이 중요한 이 오페라에서 충분히 그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소위 최고의 성악가 네 명만 있으면 된다는 일 트로바토레의 특성상 가수들의 역량이 중요한데, 비욜링과 밀라노프는 창법에 있어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어도 극적 몰입감과 노래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으며, 둘에 비해 약간은 아쉽지만 아주체나와 루나 백작도 극을 즐기기에는 충분합니다. 워렌의 루나 백작이 좀 더 무거웠음 하는 바람은 있지만, 생각해 보면 루나가 완전 악당도 아니고, 만리코와 나이차이도 별로 나지 않으니 워렌의 스타일이 잘못된 것이라 할 수도 없겠습니다. 

 

지금의 시점에 일 트로바토레를 듣기 위해 이 음반을 선택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반드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음반을 사랑했던 미국인들 보다는 훨씬 뒤늦게 스트리밍의 시대 덕에 메트의 오페라 공연을 실시간으로 즐기고, 때로는 과거의 실황들을 아카이브를 뒤져 듣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밀라노프, 비욜링, 워렌 같은 이름만으로도 첫 음반의 추억에 더해 묘한 향수까지 느끼게 해주는 음반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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