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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첫 음반, 첫 사랑 시리즈

[음악]첫 음반, 첫 사랑 (7) - 바흐 관현악 모음곡집, 카를 리히터,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 (아르히브)

by 만술[ME] 2025. 9. 23.

제가 처음 들은 바흐의 곡이자, 첫 음반은 카를 리히터 지휘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의 관현악 모음곡집이었습니다. 80년대에 바흐 연주자를 꼽으라 할 때 누구나 첫 손에 꼽을 연주자는 거의 이견 없이 카를 리히터(Karl Richter) 일 것입니다. 지휘는 물론, 건반악기 연주에 있어서도 그의 음반은 언제나 첫 추천 목록에 올라 있었고, 가장 교과서적인 지위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곡의 제목부터 이야기하면, 요즘은 주로 관현악 모음곡으로 불리지만 당시에는 관현악 조곡(組曲)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주로 불려,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조곡(弔曲)인데 왜 즐거운 춤곡 느낌인지 의아심을 자아내는 경우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바흐가 붙인 제목은 음반 표지에 크게 나와 있듯 네 개의 모음곡의 첫 곡의 제목을 따서 서곡(Ouvertüren / overtures)이기에 더 혼란을 가중합니다. 다행히 요즘은 외국어이건 우리말이건 대부분 관현악 모음곡(Orchestral suites)으로 통일해서 쓰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음반사와 레이블을 구별 못하던 시절이라 이 음반을 어디서는 아르히브의 음반으로, 다른 곳에서는 DG의 음반으로 소개하는 통에 어리둥절해하곤 했습니다. 그 시절 국내에서 카를 리히터의 아성을 조금이라도 범접할 가능성이 있던 지휘자는 또 다른 카를인 카를 뮌힝거와 슈투트가르트 실내악단(데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지명도나 음반의 숫자에서 사실상 리히터의 위상에 근접한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음반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집 등의 음반과 함께 세장 세트로 묶여 DG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리마스터링 되어 CD화 되었습니다. 리히터가 사망한 해가 1981년이니 (한때 원전 연주라 불리던) 역사주의 연주가 알려져는 있었지만 꽃은 피우기 전에 활동했고, 그렇기에 당시에는 최고의 바흐 연주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바흐는 딱딱하고 번잡하고 거창한 낡은 연주로 치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90년대 이후에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 리히터의 음반을 꺼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오늘 소개하는 관현악 모읍곡집 음반은 LP로만 가지고 있고, CD시대에 들어와 카를 리히터의 바흐 음반을 구입할 필요도 없었으니, 이 음반 자체를 들어본 것도 정말 오래된 일입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리히터의 관현악 모음곡을 다시 들어보니 시대연주를 선호하게 된 이후 그의 바흐를 듣지 않았던 이유가 다시금 명확해지더군요. 하지만, 의외인 점도 있었는데,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명민한 템포를 유지하면서 바흐곡이 지닌 즐거운 기운도 제법 잘 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리히터를 낡은 시대의 마지막 바흐 연주자보다는 오히려 새 시대의 첫 연주자로 기록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의 바흐가 요즘의 취향에서는 낡은 느낌이 많이 풍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을 생각할 때면 여전히 카를 리히터의 음반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고, 특히나 2번 모음곡을 생각하면 오렐 니콜레의 플루트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은, 들을 음반이 많지 않아서 수도 없이 반복 재생하면서 각인된 이 음반에 대한 첫사랑의 효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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