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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예술 - 공연

[음악]아렌스키, 보르트키에비치 피아노 협주곡 (Arensky & Bortkiewicz: Piano Concertos)

by 만술[ME] 2025. 4. 21.

지난 토요일 점심약속이 있어 운전을 하던 중 놀랍게도 라디오에서 보르트키에비치(Bortkiewicz)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흘러나오더군요. 주말 라디오 방송에서 보르트키에비치 같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잊힌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터라 보르트키에비치의 피아노 협주곡과 유사한 스타일의 피아노 협주곡을 즐겨 듣던 90년대 초반으로, 더 길게는 19세기말 또는 20세기초로 마음만은 시간 이동을 한 느낌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틀어준 보르트키에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음원은 하이퍼리언(Hyperion)의 <낭만적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 제4권으로 나온 92년 녹음인데, 지금은 유니버셜에 인수되었지만, 영국의 독립 레이블인 하이퍼리언은 창립이래 제법 긴 시간을 독립 레이블의 모범으로 손꼽히는 음반사였습니다. 하이퍼리언은 레이블 초기에 몇 가지 야심 찬 기획물을 발매했는데,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레슬리 하워드의 리스트 피아노 전곡 녹음집, 그레함 존슨 주도의 슈베르트 가곡 전곡 녹음집, 그리고 낭만적 피아노 협주곡(The Romantic Piano Concerto) 녹음 시리즈였습니다. 슈베르트 가곡 전곡 녹음은 이후 슈만 가곡, 포레 가곡, 브람스 가곡 시리즈로 이어지는 가곡 전곡 녹음 시리즈의 발판이 되었고, 낭만적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는 시퀄인 낭만적 바이올린 협주곡 시리즈로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낭만적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는 19세기~20세기의 잊힌 작곡가의 잊힌 음악을 여러 연주자를 동원하여 부활시킨 흥미로운 기획이었는데, 발매될 때마다 이런 좋은 곡이 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는지 궁금해하면서 뭔가 새로운 보석을 발굴하는 듯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시리즈에 등장한 음악들의 상당수는 1912년에 초연되고 다음 해에 출판된 보르트키에비치의 협주곡처럼 지금 생각하면 다소 시대착오적이거나 끝물에 올라탄 음악들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마도 이 시리즈에 소개된 상당수의 음악이 그 아름다움과 멜로디적인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잊힌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착오적인 음악 중에도 여전히 연주회장에서 자주 연주되고 사랑받는 유명 작곡가들의 음악이 있음을 생각할 때, 보르트키에비치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은 저 세상에서 억울함을 호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인용한 제러미 니콜러스의 내지 해설의 이야기처럼, 보르트키에비치의 피아노 협주곡은 (전혀 연관은 없지만) 잃어버린 사랑을 담은 애잔한 할리우드 흑백 영화의 삽입곡을 연상시키는 선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낭만적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의 많은 곡들이 그렇습니다. 때로는 카사블랑카의 릭의 카페를, 때로는 안개에 덮인 워털루 다리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레 되 마고의 한 구석이나 링 슈트라세의 오토 바그너의 건물 앞으로 우리를 안내하기도 합니다. 가끔 몸에 좋지는 않은 걸 알면서도 달고 맛있는 디저트를 희구하듯, 이런 음악들도 삶의 기쁨을 위해서는 가끔 필요합니다. 아니, 어쩌면 자주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87권까지 나와있는 이 시리즈가 더 많은 보석을 발굴하면서 계속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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