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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TV]”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by 만술[ME] 2024. 8. 29.

넷플릭스의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저나 와이프는 아주 즐겁고 좋게 본 반면, 이런저런 혹평도 많아 호불호가 갈리는 상황인 듯합니다. 개중에는 영화 동호회에 올라온 글임에도 몇 회차가 진행될 때까지 두 축(펜션과 모텔)의 이야기가 다른 시간대인 사실을 몰랐다는 분도 있는 것을 보면, 저와 취향이 다른 분이 많은 듯하고 때문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이 있을까 싶지만 즐거웠던 몇 시간에 대한 추억이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점과 아쉬운 점
 
스포일러로 들어가기전에 좋은 점과 아쉬운 점부터 언급하면, 로케이션, 촬영, 미장센, 배우들의 연기, 사운드, 의상, 소재, 주제의식 등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간 복수극이건 아니건 직접적인 피해자들의 야야기는 많았지만 이 시리즈처럼 간접 피해자의 야야기를 다룬 적은 드물었던 것 같고 그 점은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숲에 나무가 쓰러진 소리를 모른 척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외면하고 싶어도 귀를 열고 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나간 점도 좋았습니다. 
 
유성아를 연기한 고민시의 존재감과 연기는 칭찬에 이견이 없을 정도이며, 잘 나가던 임원도 퇴직하면 흔한 동네 <아저씨~이~이~>가 되어 무능해진다는 것을 표정, 말투, 답답하고 느린 행동으로 보여준 김윤석의 연기도 기막혔습니다. 한 장면만으로도 두 배우의 연기의 수준을 느끼게 해주는 데, 유성아의 1년 뒤 방문에 놀라면서 순간적으로 놀라지 않은 척, 모르는 평범한 손님을 만난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하는 전영하의 <어색한> 연기를 너무 잘 표현했습니다. 아울러 반대편의 고민시는 전영하를 바라보는 표정만으로도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했고요. 그리고 이 장면만으로도 전영하와 유성아는 어떤 사람이며, 둘의 관계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며 어떻게 흘러갈지를 보여줍니다. 아울러 레이크뷰 쪽 인물들이나 두 장소의 주변인들 모두 자기 맡은 바 이상을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로케이션, 촬영, 미장센, 프롭, 의상 등은 스토리, 주제 등을 빼고 <동영상>과 <스틸>로만 봐도 좋을 정도로 예술적이었습니다. 특히 고민시가 나오는 장면은 피칠갑한 모습조차 화보로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이 장면들을 단순한 미소녀 동영상이 아닌 <씬>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스토리 빼고 이 <씬>들만 봐도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물론 관점에 따라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긴장감은 너무나 느리게 조여오기에 <쇼츠>에 익숙하고 <액션>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이점이 별로일 수도 있습니다. 개연성이나 핍진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오히려 <악(惡)>이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결코 초인적이지 않아요. 인간이면 하지 말아야할 극악을 행하지만 장면 장면 그들도 불가항력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보여줍니다. 그들은 천재적으로 치밀하지도, 초인적인 힘으로 우리를 압도하지도 않고, 그래서 그간 영화에서 보아온 수없이 많은 슈퍼히어로급의 악당을 기대한 사람들은 악역의 존재감이 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유성아는 남자들과의 갈등은 물론 연약해 보이는 전영하의 딸과의 싸움에서도 허약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단순한 클리셰 비틀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연약한 우리도 당당히 악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지향철조차도 병실 씬에서 겁먹은 경찰은 압도할 수 있지만, 마음먹은 노인에게는 고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작품은 악이 아무리 두렵고 대단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우리가 두려움을 털고 맞선다면 불가항력은 아니지 않았겠냐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과거에 사건을 막지 못한 개구리들의 무력감과 회환을 증폭합니다.
 
단순하게 본다면 뭔가 거대한 미스터리를 지니고 있을 것 같던 두 이야기의 접점은 극적 반전을 보여주지도 않으며, 최종장의 액션은 폭발하지도 않고, 범인을 검거하는 장면에서의 반전이나 기대감을 키어온 파출소장 윤보민의 활약도 시시합니다. 그런데 이건 할리우드 스타일의 액션스릴러를 기대하고 본 경우이고, 제가 보기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오히려 <사회파 스릴러>라는 생각이고 그렇기에 이런저런 악평과 불만족의 포인트는 이런 관점으로 이 작품을 보는 경우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를 가득 담아 <사회파 스릴러>의 관점에서의 제 생각을 늘어놓을까 합니다.
 


아래는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윤보민(파출소장) 캐릭터에 대해
 
타고난 <술래>인 윤보민 캐릭터는 작품에서 유일하게 모텔 사건과 펜션 사건에 모두 관여하는 등장인물입니다. 그런데 두 사건에서 모두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첫 사건인 모텔 사건이야 신입이니 그랬다 하더라도 이미 강력계의 전설로 통하며, 별명인 <술래>가 지방 파출소에까지 알려진 인물이 된 20여 년 뒤의 파출소장으로서의 윤보민은 다른 작품 같으면 충분히 더 큰 활약을 했을 수도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활약은 초반 기대와는 상반되게 매우 주변적입니다. 유성아, 전영하 및 주변인물을 수시로 마주쳤지만 어떠한 폭력도 예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전 이 부분이 억지로 개연성을 죽여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구도로 만들기 위한 장치라거나 작품의 미숙함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파 스릴러>로서 작품의 의도를 담은 연출이라는 생각입니다.
 
우선 윤보민은 겉으로는 피해자에 공감하고 사명감 넘치는 경찰로 보이지만 내면은 연쇄살인범을 직접 만나 그 아우라와 피향기를 맡고 살인을 <체험>하고싶어 하며, 범인을 잡는 이유도 사명감이라기보다는 그녀에게는 재미있는 술래잡기놀이이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더 잔혹하고 지능적이며 엽기적일수록 게임의 재미는 늘어나고 도전의식과 성취감이 증폭되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스타일이 윤보민입니다. 그녀는 직접 살인을 하지는 않지만 그 피의 향기에 끌리고, 살인의 스릴을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쫒으며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어찌 보면 연쇄살인마들과 비슷한 캐릭터를 지닌 인물입니다. 즉, 그녀는 결코 <개구리>가 아니라 범인의 반대편에선 <술래>인 것이죠. 유성아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풀려날 때 그녀가 보인 반응은 단순히 상황에 열받은 경찰이 범인에게 하는 경고가 아니고 오히려 레벨 업된 새로운 게임에 참여하게 된 흥분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권력, 정의는 그녀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에요.
 
같은 차원에서 그녀가 모텔사건의 범인 지향철을 죽인 구기호를 놓아주며 그 이유로 <개구리>를 잡기 싫다는 말을 할 때 그 의미는 간접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난 술래라 너희 개구리 따위 잡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의 의미일 수 있습니다. <지향철이 가는 길에 있었던 개구리들>처럼 구기호도 그녀에게는 사건을 풀어 가는 길에 있는 개구리 NPC에 불과한 것이죠. 
 
보통의 드라마나 영화라면 이런 천재적인 캐릭터는 결정적인 활약으로 주인공을 도와줍니다. 물론 주인공과 최종 빌런이 대결하는 극적 긴장감을 위해 적절한 핸디캡(기습으로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는 등)이 주어지기도 하죠. 하지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우리 같은 개구리들에게 살인자건 술래건 그들은 우리를 오직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자신들이 가는 길에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할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윤보민의 활약을 극도로 억제하여 보여줍니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대로 <악>이 그렇게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불가항력의 힘을 휘두르지는 못하는 것처럼, 그 반대편에 선 존재인 술래도 결코 초인적인 감각과 직관으로 <악>을 물리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렇기에 우리는 술래에 의존하지 말고 아무도 없는 숲의 나무 쓰러지는 소리를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펜션이 왜 유성아에게 중요했을까
 
"아저씨한테는 이 집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너무, 너무, 너무, 너무 큰 의미가 됐어요. 솔직히 여기 오기 전까지는 한동안 내 자신을 잊고 살았거든요? 근데 모든 걸 되찾았어, 여기서."
 
그 펜션은 애초 유성아가 원했던 곳도 아니고 우연히 그녀가 가는 길에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그런데 1년 뒤 유성아는 그곳을 다시 방문해서 자신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그곳에서 작품이 뜻대로 나오기 때문일까요? 그것보다는 그동안 자신의 내면에서 커가던 본성을 최초로 내어놓을 수 있었고 그래서 각성할 수 있었던 장소로서 펜션이 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펜션에서 첫 살인을 경험했고, 그를 통해 자신이 왜 그동안 사회에 적응 못하고 방황했던 것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즉 펜션에서의 첫 살인으로 인해 단순히 똘끼 있고 사이코 짓하는 말썽꾸러기 부잣집 딸에서 내면의 사이코패스로서의 진정한 자아를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그곳은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한 곳인데, 단지 먼저 그곳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자기 가는 길에 끼어든 개구리가 자신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녀가 작품에서 보여준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아저씨 여기 한번 봐봐요. 이미 너무 내 집 같지 않아요? 그냥 좀 먼저 산 것 뿐이잖아. 난 그걸로 영원히 당신 거라는 게 납득이 안가."

토마토와 그림들

유성아의 요리는 시종일관 토마토입니다. 펜션에 토마토를 키워보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은 토마토 요리를 잘 한다고 이야기하죠. 아이에게 특별식으로 주었던 것도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고, 전영하와의 만찬에서도 늘 토마토 요리입니다. 음료조차도 토마토 주스예요. 붉고 걸쭉한 액체의 이미지는 그녀의 피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다고 보입니다. 영화 <케빈에 관하여> 도입부의 토마토 축제에 사용한 이미지도 유사한 이유겠지요.

전시회에 걸린 가짜 그림이 완전한 추상화라면 펜션에서 그린 유성아의 그림은 추상적인 인물화인데, 색은 강렬하고 그림에는 사람 이미지가 많이 보입니다. 때로는 신체부위를 표현한 듯도하면서 사람의 내면에는 다른 사물들로 차있습니다. 이건 유성아가 펜션에서 각성한 두가지 예술감각 - 살인과 그림이 유성아 내면의 동일한 동기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마토 성애자


 
모텔 사건과 그 후유증을 그렇게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모텔 사건은 돌에 맞은 개구리가 어떤 비극을 겪는지 보여주거나 펜션 사건과의 극적인 연결을 통한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숲에 나무가 쓰러질 때 귀를 막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펜션의 전영하가 끝까지 귀를 막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죠. 두 사건 모두 귀를 막은 사람이 아니라 주변이 다치고 상처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모텔 사건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구상준(윤계상)이 아닌 아들과 전영하가 이어지는 것이고요. 그리고 사실 이것이 두 이야기의 접점에서 보이는 진정한 반전입니다. 즉, 모텔 사건은 연쇄살인범 지향철이 거쳐간 장소에 얽힌 사람들의 비극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라 구상준의 아들 구기호가 귀를 막고 눈을 감은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작가의 <의도>의 반전이 진짜 반전인 것이죠.
 
그리고 이와 관련해 작품은 세탁소 주인(이성욱)을 통해 다른 변주를 해냅니다. 세탁소 주인은 늘 말만 번지르르합니다. 자신이 세탁물을 찾으러 가려고 했다고 말만할 뿐 언제나 세탁물을 전영하나 주변 펜션 주인들이 가져다주죠. 때로는 다른 펜션까지 전달해 달라고까지 합니다. 이렇게 얄밉고 자기 책임도 회피하는 사람이지만 나무가 쓰러지는 중요한 순간에는 결코 귀를 막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피해는 가지 않았지만 CCTV를 보고 경찰에 신고하며, 적극적으로 영상을 증거로 제출하는 등 전영하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평소 인품으로는 세탁소 주인보다 전영하가 몇 배는 훌륭하지만 나무가 쓰러지는 순간에는 전혀 달랐던 겁니다. 아울러 시체 수색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그 때문에 세탁소는 유성아의 방화로 피해를 입습니다. 여기서도 작품은 냉혹해서 귀를 막지 않았다고 결코 개구리에 던져진 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덕분에 처음 생각했던 꿈인 카페 주인이 되고, 장사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귀 막지 않음에 대한 작은 선물을 그에게 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비현실 정도는 우리도 꿈꿀 수는 있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는 것 같습니다.
 
유성하의 전남편 이야기
 
유성아의 전남편도 나무의 쓰러짐에 귀를 막았던 인물입니다. 유성아가 결혼전이라고 온전했을 리 없으니, 미모, 권력, 재력에 혹해 결혼했고, 어쩌면 상당 부분은 누리며 살았을 겁니다. 그냥 눈과 귀를 닫고 있으면 되었겠죠. 그리고 그 대가로 아들이 죽음을 당했지만 1년간 아들의 죽음에도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행동도 결코 주도적인 개구리의 반항이 아니고 여전히 눈감고 귀를 막는 행동이죠. 어쩌면 작품은 유성아나 지향철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유성아의 아버지 같은 거대한 악도 존재하며 그런 악에는 끝까지 나무의 쓰러짐에 귀를 닫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서글픈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영하와 그 주변이 이런저런 상처를 갖고 있겠지만 다시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보여준 점에서 아무도 없는 숲은 없고, 거대한 나무가 쓰러진다면 반드시 쿵 소리가 날 것이며, 그때 우리는 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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