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함께 일하던 직원이 원서를 잔뜩 싸들고 회사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옆집에서 아들이 모아놓은 원서가 잔뜩 있는데, 분리수거로 버리기 아까우니 마음대로 가져가라 해서 원서를 보는(척) 하는 제 생각이 나서 바리바리 싸들고 왔으니 부담 갖지 말고 관심 가는 책만 골라 가지고 나머지는 폐기처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책들을 보니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 어덜트 소설 시리즈들이더군요. 장르는 판타지와 SF였고요. 제가 영 어덜트류를 보기에는 몸은 물론, 마음조차 이미 그 시절을 한참 지나서인지 전혀 관심 없는 지라 예의상 몇 권을 챙기고 만 적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영화는 OTT 덕분에 제법 다양한 영 어덜트 기반의 시리즈를 섭렵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메이즈 러너, 다이버전트,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헝거 게임 시리즈입니다.

이하의 글에는 헝거 게임 실사영화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울러 책은 읽지 않아 영화에만 기반한 생각입니다.
SF, 디스토피아, 새파란 청소년에 의해 붕괴되는 굳건한 어른들의 아성
제가 섭렵한 영 어덜트 영화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SF, 디스토피아, 그리고 새파란 청소년 주인공에 의해 무너지는 어른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영 어덜트 나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포함해서 어떤 세상이건 디스토피아로 바라보고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싶을 것이니 딱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SF적인 (사실 Science Fiction 보다는 우리말 번역인 공상 과학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릴) 상상력이 설정에 가미되면서 조금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헝거 게임 시리즈도 이 틀을 결코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이 시리즈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고대 그리스 신화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신공양에 배틀 로열의 규칙을 합한 정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배틀 로열의 무대는 인신공양에 의한 게임답게 미궁(labyrinth)의 모티브를 따와서 보다 큰 즐거움을 줍니다. 물론 PC의 시대답게 소년 테세우스 대신, 소녀 캣니스 에버딘이 주인공이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이 주인공 캣니스는 그냥 모든 것을 가진 어른이 싫은 반항적 10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하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아무런 비전도, 사상도, 이상도 없는 그냥 기득권에 대한 반항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스노우나, 코인의 죽음을 갈망하지만 그들이 없는 세상이 그녀가 꿈꾸는 유일한 미래일 뿐, 이 이상의 대안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어른은 주변인이거나 악당 일뿐
파랑새를 찾는 험난한 여정이나 악당 후크 선장과의 대결에 어른이 필요치 않는 동화처럼, 영 어덜트 영화에도 어른은 주변적이거나 주체적이라면 악당일 뿐입니다. 헤이미치는 전장에 나서지도 않고 보급품을 보내거나 말로만 떠드는 주변인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스노우, 코인, 플루타르크는 악당이거나 흑막일 뿐입니다. 나머지 어른들은 휘파람에 맞춰 키스를 날리거나 무지성적 행동을 하다 몰살당할 뿐이죠. 마허샬라 알리가 연기한 복스나 그 휘하인 잭슨 같은 사람도 배테랑 군인임에도 자기가 혈혈단신으로 그 험한 경계를 뚫고 적국의 수장을 암살할 수 있다고 믿는 똘기 넘치는 미성년자인 캣니스에 공감까지 하면서(!!!) 끌려다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현실판 대한민국의 장성들이 햄버거 체인점에서 무당과 만나 계엄을 모의하는 세상이니, 허세 가득한 카리스마에 복종하는 것이 각종 멀티버스를 관통하는 군인들의 종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대 평가된 SNS의 위력
SNS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세대를 대상으로 한 이야기답게 현실보다 SNS의 위력이 과대 평가되어 있습니다. 1편 시절 캣니스나 게일은 물론 캣니스의 동생인 프림로즈 조차 학교를 다니는 것 같지 않으니 낮은 교육 수준이 미디어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성을 강화한 듯합니다만, 경연 프로그램 우승자가 미디어의 효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되는 서사는 그녀(또는 피타 멜라크)를 구하기 위해 (그전에 쉽게 구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 75회 헝거 게임 도중에 구출을 감행하는 작전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론 설탕 좋아하는 아저씨가 외식 산업의 신으로 포장될 수도 있고, 실제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헝거 게임의 세상에는 캣니스의 상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조차 없어 보입니다. 스노우 조차 그 상징성을 두려워하고 나중에는 코인조차도 그럴 지경이니, 권위에 대한 최소한의 반항심을 갖고 있는 것은 거의 캣니스가 유일할 듯싶어요.
기술 발전의 비대칭성
이야기는 옛날옛적 은하계 먼 곳이 아닌 디스토피아적 지구임에도 기술 발전의 비대칭성은 스타워즈급입니다. 경기장 내의 구석구석을 감시하거나 곳곳의 자연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 거기에 게임메이커 마음대로 통제 가능한 유전자 변형 동물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문명의 전쟁 방식은 행성 하나쯤 쉽게 날려 버릴 수 있고 초광속 우주비행이 가능한 문명의 전쟁 방식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시대 수준이죠. 엄청난 홀로그램 기술을 가졌지만, 여전히 브라운관 TV로 보이는 영상 수신기를 사용하고, 지하 수백 미터쯤 지하도시를 구축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데, 대공 방어 체계는 턱도 없이 미약해서 벙커가 몸빵을 해서 상대방의 폭격을 버텨야 하고, 그 상대방도 폭격으로는 지상 초토화 밖에 못하는 무기 수준이고, 직업 군인인 평화유지군의 능력은 저쪽 은하계의 스톰 트루퍼급으로 최악을 달리고 있습니다. 무작위로 뽑힌 조공인들의 능력이 직업군인 보다 훨씬 뛰어날 정도입니다.
인프라 투자는 무슨 생각으로 하는지 공양인들 이송 외에 쓸모없는 초호화 고속열차 철로가 전국에 깔려 있지만, 캐피톨조차 시내 교통은 도보로 이동하는 친환경 교통 철학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전국이 황폐화되었으니 공해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한데 말이죠. 아울러 방송 인프라도 화질/음질의 스펙을 볼 때 미흡하지만, 통신 인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할 말이 있으면 찾아가서 구두로 전해야 하는 세상이더군요. 온갖 곳에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어 모든 일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미적 감각도 비대칭으로 발전하는지 딱딱한 디자인의 도시설계 대비 거주민의 의상은 색상이나 디자인이 기괴할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일개 디자이너가 만들 수 있는 방탄복을 못 만드는지 안 만드는지 평화유지군에 보급이 안된 점도 신기합니다.
넓은 면적, 적은 인구, 비효율적 정부운영
판엠은 아포칼립스 이후의 디스토피아적 미국을 배경으로 한 나라인데, 그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는 엄청나게 적습니다. 그래서인지 비효율적인 운영이 넘쳐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각 구역의 인프라를 활용하기 위해 넓은 면적에 각각의 구역이 흩어져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판엠의 끔찍한 기술의 비대칭성을 고려하면 가장 좋은 통치 방법은 중세풍의 봉건적 시스템일 것입니다. 각 구역마다 자치를 주고, 캐피톨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공물을 받는 시스템이죠. 한데, 판엠은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을 유지하고자 하고 있으니 체제가 붕괴할 수밖에 없죠. 아울러 희박한 인구의 시대에 캐피톨은 너무나 방대하고 고층 건물이 난무합니다. 아마 공실로 부동산 경기가 바닥일 듯합니다. 어쩌면 스노우의 몰락은 부동산 정책의 실패 때문이 아닐까요?
헝거 게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제도도 체제 유지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게임의 목적이 저항했던 역사의 뼈저린 반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닌, 저항을 포기할 정도의 딱 적당한 희망을 주겠다는 상징성을 갖는다는 설정인데, 헝거 게임 같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 보다 더 좋은 희망고문은 넘치고도 남을 듯합니다. 그냥 한해, 또는 한 달의 목표 생산량을 달성한 지역의 순위를 매겨 약간의 풍요만 내려주어도 쉽게 저항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각 구역이 저항한 이유는 말도 안 되는 비인도적인 철권 정치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지 않나요? 차라리 1년에 남녀 한 명씩 뽑아 헝거 게임 하는 것보다는 그 뽑힌 사람들에게 캐피톨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희망 고문일 겁니다. 저라면 헝거 게임(Hunger Game) 보다는 서타이어티 게임(Satiety Game)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헝거 게임의 캐치 프레이즈인 "확률의 신이 그대의 편이기를(May the odds be EVER in your favor)"라는 말부터 그냥 아무렇게나 멋스러운 말을 넣어 놓은 듯한 느낌입니다. 확률은 이 게임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거의 실력이 전부인 게임이니까요. 뭐 조공인을 뽑는 것이야 확률이지만 말이죠.
이 정권이 엉망인 건 반항 좀 했다고 광업을 담당하는 12 구역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인구 적은 나라가 인구의 상당수를 몰살시킨 것도 모자라 그냥 사람들만 끌어다 죽였어도 한심한 짓일 텐데, 폭격으로 인프라까지 날려버리다니요. 반란군에 캐피톨이 무력하게 무너진 이유는 어쩌면 무기 생산을 위한 광물 부족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다른 이야기들
캐피톨에서의 결전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반란군이 지나간 며칠 뒤에 캣니스와 부대원들이 투입되는데, 앞서 진격한 부대들은 어떻게 그곳들을 지났는지, (주인공들에게 헝거 게임의 맛을 보여주어야 하니) 캐피톨의 함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더군요. 그리고 이 함정들을 검출해 내는 홀로라는 장비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함정을 설치한 것이 평화유지군이고, 영화를 보면 평화유지군은 반란군 유인을 위해 후퇴한 상황이니) 이 장비가 평화유지군에게 넘어간다고 딱히 반란군에게 해가 될 이유도 없는데 깨알 같이 복잡한 권한 이양 기능과 자폭기능까지 넣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잭슨이었다면 복스 사후에 캣니스가 홀로를 내놓지 않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냥 왔던 길로 철수하면 그만이었을 것 같습니다.
지하도 클리셰와 지인 찬스 클리셰 - 제발 영화에서 이 두 클리셰를 안 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철저한 보안 시스템에 백도어가 심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걸핏하면 단 한 명의 천재 해커에게 보안망이 뚫리거나 누구나 알법한 지하 통로로 철통 같은 보안망을 뚫는 영화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는 늘 지인 찬스가 나타나요. 모킹제이(2부)에서도 딱 적당한 시점, 적당한 장소에 지인이 안가를 마련해 주더군요. 차라리 캐피톨 한가운데에도 다국적 호텔 브랜드인 컨티넨탈 호텔이 자리하고 있어 생명의 위협 없이 하룻밤 안락하게 쉬어간다는 설정이 더 나을 듯합니다.^^
프리퀄 -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뮤지컬 버전(?)의 헝거 게임이라 그런지 노래들이 좋습니다. 루시 그레이 베어드가 조공인으로 뽑힌 뒤 부르는 노래는 상황이 너무 뮤지컬 같아서 조금은 생뚱맞았지만, 그 생경함을 한번 경험한 뒤에는 노래가 언제 터져 나와도 그냥 봐줄 만하더군요. 헝거 게임 마지막 순간에도 뮤지컬 같은 상황이지만, 이때는 그러려니 하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이첼 제글러의 노래도 좋습니다. 영화를 본 뒤 한동안 OST를 들었더랬습니다.
다만, (주관적 시간 감각으로는) 지나치게 긴 상영시간, 헝거 게임 시리즈를 통해 스노우라는 인물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등 궁금할 것 같지 않은 젊은 시절 스노우의 인생 역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명확한 한계를 지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작자가 캐릭터 구축에 재능이 없는지, 캣니스건 루시건 이들이 주인공이 될 만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캣니스는 묘한 매력을 가진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를 했으니 배우 자체의 매력으로 이게 어느 정도 해소가 되지만, 루시의 경우에는 "저 여자를 왜?" 하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영 어덜트 원작이니 여주인공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모든 사람이 열광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겠지만요.
이 시리즈는 끝이 없는지, 돈이 되는지 또 하나의 프리퀄 영화가 나온다고 하네요. 이번에는 헤이미치의 우승 이야기인 것 같은데,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우디 해럴슨 덕에 빛을 보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라 젊은 시절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어찌 되었건 최종 보스의 성장기니 그나마 관심이 갈 수도 있지만, 방구석에서 혁명에 참석했던 헤이미치의 미래를 알고 있는 우리가 그의 우승 스토리를 봐야 할지 의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리즈는 원작이건 영화건 영 어덜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지나 말론이 연기한 캣칭 파이어의 조한나 외에 다시 보고픈 매력적인 캐릭터는 없지만, 일단 시작하면 꾸역꾸역 보게 만드는 매력도 있는 시리즈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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