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매니아적인 측면이 거의 없는 반면, 딸은 매니아적인 면과 함께 수집가의 면모도 제법 보이는데, 지난 1년여 딸이 빠져 지내는 것 중 하나가 배틀그라운드입니다. 지난 생일에는 선물로 받고 싶다고 해서 조준경과 소음기까지 달린 P90 모형을 사주기도 했고, 관련 팝업 스토어 행사도 다녀오기도 했죠. 성수동에 펍지(PUBG) 성수가 상설화 된 이후에도 혼자 다녀오고 굿즈도 사 오고 했는데, 얼마 전 다른 전시도 볼 겸 저도 따라나서 펍지 성수를 다녀왔습니다.

DDP 같은 관주도의 (실패한) 도시재생 스타일에 대비되는, 관은 판을 깔아주고 민간이 주도해서 만들어가는 도시재생의 (현재까지는) 모범 사례인 성수동과 같은 사례, 특히 펍지 성수처럼 공장을 최소한만 손봐서 새로운 시설로 활용하면서 주변상권의 앵커 역할을 하거나 랜드마크로 변신하는 경우는 외국의 사례는 제법 많지만, 국내는 성수동이 가장 대표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쇼핑공간이었다면 실외 주차장으로 사용했을 외부 공간은 입구부터 병영에 입소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배틀그라운드를 테마로 한 그래피티가 외벽을 장식하고 있고, 이런저런 문화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건물의 공간의 명칭은 딱 봐도 배틀그라운드의 테마를 표현하면서도 용도도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총 3개 층인 건물의 1층은 이런저런 전시와 행사를 할 수 있는 2개 층높이의 실내 공간인 서바이벌 홀, 굿즈 판매점인 루트 스토어, 카페인 펍지 카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펍지 카페의 메뉴는 사녹 사과 에이드, 에란겔 길리슈트 라떼, 아드레날린주사기 스무디 같은 게임과 연관된 시그니처 메뉴와 아메리카노 같은 일반적인 메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에란겔 길리슈트 라떼를 마셨는데, 녹차라떼에 커피 얼음을 얹은 독특한 메뉴로 게임상의 아이템과의 연상에서 그럴듯한 모습입니다. 딸은 에너지 드링크 캔을 마셨는데, 캔 디자인이 게임상 아이템과 같아 빈 캔을 가지고 가겠다는 목적이었습니다. 루트스토어의 상품은 생각보다 종류가 많지는 않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모두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닐 듯싶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예쁜 쓰레기라는 와이프의 강력한 저항을 넘어서는 것이 큰 일이기는 합니다만.
2층은 카페와 외부 계단으로 연결되어 음료를 마시거나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인 카페 라운지와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트 캠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카페 라운지에는 비밀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듯합니다. 제가 갔을 때는 라운지에서 디제잉을 하고 있었는데, 상시로 운영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카페 라운지에는 게임, 스타일, 판타지 소설 등 제법 다양한 책들이 있는데, 고가의 외서도 있어 잠시 쉬면서 즐기기 좋습니다.
3층은 플레이 아레나라는 이름의 멋진 디자인의 PC방이라 할 수 있는데, 라운지에는 PC방에서 제공되는 식음료를 파는 공간과 함께 헬멧 등의 아이템을 사용해 사진을 찍거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문득 스타크래프트가 국민 게임이고 넷츠고라는 인터넷 서비스가 론칭해 주가를 올리면서 강남역 4거리에 초대형 호화 PC방을 만들어 내로라하는 게이머들을 불러들였던 시절을 추억하게 하더군요. 지금은 방송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한때는 세계 최강이던 기욤 패트리도 만나고 모 그룹 스타 동호회 회장도 만나 친목을 다질 수 있던 공간. 펍지의 이런 공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해보는 것도 그럴듯한 일일 것 같은데, 주말임에도 생각보다 사람이 없더군요. 플레이 아레나 밖에는 지금 같은 계절에는 너무 더워 활용할 수 없지난 봄 가을에는 최상일 공간인 카페 루프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배틀그라운드를 좋아하는 딸아이의 경우에는 오고 또 오고 싶은 장소임은 분명한데, 배틀그라운드를 모르는 제게 펍지 성수는 어떤 공간이었을까요? 우선 디즈니 캐릭터를 모르고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디자인 만으로도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디즈니 랜드와는 다릅니다. 배틀그라운드 문외한이 펍지 성수를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우와"할 수 있는 공간은 사실상 없습니다. 그냥 전쟁을 테마로 적당히 꾸민 넓은 공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배틀그라운드를 즐기지만 딸처럼 매니아 기질은 없는 아들의 경우에도 크게 흥미로워하지 않으니 배틀그라운드 유저 중에서도 이 공간이 감동을 창출할 수 있는 인구는 제한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성수동 메인거리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지하철 서울숲역이나 뚝섬역에서는 가까운 위치지만, 주말에도 제법 한가한 편이라는 사실이 이 제한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 뭔가 이벤트가 있으면 달라지겠지만, 관심이 있어도 재방문을 하게 될만한 매력이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물론 딸아이는 지속 방문하면서 이벤트마다 득템을 하거나 굿즈를 용돈의 범위 내에서 하나하나 모으고 싶어 하기는 합니다.
일반인이 아니라 과거 프리챌 시절 제법 잘 나가던 (자칭 4대 길드) 스타크래프트 동호회를 운영했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제가 배틀그라운드를 예전의 스타크래프트 (또는 훗날의 WOW) 정도로 즐긴다면, 그 시절 넷츠고의 NET PC방이 하던 역할을 펍지 성수가 할 수 있고, 아마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직장이 성수에서 가깝다면, 동료들과 성수동 핫플레이스에서 밥 먹고, 플레이 아레나에서 게임하고, 펍지 카페에서 비켄디 설원 쿨러를 테이크아웃해 카페 라운지에서 게임 뒷담화를 나눌 것 같습니다. 매월 한두 번은 좀 광범위의 모임을 부트 캠프에서 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때와 같다면 일 년에 몇 번 대회도 열겠죠.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사용하고 있을 것이고, 그러기에 펍지 성수는 더할 나위 없는 공간입니다.
게임과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 성수동을 쇼핑이나 팝업 방문을 위해 가는 경우, 지하철을 이용한다면 메인거리 동측에서 시작해서 서측으로 이동하고 잠깐 걸어서 펍지 성수에 들러 성수동의 다른 카페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한적한 카페에서 음료 한잔 마시며 휴식을 취한 뒤 뚝섬역이나 서울숲 역을 이용해 귀가하는 코스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이런 점에서 관광지나, 명소나 어트랙션이 아닌 개념에서 펍지 성수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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