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단 한 번도 바이닐이라는 용어를 써본 적이 없고 LP라는 이름만 사용했는데, 요즘은 영어권의 명칭인 <바이닐>이 더 많이 쓰이는 듯합니다. 과거에는 길게 음악을 담을 수 있다는 기능상의 장점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80분 재생의 CD시대를 넘어 무한 재생이 가능한 스트리밍의 시대에 고작 한 면에 30분 정도를 담은 매체를 LP(long playing)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요리건 음악이건 재료가 중요하다는 물질주의 때문인지, 단지 서양식을 따라 하는 겉멋인지는 모르겠지만 옛 추억의 명칭을 따라 <비니루>나 <비닐>이라 부르지 않는 것도 신기합니다. 이러다 비닐하우스를 서양식으로 부른다고 플라스틱하우스로 부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근자에 있었던 LP관련 소소한 사건과 그에 따른 무궁한 상상력의 결과를 아래 적어볼까 합니다.
[옛날 옛적 예당에서]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서울 예술의 전당 공연 관람을 앞두고 저녁을 먹을 곳을 찾다 다들 예당 내의 음식 말고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고 해서 남부순환로 건너편에 있는 지역 맛집인 <서초김치찌개>에 들렀다 예당으로 가는 길에 지하도를 건너는데 지하도를 활용한 공간인 <서리풀 아트 스튜디오>라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예당 공연 전 밥을 먹거나 공연 후 밥을 먹은 적은 많아도 주로 예당 내에서 해결했기에 음악당과 국악원 사이의 지하도는 처음 건너는 지라 그런 시설이 있는 줄도 몰랐었습니다.
서리풀 아트 스튜디오는 주로 연습공간으로 대여하는데, 한편에 LP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더군요. 공연시간이 남아있기에 가족들과 함께 체험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집에 본가에서 네 물건을 더는 쌓아둘 수 없으니 가져가라 해서 가져온 LP가 거실 한쪽에 쌓여있지만 턴테이블이 없어 듣지도 못하고 아이들도 그냥 이런 게 있었다 했던지라 와이프도, 아이들도 LP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아들과 와이프는 얼마 전 그래모폰상도 수상한 임윤찬의 쇼팽을, 저와 딸은 아르헤리치의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을 들었습니다. 집에 CD가 쌓여 있어도 (물론 음악적 취향의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타이달이나 유튜브를 통해 음악을 듣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물리적 매체를 장비에 걸어서 음악을 듣는 행위가 신기한 것 같더군요.
[얼마 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얼마 전 저녁 식사 중에 갑자기 LP 이야기가 나왔고, 쌓여 있는 LP는 왜 안 들으며, 안 듣는다면 왜 그냥 쌓아두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지금은 턴테이블도 없고, 공간도 애매해서 나중에 애들 내보내고 집도 한적해지면 한편에 턴테이블 놓고 들을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몇 년 전 그냥 도매금으로 싹 처분할까 생각도 했지만, 귀찮아서 남겨두고 보니 옛 생각도 나고 LP 붐도 일고해서 뭔가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 처분만은 막아보자는 생각에 한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와이프가 "턴테이블 놓을 공간이 왜 없어 저기 저것들 정리하면 되겠구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기 저것들>이 놓여 있는 장소는 사실 서브우퍼 위 인지라 면적이나 장소적 특성이나 턴테이블을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곳이기는 합니다만, 그런 상세한 디테일은 일단 무시하고 쿨하게 <고민 좀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상상 속으로]
와이프가 쿨하게 턴테이블을 이야기했다고는 해도 턴테이블 가격을 포함한 오디오의 일반적인 가격대를 와이프는 전혀 모르니 단박에 제가 좋아하는 아이폰 디자이너였던 조니 아이브가 디자인한 Linn Sondek LP 12 50주년 기념작을 들여놓겠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빌드업을 잘하면 급은 한참 달라도 같은 LP 12인 Majik이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꾸기도 해봅니다. 결혼 후 본가에 대충 쌓아놓은 시절이 10여 년인지라 부모님도 처음에는 제가 언젠가는 가져가겠거니 하고 신경 쓰셨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여동생을 비롯해서 들고 가는 사람을 말리지는 않아서 엄청나게 양이 줄은 상태라 해도 현재 가지고 있는 LP의 양을 따지면 여전히 (LP세대가 아닌) 어정쩡한 바이닐 세대들 보다 많은지라 그것만 생각하면 제법 쓸만한 제품을 갖춰야 할 듯하지만, 앞으로 추가로 바이닐을 구입할 생각은 <전혀> 없기에, 그 생각을 하면 낡은 추억의 음반들을 뒤적이자고 (그중 상당수는 이미 CD로 가지고 있고 스트리밍을 통해서는 대부분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돈을 투자하는 것도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재미로 놀기에는 티악이나 레가의 저가 버전이 딱이고, 앞으로 변덕이 불어 다시 <바이닐>을 할지도 모른다는 정신없는 생각에 최고로 쓴 다고 해도 Linn의 LP 12 Majik 정도인지라 만약 턴테이블을 들인다면 이 중간 어디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여전히 <상상>의 영역이기는 합니다. 혹시 상상이 현실이 되면 또 글을 올리죠^^.
[부록 : 역시나 바이닐이 CD나 스트리밍에 비해 음질이 좋다는 댓글이 달릴까 봐 한마디]
바이닐로 듣는 음악이 더 좋게, 음악적으로, 따스하게, 인간적으로, 매력적으로, 맛깔나게, 생생하게, 처절하게, 섹시하게, 흥겹게,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음질이 더 좋게 들려서/느껴져서> 바이닐로 음악을 듣는 것은 공감합니다. 저도 CD 초창기에는 그 이유로 고집불통의 LP 파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SP나 실린더 복각 음반도 즐겁게 듣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음질>을 어떻게 정의하는지(해상도/다이내믹/계조 등)에 따라 측정해야 할 값은 다르지만 음질은 그냥 <측정값>이라서 객관성의 영역이고, 바이닐은 물리적 특성상 (정상적인 경우라면) 결코 CD보다 음질이 더 좋을 수 없습니다. 마스터링을 비롯한 다양한 이유에서 더 좋게 <들릴 수>는 있어요. 하지만 <더 좋게 들리는 것>과 <더 좋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CD를 포함한 디지털 음원은 계단파이고 바이닐은 아날로그라 아날로그 파형이 나온다는 것도 헛소리고요. 바이닐의 소릿골이 아날로그라 무한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헛소리예요. 그런 이야기는 마치 바이닐의 1번 트랙이나 마지막 트랙이나 둘 다 아날로그니 음질이 똑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이야기로 샘플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전설>입니다.
참고로 이런 저런 음질 논쟁에 대한 제 입장은 이 블로그 오디오 카테고리에 몇몇 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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