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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onderful Life

헬조선, 팩트, 그리고 여전히 회자되는 거짓들

by 만술[ME] 2016. 4. 1.

요즘 건강상의 이유로 태어나 커피를 마신 뒤, 최장기간(무려 2주 정도)을 커피를 끊고 지내고, 회사에서도 대충 시간만 때우고 있습니다. 때문에 뭔가 새로운 글을 올릴 형편이 아니라 예전에 SNS에서 올렸던 글을 재활용 합니다. 블로그에 올리는 현 시점하고 시간차가 있어 생기는 문제는 그냥 넘어가시길...



[나는 기득권의 교육에 얼마나 잘 세뇌되었나]


페북에서 지인들이 하도 링크를 걸길래 읽어본 글이 있는데, 처맞을 각오를 했다니 한마디 하자면, 글쓴이가 나름 고민을 한 건 인정하겠지만,


1. <민중>이란 단어가 생소하고, 투쟁적인 낱말들에 뭔가 거리감을 느끼고 죄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나 하는 심리적 압박이 느껴진다면, 그건 지배계급의 교육 때문에 잘 세뇌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아마 본인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별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친구 만나고, 많이 생각한다면 좀 달라질 것이다.


2. 한국의 집회가 언제부터 변화를 멈추었는지, 왜 멈추었는지를 생각해보려면, 불과 몇 년 전 이명박 정권 초기의 촛불집회들과 그 <수준 있던> 집회들이 어떻게 짓밟혔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간단히 말해 집회도 정권의 수준과 그 대응방식에 따라서 그 수준이 달라지게 되어 있는 거다. 80년대에 <수준있게> 집회를 했다면, 푸틴-메드베데프-푸틴으로 이어지는 친구끼리 대통령 돌려먹기를 대한민국에서 먼저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쯤은 그 똘만이들이 돌려먹고 있겠지.


3. 그다지 투쟁적이지 않은 집회에 참가하고 싶으면 동사무소 앞에서 하는 님비적 집회들이 딱이니 거기나 가시길.


나름대로 발전적인 대안의 취지로 글을 썼을 것이라는 생각은 합니다만, <민중>, <노조>, <노동자> 같은 말에 어딘지 모를 심리적 거리감을 느낀다면,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오고, 배워온 과정을 먼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이 글을 올렸던 취지는 원글을 쓴 분에 대한 반박 보다는 그글을 읽고 끄덕이며 퍼다 나르고, <좋아요> 날리는 페북의 지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팩트의 전성시대]


팩트, 팩트, 팩트 - 어디를 가나 담론에서 <사실>의 전성시대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팩트>는 <사실>과 다르다는 요상한 주장도 있지만, 난 <사실>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영화에서조차 한쪽 편에 (마블 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있다면, 다른 편에는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을 강조하는 영화들이 있다. 난 이 <사실에 기반을 둔> 것만으로 적당한 <도덕>을 제시하고는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양태가 불편하다. “이게 사실인데 뭐 어쩌라고?” 어디서 듣던 이야기 같지 않은가? “이게 현실인데 뭐 어쩌라고?”


더구나 이 <사실>에 기반을 둔 담론들의 귀결은 놀랍게도 <감동>의 영역이다. 이건 영화, 소설 등의 예술 분야만이 아닌 사회적 담론들까지 그렇다. <이성>이 배제된 채 감동하고는 잊힌다. 그리고 감동했다는 것으로 <도덕적 위안>을 삼는다. 수없이 많은 사건들에서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삼색기>와 <노란 리본> 같은 <공감>의 표시도 있지만, 결국은 <요구사항>과 <대책> 등 이성적인 영역이 아니겠나. 하지만 <감정>의 힘에 눌려 <이성>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곤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얼마나 훌륭한 장인의 솜씨로 <감정>과 <이성>을 버무려 놓았던가!


페북에서 니체를 들먹이는 건 우습지만, 진정한 윤리는 <외부의 틀에서 주어진> 도덕과 달리 단순한 <사실>을 넘어 개인의 결단과 행동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단과 행동은 <이성>의 영역이다.


우선은 <팩트>라는 용어에 불만이 있고 (특히 f발음 나는 단어를 우리말로 표기하면서 <팩>트라 하는 것을 보면 먼저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그 <팩트>만을 숭배하는 듯한 담론들에 불만이 있습니다. 아울러 그 <사실>들이 얼마나 순수하지 않은지는 알 정도로 철들이 들지 않았냐는 생각도 들고요. 사실의 확인과 그 다툼속에서 중요한 담론들이 묻혀버리는 현실이 싫어서 올렸던 글입니다.



[헬조선이란 용어에 대한 불만]


나는 흔히들 사용하는 <헬조선>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건 내가 이 땅의 지금 상황이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충분히 지옥 같은 상황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헬조선>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나라>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이며, 그 <과거>도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암담한 봉건적 과거라는 멋진 레토릭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 바로 이곳>을 <헬조선>이라는 근대국가 이전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을 차용해 지칭한다는 것은 내게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이곳>을 과거의 망령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하데스>라는 저승의 신의 이름조차 무서워 제대로 부르지 못하며 풍요로운 자라는 뜻을 지닌 <플루토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인가와 맞서 싸우려 한다면, 그것의 참된 이름을 불러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헬조선> 담론이 결국은 자조적 유희로 끝나는 상황을 경계하고 싶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처지를 바로 볼 용기조차 없고, 그것을 바로 말할 용기가 없다면 변화와 대안은 너무나 먼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헤겔 - 삼십년만의 귀환]


요즘 읽고 있는 책 : 한권 한권 전권을 읽어나가고 있는 프리즘 총서로 나온 찰스 테일러의 <헤겔>.


1. 1080쪽 - 너무 두껍고, 무겁고, 읽는데 끝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헤겔 철학이니!)


2. 30년 전에는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읽으면서 헤겔을 전체주의의 원흉으로 보았다면, 이제는 포퍼가 나이브한 자유주의자로 보인다. 군부독재에 신음하던 시절에서 신자유주의에 질식하는 시절로 변했기 때문인 듯.





저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저는 과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포퍼를 지지했습니다. 물론 한 때 페이어아벤트를 엄청나게 추종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토마스 쿤과 페이어아벤트의 포퍼에 대한 <오해> 또는 그 둘의 언명들에 대한 포퍼적 <재해석>으로 논문을 쓰면서 포퍼의 방법론과 화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헤겔에 대한 <열린사회> 논쟁에 있어 시대의 변화는 저로 하여금 다시 헤겔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변화시켰습니다. 30년전에는 국가가 민중에 위협적이었다면, 현재는 자유로운 자본이 보다 더 위협적인 세상이기 때문이겠죠.



[카레라스와 도밍고의 진실 - 제발 검색 한번만 하고 글을 씁시다!]


2011년 카레라스의 백혈병 치료와 관련된 도밍고와의 우정 이야기를 처음 듣고 뭔가 수상해서 조사한 뒤 (아마 국내서는 최초로) 이 그럴듯한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밝혀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이 <훈담>은 수없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고, 목사님들의 일요일 단골 매뉴로 등장하고 있다. (구글에 검색한번 해보면 위 블로그의 글을 바로 볼 수 있으니 사람들이 진실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들을 안하는지!)


아직도 한글판 위키피디아에도 버젓이 등재되어 있으니, 한번 인터넷에 퍼진 거짓, 특히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담긴 거짓을 몰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듯하다. 선거철이니 또 일단 질러보는 이야기들이 수없이 쏟아질 것이고 그 거짓들은 사람들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겠지...


아래는 내가 몇년전 찾아낸 카레라스 측의 공지.


http://www.fcarreras.org/en/denial-of-published-information-concerned-alleged-financial-suport-by-mr-pl%C3%A1cido-domingo-and-fundaci%C3%B3n-hermosa-to-mr-josep-carreras_31308



위키피디아 한글판 카레라스 항목



위키피디아를 수정해 보지 않아서 수정을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을 보면 특히 선거철인 지금 너무 무섭습니다.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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