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의 카톡을 통한 대화에서 발췌. 요즘 이곳저곳에서 다루어져 대충 내용은 아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대한 지인과의 대화입니다.
MF[ME]
A : 국역본이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인 <21세기의 자본>이 국내서도 이렇게 뜨는 이유가 뭘까?
만술 : 내 생각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우선 영어 번역본이 많이 팔렸다는 것, 책 제목을 그 유명한 <자본론>에서 따와서 묘한 향수와 도전의식 등을 느끼게 한다는 점, 전 세계적으로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고 신자유주의는 거의 수퍼바이러스처럼 죽을 것 같지 않다는 점,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이제는 체제의 위기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은근히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A : 문학동네(글항아리) 대박 났지? 그런데 그 1000쪽에 달하는 막대한 양을 번역하면 가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읽기도 힘들 것 같고?
만술 : 동감이야. 아마 국역본은 불어본에서 번역하는 것은 아니고 영어 번역본을 저본으로 해서 불어본과 대조하는 방식인 것 같더라구. 한창 떳을 때 팔아먹어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야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닐까 생각해. 만약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들어간다면 나중에 개정판을 내면서 "불어판에서 번역한 완전판" 따위의 마케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책을 백만부 이상 팔아먹을 수 있는 나라에서 <21세기 자본>도 팔어먹을 수 있을지 어찌 알겠어?^^
A : <정의란 무엇인가>는 400쪽짜리고, 그리고 어느정도는 일상생활에 가까운 사례들이 나왔지만 <자본>은 경제학에다가 내가 알고 있기로는 엄청난 사료들을 분석한 내용인데 ㅡ 더구나 수식도 나오지 않아? ㅡ 팔릴까? 아마 두께 때문에 분책으로 나오면 1권만 팔릴꺼야.
만술 : 글항아리에서 책내는 스타일을 보았을 때, 양장본으로 단권으로 낼꺼야. 그런데 정가가 아마 4~5만원은 되어야 될 것 같은데? 아무리 유행하는 책이라해도 그 가격에 많이 팔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더구나 출판시기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올 가을을 넘기면 유행도 한물가서 판매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듯. 물론 판권을 워낙 싸게 구입했으니 뭐 밑지지는 않겠지만.
A : 암튼 그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데 이 난리야?
만술 : 언론에서 워낙 많이 이야기 해놨잖아. 나도 안읽은 걸 어찌 알겠어? 나도 그냥 줏어들은 풍월이지. 내가 경제학 전공도 아니고 영문판으로 읽을 이유도 없고, 아마 국역본 나와도 바로 읽지는 않을 것 같아. 1년이나 2년 지나서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하면 몰라도. 그런데 사실은 골짜만 알면 내가 생각하는 관심 범위는 그냥 충족되는 것 같아서 땡기지는 않아. 뭔가 우리가 '느끼는 것'을 실제 자료들을 뒤지고 수식화해서 던져주었다는 데 의미가 있지.
A : 헛소리 말고 간단히 요약해봐
만술 : 간단히 말해서 꾸준히 자본-소득비율이 증가해왔다는 것이야, 이말은 한 나라에서 소득의 증가보다 자본의 증가가 더 높았다는 것이고, 결국은 상속받은 자본의 불평등이 소득의 증가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지. 즉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전문직 고액 연봉자가 되고 월급이 올라도 놀면서 상속받은 사람들이 부를 늘리는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지. 피케티는 이렇게 우리가 품고 있는 은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과는 경쟁이 안되다는 직감을 역사적으로 축적된 자료를 통해 보여주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어.
A : 제목으로 보면 어딘지 원작 <자본>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비판하거나 하는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군. 그러면 그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
만술 : 당연히 해결책은 제시하고 있지. 나름대로 많은 국가들이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하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 정도로는 택도 없거든. 피케티는 흔히 취하는 소득에 대한 세금, 특히 누진세를 소득이 아닌 자본에 부과하는 방법에 대해 주장하고 있어. 오히려 소득에 대한 세금을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물론 자본의 특성이 한 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그나라의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한나라만 초토화되어버릴 수도 있으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각 국가들이 이런 방식으로 자본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지.
A : 보기에 따라 어떤 엄청난 혁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니 현실적인 대안 같기도 하고,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거의 유토피아적인 생각 같기도 한데?
만술 : 아마 그래서 앞부분 ㅡ 분석에 대한 부분 ㅡ 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는 반면, 뒷부분인 대안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반론이 많은 모양이야.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자본에 대한 누진과세는 참신한 아이디어이기는 한데, 그것으로 수퍼바이러스 처럼 변화무쌍한 자본주의를 치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야. 다만 자본주의는 노력하는자에게는 달콤한 과실을 안겨준다는 낡아빠진 모토를 다시 부활시키는 역할은 수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
A : 아무튼 이런 책이 뜨는 것을 보면 정말 불평등이 어느정도는 한계에 도달한 것 같기는 해. 그런데 과연 '사회안정'이라는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불평등 해소를 위해 모험을 할까?
만술 :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때로 자신들이 부자들 보다 잃을 게 많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을 것 같아. 미국이나 일본의 국민들이 모험을 한다면, 아마 그때쯤 되어야 유행을 따라 모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 불과 30년전까지만해도 독재타도를 위해 시민들이 거리로 나설 수 있었던 나라 ㅡ 물론 그 주축은 학생이었지만 ㅡ 였는데, 그 기억은 모두 지워져버린 것 같아.
A : 그건 너나 나를 봐도 남들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만술 : 더 슬픈건 어쩌면 조금 늦게 '때'가 온다면 나가고 싶어도 몸이 노쇄해서 못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슬퍼. 물론 장 발장을 보면 나이가 꼭 문제는 아니지만.
A : 하지만 장 발장은 타고난 장사였다는 것이 함정. 운동이나 열심히 해두자구.
* * *
2014.09.02 추가
오늘자 <한국경제신문>에 피케티가 틀렸다는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사설까지 올라왔습니다.
과연 인터넷판은 스포츠 찌라시 버금가는 낚시성 제목으로 도배하면서 지면은 자본가의 마음에 쏙드는 제목을 뽑아내는 데 주력하는 <한국경제신문> 다운 행보입니다. 이런 피케티를 씹는 근거가 되는 몽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경제학자들의 모임인데, 요즘은 '신'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창단 멤버중에는 무려 칼 포퍼도 있어 그의 과학철학을 추종했던 저로서는 참 씁쓸합니다. 특히나 저는 <열린사회> 논쟁에서 80년대의 대학 분위기속에서도 포퍼를 지지했거든요.
아무튼 제가 아는 피케티의 주장들을 볼 때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잘근잘근 씹을 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날이 갈수록 불평등해진다는 비밀아닌 비밀을 폭로하다니! 더구나 자본에 대한 누진과세라니! <피케티는 틀렸다, 韓 中의 발전을 보라>는 표제는 솔직히 기사를 읽을 가치를 상실하게 합니다. 그런식이라면 민주주의가 틀렸다는 것을 자국민이 지지하는 3대 세습 정권의 예를들어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마르크시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자본주의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분배의 정의 따위로 해소하려는 체제 순응적인 주장이라고 피케티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자본에 과세할 것이라고 보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라고 비판 할 수도 있죠. 사실 마르크스는 분배나 평등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원천적인 자본/노동과 생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죠.
아무튼 사설까지 써가며 호들갑 떨 정도로 불평등에 대한 진실과 자본에 대한 과세는 무서운 것인가 봅니다.^^ 그리고 저 사설 쓰신분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안읽어 보셨나봅니다. 피케티의 책은 제목이 <21세기 자본>일 뿐이지, 사실상 마르크스의 <자본>과는 상관 없으며, 마르크스는 사설에서 나온 경제민주화, 부자증세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답니다. 아마 피케티를 대충 종북 쫘빨로 몰고 싶은가 봅니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피케티의 <자본>
피케티는 <자본>을 사실상 재산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반면,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은 생산양식의 문제로 단순히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본문에서 언급했듯 부의 불평등에 대한 <분배의 정의> 같은 문제가 마르크스의 관심사가 아니고, 마르크스는 바로 생산양식에서 비롯한 근원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방안에 관심이 있습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국내에서 조차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자본>에 대한 분석이 불평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보다는 재산의 분배라는, 그것도 이자율이 성장률을 초과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부의 집중에 대한 극히 표면적인 현상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생산양식의 근원적 문제가 아닌 단지 부의 편중을 문제 삼는 한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자본>에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온건한 책이라는 것이죠.
이런 견지에서 보면 이런 온건한 입장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내의 상황은 국내 자본주의의 현주소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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