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재클래식스 덕분에 <열하일기>를 읽기 전에만 해도 <열하일기>는 <호질>, <허생전>이 들어있는 학자들이나 읽는, 그냥 이름만 들어 본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연암 박지원이 살아서 말하는 듯한 생생한 그 문장들에 한번 놀라고, 그 문장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두 번 놀라고, 그의 박학과 깨어 있음에 세 번 놀라는 경험을 했습니다. 유학과 중국역사에 대해 배경지식이 없는 경우 좀 힘들 수도 있지만, 단순히 <여행기>라 하기에는 너무나 재미있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라 생각하기에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한번 도전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좌로부터 보리 / 올재 / 돌베개 반양장 / 돌베개 양장]
교보문고 기준으로 완역본이 아닌 것을 제외하고 현재 나와 있는 판본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동서문화사 / 고산 / 2010
돌베개 / 김혈조 / 2009 / 3권
보리 / 리상호 / 2004 / 3권
올재 클래식스 / 이가원 / 2013 / 2권
이중 올재클래식스의 이가원 번역본은 1968년 번역본을 사용했으며, 시리즈 특성상 절판 된 지 오래입니다. 제가 읽은 것은 올재의 이가원 번역본과 돌베개의 김혈조 번역본이기 때문에 두 책을 비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올재클래식스에서 택하는 번역 판본들은 ㅡ 비용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ㅡ 이 사람들 어디서 이런 번역 판본을 찾아냈나 할 정도의 <추억의 판본>인 경우가 많아, 싼 가격에도 꺼려지는 경우가 많은 데, <열하일기>는 지난번 선풍적인 인기로 조기 매진된 <수호지>(원래는 <수호전> ㅡ 이게 다 <삼국지> 때문이다!)와 함께 매우 가치 있는 판본이라 생각합니다.
1. 편집
올재클래식스는 발간 취지와 가격에 맞게 단출한 구성으로 두 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글씨는 제법 작지만 읽는 데 불편함은 없습니다. 김혈조 번역의 돌베개 판본은 세 권으로 나누어 번역했으며, 더 큰 글씨에 보기 편한 편집을 했습니다. 종이질이야 비교가 안되고요. 아울러 사철제본 소프트커버와 사철 하드커버의 두 가지 판본으로 출간되어있습니다. 소프트커버의 경우도 사철제본이라 일반 무선제본에 비해 튼튼합니다.
<열하일기> 자체의 판본이 좀 다양하므로 번역본마다 순서가 좀 달라질 수 있는데, 올재의 번역본은 1권에 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 관내정사, 막북행정록, 태학유관록, 환연도중록, 경개록, 심세편, 망양록을 담고 2권에 혹정필담, 찰십륜포, 반선시말, 황교문답, 피서록, 양매시화, 동란섭필, 옥갑야화, 행재잡록, 금료소초, 환희기, 산장잡기, 구외이문, 황도기략, 알성퇴술, 양엽기 순으로 담았습니다.
김혈조 번역본은 1권에 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 관내정사, 막북행정록을 담고, 2권에 태학유관록, 환연도중록, 경개록을 담아 여기까지는 이가원 번역과 순서가 같습니다만 이후는 황교문답, 반선시말, 찰십륜포, 행재잡록을 담은 뒤, 심세편, 망양록을 담고 곡정필담, 산장잡기로 이어집니다. 이어서 3권에서는 환의기, 피서록, 구외이문, 옥갑야화, 황도기략, 일성퇴술, 양엽기, 동란섭필, 금료소초 순으로 마무리됩니다.
사실 순서가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초반은 여행의 순서에 따라 읽어야 하지만, 이후의 내용은 여행 중의 여러 사항들을 다룬 각론이라 크게 순서가 중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큰 차이는 <鵠汀筆談>을 이가원은 <혹정필담>으로 김혈조는 <곡정필담>으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鵠>은 요즘은 <곡>으로 읽지만 예전에는 <혹>으로도 읽었던 것 같더군요. 어떤 문건에는 고니의 뜻으로는 <혹>으로 따오기의 뜻으로는 <곡>으로 읽는다고 하지만 요즘의 범례는 고니의 뜻으로도 <곡>으로 읽습니다. 어찌되었건 현대적 번역으로는 <곡정필담>이라 하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
2. 번역 문체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제가 전공자도 아니고 연식이 좀 되기 때문에 한자를 조금 아는 것뿐이지 한문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 할 처지가 못됩니다. 더구나 이가원 선생은 모태 한문학자에 <열하일기> 원본을 수집해서 보유하시다가 기증하신 분이고, 김혈조 선생 역시 박지원 문학을 전문으로 하신 학자에 직접 <열하일기>의 경로를 답사하고 자료화하여 책에 수록하신 분이니 감히 제가 번역이 어떻네 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체에 대해서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가원 번역본]
무엇 때문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말을 이 글 첫 머리에 썼을까. 행정(行程)과 음(陰)·청(晴)을 적으면서 해를 표준 삼고 따라서 달수와 날짜를 밝힌 것이다. 무엇 때문에 ‘후’란 말을 썼을까. 숭정(崇禎) 기원(紀元)의 뒤를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 하였을까. 숭정 기원 뒤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김혈조 번역본]
무엇 때문에 이글의 첫머리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간지干支를 쓰는가? 여행의 일정과 날씨를 기록하며, 연도를 기준으로 삼아서 달과 날짜를 기록하려는 것이다.
후경삼자의 후後는 무엇의 뒤라는 말인가? 숭정崇禎을 연호로 삼은 연도인 1628년의 뒤라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고 했는가? 숭정을 연호로 삼은 뒤 세번째로 돌아온 경자년(1660, 1720, 1780)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보시는 것처럼 돌베개 판은 문단을 짧게 나누었고, 올재 판은 길게 나누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제가 읽어 본 바로는 <열하일기>가 친숙한 내용을 다루거나, 긴 문단 호흡을 요구하는 내용은 아니므로 돌베개 쪽이 읽기 편했습니다.
용어의 사용은 번역시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돌베개가 편합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행정(行程)>보다는 <여행의 일정>이, <음(陰)·청(晴)>보다는 <날씨>가 아무래도 편하죠. 물론 역으로 뭔가 운치 있는 옛글을 읽는 맛은 올재 판이 더 있겠고요.
여기에 돌베개 판에서 숭정1년을 1628년으로 부가하여 본문에 표기하거나 세 번의 경자년을 주석이 아닌 본문에 표시한 감각이 돋보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이런 식이기 때문에 서기가 익숙한 현대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편합니다.
3. 주석과 부가자료
주석은 두 가지 번역본이 모두 부족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명 등의 주석에 있어 그 상세함에서는 차이가 제법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종열황제(毅宗烈皇帝)에 대한 두 판본의 차이를 보시죠.
올재클래식스 : 명의 최후 황제로서, 1635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에 북경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돌베개 : 의종의 본명은 주유검(1611~1644)이다. 처음의 묘호는 사정이었으나, 의종으로 바뀌었다. 시호도 처음에는 민제였으나, 건륭 때 장열제로 바뀌었다. [한자병기는 인용자의 편의에 따라 생략]
솔직히 주석의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닌데, 결정적인 부분은 부가자료에 있습니다. 올재의 <열하일기>는 연암의 여행경로에 대한 1/4쪽짜리 지도 하나를 제외하면 어떠한 자료도 제공하고 있지 않지만 (번역 당시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죠) 돌베개의 <열하일기>는 다양한 사진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본문의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근본적으로 <열하일기>가 여행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정적인 장점이기도 하죠.
아울러 돌베개 판은 <색인>이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습니다.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책에서 색인이 빠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치명적인 약점이라 생각하는데, 올재 판본은 번역의 시기, 가격 등을 생각하면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은 듭니다. (유명한 출판사의 책들도 원서에는 있는 색인을 번역할 때 빼먹는 경우도 있으니 말 다했죠.)
4. 결론
세트로 5,800원짜리와 84,000원짜리(소프트커버 기준) 판본을 비교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가격을 불문한다면 현대적인 번역체, 더 풍부한 주석, 엄청난 부가자료와 색인, 튼튼한 장정 등 김혈조 선생이 번역한 돌베개 <열하일기>는 결정판이라 할 만합니다.
반면 아이패드를 옆에 두고 책을 읽어가면서 검색을 병행하며 볼 각오가 되어 있다면 (제가 판본의 상세함을 떠나 자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가원 번역의 올재 판본은 믿어지지 않는 가격에 좋은 번역, 그리고 고풍스러운 문체로 <열하일기>를 즐길 수 있는 최상의 대안이고요.
MF[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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